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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Mar 21. 2021

페르시아 전쟁의 지리학(1부)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 맥락과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의 지리학적 고찰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 경기가 페르시아 전쟁(B.C.491-449) 도중 일어난 마라톤 전투(B.C.490)에 기원한다는 사실은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테르모필레 전투(B.C.480)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서 분전하다 전멸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와 300 용사들의 이야기는 서구 사회에서 비장함과 대의 명분을 위한 저항, 희생 정신의 상징처럼 회자되어 어고 있기도 하다. 물론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서진(西進)을 저지함으로써 고대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를 이끌고, 이를 토대로 서구 문명과 문화의 주춧돌을 쌓을 수 있었다는 의의도 가진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수십 년에 걸친 장대한 전쟁이 일어났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영토, 인구, 경제 규모, 병력 등에서 압도적으로 강했을 페르시아 제국이,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의 폴리스 연합을 상대로 결국 패퇴하였던 까닭은 무엇인가? 물론 이에 대해서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과 지중해의 해상 무역을 주관하던 아테네   동맹 폴리스 사이에 빚어질 필연적인 전쟁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개의 전투들로 스케일을 좁혀 보면,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 테르모필레 전투 등에서 월등한 우세를 지녔을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가 그리스 폴리스들의 군대를 상대로 고전하거나 패배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이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특히 아테네) 뛰어난 해양력, 중장 보병과 팔랑크스 전술의 우수성,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독립을 지키고자 일치단결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의지와 용기, 그리스 지도자들의 뛰어난 리더십 등을 통해서도 설명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만으로 페르시아 전쟁을 온전히 설명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다른 지역도 아닌 그리스로 진출하려 했는지에 대해서 깊이있게 이해하려면, 그리스나 에게 , 아나톨리아 반도 등의 지정학적 위치와 특성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페르시아 전쟁은 서구 사회에서 지리학과 역사학이 태동하는 계기로도 평가받는다.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한 헤로도토스(B.C.484?-425)의 저서 『역사』가, 서구 문화권에서 신화의 수준을 넘은 본격적인 역사학, 그리고 지리학이 태동케 만든 시조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 원인을 살펴보려면, 전쟁 당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지중해의 지정학적 상황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먼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지정학적 상황부터 살펴 보기로 하겠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서구 문화권에서 최강의 세력으로 대두한 상태였다. 오늘날 이란 남서부의 파르사(오늘날 이란 파르스 주 일대로, '페르시아'의 어원이 된 지명임)에 기원하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키루스 2세(Cyrus II, B.C.576?590?-B.C.530, 재위 B.C.550-530) 치하에서 메디아(오늘날 이란 북서부와에서 캅카스, 아프가니스탄 등지에 이르는 영역을 지배했던 고대 국가), 리디아(오늘날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 신바빌로니아 왕국 등 인접한 강국들을 정복하고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키루스 2세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B.C.522, 재위 B.C.530-522)는  이집트를 정복하였고, 그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Darius I, B.C.550-486, 재위 B.C.522-486)는 트라키아(오늘날 그리스 북동부와 불가리아 남동부, 이스탄불 일대를 일컫던 지명)와 마케도니아까지 정복하였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일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3대륙에 걸친 세계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단순히 영토만 광대한 제국이 아니었다. 키루스 2세는 피정복민들의 다양한 종교와 풍습을 인정하는 한편 이들을 제국의 백성으로 존중한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다양한 민족집단들로 구성된 거대한 제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을 다졌다. 전쟁 포로나 피정복민을 노예로 삼는 일이 당연시되던 고대 사회에서 키루스 2세의 이 같은 조치는 혁명적-물론 실제 키루스 2세의 통치는 반드시 ‘자비롭지만은’ 않았다-이었고, 급격하게 확장된 세계제국의 체제를 안정시키는데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캄비세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쿠데타 및 캄비세스 2세의 여동생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제위에 오른 다리우스 1세는, 집권 과정에서 초래된 혼란을 극복하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체제를 한층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장려하고 자신을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아후라마즈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은 샤한샤(‘왕 중의 왕’이라는 뜻)로 선언하였고, 이를 선전하기 위한 다수의 조형물과 기념물들을 제국 영지 곳곳에 세웠다. 이를 통해서 다리우스 1세는 선대 황제들보다도 훨씬 강력하고 중앙집권화된 왕권을 확고히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세계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점령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수도를 기존의 파르사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인접한 수사(Susa)로 이전하는 한편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제2의 수도 파르사(그리스어로 페르세폴리스)를 수사 남동쪽  지 점에 건설하였다.아울러 그는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체계적인 조세와 공물 수취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영토를 여러 속주로 나누어 총독을 파견하고 도로망을 건설하는 등, 제국의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내정을 견실하게 다지기 위한 노력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리우스 1세의 이러한 정치적 노력과 업적 덕분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광대한 영역을 일시적으로 지배했다가 내분, 피지배층의 저항 등으로 인해 순식간에 소멸했던 당대의 수많은 왕국들과 달리 거대한 영토를 효율적이면서도 영속적으로 지배할 역량을 갖춘 세계 제국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3개 대륙-당시 서구인들이 인식했던 세계의 전부였다-에 걸친 세계제국이었지만, 그 중심지는 오늘날의 이란 남부에서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 이르는 축선 일대였다. 이란 남부는 페르시아의 발상지였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메소포타미아 일대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형성한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복한 신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오리엔트 세계의 문물 교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당대 최대의 국제도시였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는 인류 최초로 철기를 사용했다고 알려진 집단인 히타히트가 건국되는 등 고대부터 문명이 발달했던 지역이었고, 키루스 2세에 의해 정복된 리디아는 당대 오리엔트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경제와 무역업이 발전해 있었다. 다리우스 2세가 제국의 수도 수사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에 위치한 사르디스(Sardis)까지 이어지는 구간에 약 2,700㎞ 길이의 왕도(王道)를 건설했다는 사실은, 해당 지역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서도 중심지에 해당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반면 오늘날의 이란 서부에 위치한 자그로스 산맥 동쪽의 영토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서 변경 지대로 여겨졌던 것 같다. 제국의 동부는 자그로스 산맥 외에도 힌두쿠시 산맥, 캅카스 산맥, 카라코룸 산맥 등의 험준한 산맥들이 분포했고, 쉽사리 굴복시키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유목민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례로 키루스 2세는 오늘날 카스피 해-아랄 해 사이에서 활동했던 스키타이 족의 일파 마사게타이(Μασσαγέται) 족을 정벌하러 갔다가 전사했고, 다리우스 1세도 스키타이 족에 대한 정복을 시도했다가 그들의 청야전술과 유격전술에 휘말려 참패를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더스 강 동쪽의 인도와 아시아는 당시 오리엔트와 유럽 세계에서는 ‘세상의 끝’이라 여겨지는 영역이었다. 이 때문에 키루스 2세는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장남 캄비세스 2세를 후계자로 선정하여 제국 서부의 중심부를 다스리게 하고, 또다른 아들이었던 바르디야(Bardiya, ?-B.C.522?)는 제국 동부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캄비세스를 보좌하도록 하는 후계자 구도를 정하기도 하였다.

전성기 페르시아의 영역과 왕도(기원전 500년 기준. 위키피디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세계제국으로 성장해 가는 동안,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에 위치한 발칸 반도 남부에는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문명을 꽃피워 가고 있었다. 발칸 반도 남부와 크레타 섬,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 해안 지대인 이오니아 지방 등지에 분포하던 그리스인들은 오리엔트 지역과는 상이한 종교와 문화를 갖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헤라클레스, 아테나, 펠롭스 등 그리스 신화의 신이나 반신 영웅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신들의 후손이자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으며,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민족들을 야만인(Barbarian)으로 치부하는 폐쇄적인 문화 또한 갖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인들은 오리엔트인들과는 상이한 이념 체계와 정신세계를 갖고 있다 보니, 세계제국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입장에서도 통치하거나 지배하기 쉬운 대상이 아니었다. Holland(이순호 역, 2006)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사르디스 총독조차도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기질 때문에,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을 지배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그리스인들의 문화와 성향은 페르시아 전쟁의 단초가 되는 이오니아 반란(B.C.499-493)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오니아 반란, 그리고 페르시아 전쟁의 이해를 위해서는 위해서는 그리스인들의 정체성과 성향 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와 그리스인들의 영역성에 대한 고찰도 이룽어질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그리스 공화국의 영토는 발칸 반도 남부 일대이지만, 고대 그리스의 영역은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에까지 걸쳐 있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로 잘 알려진 트로이 전쟁(B.C. 12세기 무렵)의 무대였던 트로이부터가, 아나톨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란 고대 국가였다. 즉,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미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와 어떤 식으로든 교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이미 청동기시대였던 B.C.12-10세기에 펠로폰네소스 반도 등 그리스 남부의 본토에서 아나톨리아 반도 남동부 해안 에 해당하는 이오니아 일대로 대규모의 이주를 하여 다수의 그리스계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훗날 이오니아 반란의 중심지가 되는 밀레토스를 비롯하여 프리에네, 레베두스, 에페소스, 콜로폰 등의 그리스계 도시들이 바로 그리스인들의 이오니아 이주로 인해 건설된 도시들이다. 이오니아 이주는 주로 아테네 일대에 거주하던 고대 그리스인의 하위 민족집단이었던 이오니아인들이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이오니아에 대규모로 이주한 뒤, 에게 해, 흑해 일대에서 활발한 해상 무역 활동을 벌였다. 이오니아인 뿐만 아니라 아이올리아인, 도리스인, 아카이아인 등 또다른 고대 그리스계 민족집단들도 지중해와 아나톨리아 반도 일대로 진출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영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및 지중해 진출 양상(출처: http://explorethemed.com/ethnicarchaic.asp)
청동기시대에 이주해온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의 위치(출처: Mac Sweeney, 2017, 380)

  메디아, 바빌로니아, 리디아 등의 광대한 왕국이 부침을 거듭했던 오리엔트 세계와 달리,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종교와 언어를 바탕으로 동포의식을 공유하기는 했지만 단일 국가 체제를 세우기보다는 여러 폴리스(도시국가)들이 병존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이오니아인, 아이올리스인, 도리스인, 아카이아인들은  상호간에 그리스인이라는 동질의식을 갖고는 있었지만, 이들의 풍습이나 언어, 정체성은 조금씩 상이했다. 그들은 국토의 약 80%가 산지로 이루어진 그리스의 산악 지형 사이에 형성된 분지나 해안 평야 지대에, 산지로 경계지워진 폴리스들을 건설했다. 폴리스들은 서로 다른 정치 경제 체제를 갖고 있었고, 이권 확보 및 그리스 세계에서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경쟁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는 이오니아 일대에 건설된 이오니아인들의 폴리스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갖고 있던 그들은 자기 나름의 지도자를 선출하여 자기들만의 통치를 하면서, 리디아 등지와 교역 활동을 벌여갔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세계제제국을 건설했던 기원전 500년을 전후해서, 그리스에서도 역사적으로 중대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의 아르콘(집정관)으로 취임한 솔론(B.C.638-558)은 아테네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자유민들에게 독립된 인격체인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민회를 구성할 권리를 부여하는 개혁을 실시하였다. 솔론의 개혁은 적지않은 진통과 시행착오, 부작용을 유발하기도 했으나,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쿠데타를 통해 참주 지위에 오른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계승되면서 아테네 민주정의 기반을 다지는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장기집권과 독재자로서의 전횡을 이유로 아테네 시민들에게 결국 추방당했으나, 그의 집권기에 아테네는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그리스 세계를 주도할 막대한 경제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후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통해 아테네는 부족장 등 귀족 중심의 체제를 탈피하고 자유민들의 정치 참여에 토대한 민주정 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이어서 아테네는 B.C.506년 스파르타, 테베 등의 침공을 격파하고 고대 그리스 세계의 최강자로 대두하였다.


  고대 그리스 세계와 아케네메스 페르시아의 본격적인 조우는 바로 아테네의 민주화라는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상기한 바와 같이 아테네의 민주화는 스파르타, 테베 등의 침공을 격파한 뒤에 완성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대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강한 의도를 가졌던 스파르타는 특히 아테네와 적대적이었다. 도리스인들이 세운 스파르타는 이오니아인의 나라인 아테네와는 혈연적 유대감도 약했고, 그리스의 부상을 반기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B.C.507년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해, 아케네메스 페르시아의 사르디스 총독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사절을 보내어 동맹 체결을 요청하였다. 아르타페르네스는 동맹 체결의 조건으로 아테네 사절들에게 흙과 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하였다. 아테네에 대한 대등한 동맹 체결이 아닌, 복종의 요구였다. 아르타페르네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사절단은 아테네로 돌아가 문책까지 받았지만, 아테네는 이러한 ‘굴종적’인 동맹을 한동안 유지하였다. 아케네메스 페르시아의 국력이 아테네와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강하기도 했거니와, 목전에 있던 스파르타의 위협을 견제하는 일이 더욱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B.C.506년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의 침공을 격퇴했다고는 하나 스파르타는 그 후에도 건재했고, 이로 인해 아테네는 그 뒤에도 페르시아와의 동맹 관계 유지가 필요했다. 물론 흙과 물을 바치라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요구가 아테네의 멸망이나 속국화, 속주화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B.C.499년 일어난 이오니아 반란은 고대 그리스 세계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지정학에 격변을 야기하였다. 이오니아 반도의 이오니아계 도시들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치하에서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사르디스 총독의 지배를 받는 참주들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지는 형태가 주를 이루었다. 사르디스의 총독이자 다리우스 1세의 형제이기도 했던 아르타페르네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서도 지위가 매우 높은 고관이었지만, 본토와는 거리가 이격된 이오니아 지역을 참주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 어느정도 의존하는 방식으로 다스렸다. 이오니아의 여러 그리스계 도시들 중에서도 특히 중심적인 위치에 있던 도시는 밀레토스(Μίλητος)였다. 한때 아나톨리아의 경제대국 리디아와 경쟁했을 정도로 상공업이 발달했던 밀레토스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 고대 그리스의 지성계를 대표하는 위대한 학자들을 배출한 장소이기도 하였다-탈레스와 그의 동료, 제자들이 만든 학파를 ‘밀레토스 학파’라 부를 정도이다. 이러한 밀레토스에 B.C.500년을 전후하여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 진원지는 아테네였다. 아테네 시민들이 참주들의 독재를 타도하고 스파르타, 테베의 침략까지 격퇴하며 민주정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밀레토스인들도 아테네와 같은 사회와 체제의 변혁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 결탁한 참주정을 타도하고 나아가 이민족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이오니아인만의 민주정이 지배하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밀레토스 시민들 사이에 퍼져갔다.

   이러한 움직임을 가장 위협적으로 받아들였던 인물은 밀레토스의 참주였던 히스타이오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참주가 된 조카 아리스타고라스()였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아케네메스 페르시아와 사르디스 총독의 보다 집중적인 정치적 지원을 받아 흔들리고 있던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아르타페르네스에게 밀레토스와 아테네 사이에 위치한 에게 해의 낙소스 섬 원정을 제안했다. 낙소스 섬은 아케네메스 페르시아(아나톨리아 반도)와 고대 그리스 세계를 잇는 중간 기착지에 해당하는 위치를 가진 교통과 군사 전략상의 요지였다. 게다가 이 당시 낙소스 섬에서는 내란이 일어난 상태였기 때문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낙소스 섬에 군사적 원정을 할 명분도 필요성도 확실했다. 아르타페르네스는 아리스타고라스와 함께 낙소스 섬 원정을 감행했다. 하지만 낙소스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낙소스 원정에서 아케네메스 페르시아군을 지휘한 인물로 아르타페르네스의 사촌이기도 했던 메가바테스(Μεγαβάτης)가 아리스타고라스와 불화를 빚으면서 낙소스 원정 계획이 효과적으로 진행되지 못했고, 이 틈을 타서 낙소스인들이 방어계획을 굳건히 하고 결사항전을 했기 때문이었다. 낙소스 원정이 실패하자 아르타페르네스는 아리스타고라스를 즉각 교체하였다. 그러자 아르타페르네스는 히스타이오스와 더불어 자신은 민주정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이오니아 지역에도 페르시아인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오니아인들의 민주정 폴리스들이 세워져야 한다는 연설을 통해 이오니아인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선동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 B.C.499년 이오니아 일대에서는 이오니아인들이 아케네메스 페르시아에 대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일으킨 이오니아 시민들은 사르디스 총독이 임명한 친 페르시아 참주들은 추방하였다. 고대사를 뒤흔든 페르시아 전쟁의 서막,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낙소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 그리스를 잇는 요지였고, 아테네, 에레트리아 등지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위협에 노출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The Mind Attic)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로부터의 해방과 민주정의 실현을 기치로 삼아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오니아 반란이었지만, 그 기치를 실현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오니아 도시들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국력차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현격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에게 해 너머의 동족, 즉 그리스 폴리스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먼저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패한 탓에 국력과 군사력이 약해진 상태였는데다, 스파르타의 지도자들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를 적대시했을 경우에 스파르타가 직면할 거대한 위협까지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스파르타의 설득에 실패한 아리스타고라스는, 그리스 동부의 아테네, 그리고 아테네에 인접한 폴리스 에레트리아()로 그 대상을 옮겼다. 그리고 아리스타고라스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아테네는 몇년 전 스파르타의 견제를 위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어둔 상태였지만, 아테네 시민들은 굴종을 강요한 그들의 태도에 크게 분개한 상태였다. 스파르타와 테베의 침공을 격파하고 공고한 민주정을 세우는데 성공한 그들 사이에는, 이오니아인들을 지원하여 이오니아에도 동포들의 민주정 폴리스가 세워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낙관도 퍼져 있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스파르타인들과 달리, 이오니아인과 동포적 동질성을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의 민회에서 시민들은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할 원정군을 파견한다는 결의를 도출했다. 이와 더불어, 아케네메스 페르시아와 인접하여 일찍부터 그들을 위협적이면서도 잠재적인 적대 세력으로 경계하던 에레트리아도 아리스타고라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지원병을 보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군대의 지원을 받은 이오니아 반란군은 기세를 모아 한때 사르디스 총독  휘하 병력을 격파하고, 사르디스의 외곽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사르디스의 성채 속으로 피신한 아르타페르네스를 체포하거나 죽이기는커녕 성채를 파괴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정예부대의 역습이 시작되자, 반란군은 물론 정예 중장보병으로 이루어진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원정군조차도 연패하고 말았다. 청동 갑옷과 투구, 방패로 무장하고 밀집방진(팔랑크스)을 구성한 그리스 중장보병대는 강력한 전사들이었지만, 아케메네스의 기병과 궁병 전력 역시 그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정예병이었을뿐더러 규모는 압도적으로 컸다. 게다가 그리스 중장보병의 팔랑크스 전술 역시 적지않은 취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융통성있는 진형 변화나 기동력의 발휘가 어렵고 지형의 제약을 크게 받는데다, 팔랑크스의 어느 한 지점이 붕괴되면 진형 전체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지기 쉽다는 문제점이었다. 숫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매우 우수했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군대와 달리, 이오니아 반란군의 병력은 정예병이라 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지원군은 질적인 수준이야 우수했을지 몰라도, 이오니아 반란의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란군이 연패를 거듭하는 가운데, 밀레토스를 제외한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반란 세력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강대한 군대 이상으로 거대했던 재정을 바탕으로, 막대한 금전을 뿌리며 이오니아인들을 회유했다. 이로 인해 이오니아 반란 세력은 군사적으로는 물론, 내부적으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의 항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아리스타고라스도 결국 살해당했고, 이어서 반란의 중심지 밀레토스가 결국 항복하면서 이오니아 반란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밀레토스는 아케네메스 페르시아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당했다. 고대 에게 해의 교역 중심지이자 서구 과학의 근간을 이루는 밀레토스 학파를 배태하기까지 하였던 밀레토스는 잿더미로 전락했고, 시민들은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끌려가고 말았다.


  밀레토스의 함락은 그리스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하였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심각한 위협이자 공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밀레토스를 초토화시킨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이어서 아테네, 에레트리아를 침공하여 밀레토스와 마찬가지로 초토화시켜 버릴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이 두 폴리스 사이에 확산되었다. 위기의식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이 두 폴리스를 제외한 다른 그리스 폴리스들 사이에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그리스 세계를 침공하여 파괴하리라는 위기감이 퍼져갔다. 이러한 위기의식의 확산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지정학에도 변화를 야기하였다. 이전까지는 자기 폴리스의 이권, 나아가 고대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놓고 이합집산하며 경쟁과 전쟁을 이어가던 폴리스들 사이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여 단결하여 저항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한 다리우스에게, 다음 선택지는 그리스 원정이었다. 이오니아 반란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그리스인들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장악하기 수세기 전부터 이미 이오니아 일대에 진출했던 민족집단이었다. 독자적인 세계관과 종교를 갖고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뎐 이들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로서도 지배하기 쉬운 이들이 아님이 드러났다. 게다가 그리스를 그냥 두었다가는 또다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위협하거나 피해를 입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우선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뒤, 그 남쪽의 그리스를 지국의 강력한 육해군을 동원하여 굴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징벌하고, 나아가 그리스 전역을 영향권에 넣어 무역과 해상력의 요지였던 에게 해를 자국의 내해처럼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서 B.C.492년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의 조카이자 사위인 마르도니우스(?-479)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방면으로 진격시켰다. 마르도니아는 마케도니아 국왕의 항복을 받아내어 속국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르도니우스는 마케도니아에서 그리스 본토로 남하하던 중 부상을 당한데다 그가 지휘하던 함대 역시 아토스 만에서 난파당하여, 일단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 전쟁 개전 당시 그리스의 지정학적 상황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경로(위키피디아)

  마르도니우스의 원정이 최종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고 하나, 이것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이미 마케도니아까지 손에 넣었고, 무리한 원정에 따른 문제와 조난으로 인해 일단 원정을 중지했다고는 하나 이것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준 피해는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고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에 흙과 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전하는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그리스 북부의 타실리아 지역과 에피루스 지역에 속한 폴리스들의 대부분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사신들의 요구에 따랐다. 심지어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스파르타에서 북쪽으로 약 5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했던 아르고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 제휴하여 경쟁 폴리스였던 스파르타를 제압하고 그리스 세계에서의 패권을 쥘 구상까지 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위협에 굴복 대신 저항을 선택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B.C.491년 흙과 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통해 항복 메시지를 전달하러 온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사절단을 처형했다. 스파르타는 나아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 결탁하여 그리스 세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던 아르고스를 침공하여 초토화시키기까지 하였다. 스파르타의 아르고스 침공은, 스파르타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게 절대로 굴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사 표명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에레트리아를 비롯한 여러 폴리스들도 아테네, 스파르타와 함께 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전선에 동참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다리우스 1세의  항복 권고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사절들을 살해하고 스파르타가 아르고스를 파괴하기까지 하자, 다리우스 1세는 2만 5천-3만 명에 달하는 병력과 600척 전후의 함선-전투함과 수송함을 포함한-으로 구성된 원정군을 조직하여 그리스 원정을 실시했다(이순호 역, 2006; Papalas, 2018). ‘불사부대(Immortals)’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최정예 군단을 포함한 정예 원정군이었다.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하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모욕한 아테네, 에레트리아아, 스파르타 등을 징벌하고 에게 해와 고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대원정이었다. 아타페르네스, 그리고 메디아 출신의 장군 다티스(?-?)가 원정군의 지휘를 맡았대. 이로서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의 막이 올랐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원정군은 우선 낙소스 섬을 제압한 다음, 에레트리아를 공격했다. 에레트리아는 강력한 성벽에 의지한 농성전을 개시했지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포섭당한 몇 사람의 고위 귀족이 성문을 몰래 열어버린 탓에 개전 6일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에레트리아의 시가지는 파괴당했고, 다수의 시민들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에게 납치당하여 노예로 끌려갔다.

  에레트리아를 파괴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공략을 위해,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약 35km 정도 떨어진  마라톤 평야에 상륙했다. 아티카 반도의 서부에 위치한 아테네는 북쪽의 파르티나 산맥, 서쪽의 에갈레오 산, 동쪽의 펜틸리 산과 이메토스 산 등의 산악 지형에 둘러싸인 분지였고, 파르티나 산맥의 최고봉 카라볼라 봉은 해발고도 1,413m에 달할 정도였다. 아테네 남부에는 항만이 발달해 있었지만, 항만에 상륙하려면 이타카 반도의 해안선을 돌아서 가야 했다.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는 우선 휘하의 함대와 병력을 이타카 반도 북동부의 마라톤 평원 일대에 주둔시켰다. 해안 평야 지형인 마라톤 평원은 곶으로 보호받는 만입부가 형성되어 있어, 대규모 함대와 병력의 주둔에 용이했다. 그들은 이곳에 지휘부를 세우고 보병을 주둔시켜 아테네 군을 유인한 다음, 함대를 통해 아테네 남부의 해안에 기병 전력을 주력으로 하는 주공 전력을 상륙시켜 아테네를 유린할 계획을 세웠다.

마라톤 평원, 아테네, 에레트리아의 위치와 지형(구글지도)

  에레트리아의 함락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기동은 봉화와 전령을 통해 아테네에 전달되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압도적인 전력, 그리고 에레트리아의 함락과 파괴 소식은 아테네인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내분으로 무너졌던 에레트리아와 달리, 아테네의 지도자 밀티아데스(Miltiades, B.C.554-489)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대군을 농성전으로 상대하는 대신 야전을 통해 요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험준한 산악 지대로 둘러싸인 아테네 분지를 침공하기 위해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이 선택할 수 있는 기동로는 제한적이었고, 마라톤 평원 역시 외부러 진출하려면 남쪽으로 이어지는 협소한 회랑 형태의 평지를 통과하거나, 서쪽으로 이어지는 산악 지대의 고개와 산길을 통과하거나, 아니면 해로를 이용해야 했다. 즉, 아테네와 마라톤 평원 일대의 지형을 활용하여 그들에게 전력 분산을 가용하거나 각개격파를 강요한다면 우세한 적군을 충분히 무력화하거나 격퇴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밀티아데스는 농성을 벌이다 내분으로 자멸한 에레트리아의 사례를 들면서, 야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 한편으로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비롯한 인접 폴리스에게도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지원군 확보를 위한 아테네의 노력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플라타이아가 원군을 지원했지만, 1천명이 채 안 되는 규모였다. 스파르타 역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파르타는 흙과 물을 바치라는 사절단을 처형하고 아르고스를 초토화시키는 등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게 강경하고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클레오메네스 1세(Cleomenes I, B.C.520-489)가 실각한 뒤, 내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파르타군은 비록 지원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는 했지만, 이를 위한 의사결정은 제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지원군은 결국 마라톤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플라타이아의 소규모 지원병을 통해 증강된 아테네의 중장보병 약 1만 명은 마라톤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B.C.491년 8월, 마라톤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기병대를 포함한 주력부대를 함대에 승선시키기 시작했다. 마라톤 평야의 보병을 아테네군을 견제하고 고착시킨 다음, 함대에 승선한 주력부대를 활용하여 아테네를 유린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들의 병력 이동과 기동 양상은 첩보망을 통해 밀티아데스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이러한 상황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을 격파할 절호의 기회로 역이용했다. 아테네 중장보병은 민주정의 파괴를 시도했던 강력한 경쟁자 스파르타, 테베를 격파하는 등 무시하기 어려운 실전경험을 갖추고 있었고, 팔랑크스 진형을 형성한 아테네 중장보병의 방어력과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자랑하던 기병 전력이 제 기능을 했더라면 기동력이 부족한 아테네 중장보병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겠지만, 그들은 이미 마라톤 전장을 이탈했다. 병력 분산으로 인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보병과 궁수는 더이상 아테네군에게 압도적인 숫적 우위를 점하지 못했거니와, 질적으로는 사실상 우위를 상실했다. 궁병과 보병의 공격만으로는 청동 갑옷과 방패를 장벽처럼 밀집시킨 팔랑크스 진형에 효과적으로 치명타를 입히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아테네 중장보병이 팔랑크스 진형을 굳건히 유지한 채 진격하자, 마라톤 평원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마라톤 평원의 지형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에게 더한층 불리한 여건으로 작용했다. 마라톤 평원의 동쪽에는 대규모 습지가 분포한다. 이 습지는 아테네군에게 밀리기 시작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이 급속히 와해되게 만들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이 아테네군에게 반격이나 역습을 가하려면 그 이전에 후퇴한 병력을 재편성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습지의 존재로 인해 병력의 재편성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테네군의 진격에 밀려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 장병들은 마라톤의 습지에서 와해되고 말았고, 그 중 상당수는 습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장병들은 해안에 정박해 있던 함선으로 도주할 수 있었지만, 다수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 장병들은 습지에 발이 묶인 채 건제를 무너뜨리고 우왕좌왕하다 아테네군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1만 5천명에 달했던 마라톤 평야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 병력 가운데 6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아테네군의 사망자는 200명이 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배치 및 포진(https://www.sutori.com/)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은 당대 최강의 세계제국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기병대와 불멸자 부대 등 정예부대가 마라톤 평원에 없었다. 함대에 탑승한 그들이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아테네를 유린한다면, 마라톤 전투의 대승리도 헛되이 아테네는 파괴된 에레트리아의 전철을 밟을 터였다.

  마라톤 경기의 유래가 되었다는 전설에 따르면, 마라톤 전투에서의 승리 직후 아테네군은 전투의 소식을 피말리며 기다릴 아테네 시민들에게 대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발빠른 사자를 보냈고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린 끝에 신속히 승리의 소식을 전한 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를 향해 전력질주했던 사람은 전설속의 사자 한 명만이 아니었다. 마라톤 전투에서 사력을 다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아테네군은, 숨돌릴 틈도 없이 완전무장한 그대로 아테네를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함대에 탑승해 아테네를 향하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주력 부대 때문이었다. 실제로 아테네군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주력군을 태운 함대가 아테네 근해에 도달하기 직전에 간신히 아테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사기는 물론 전력에도 큰 손실을 입었다. 반면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의 손실은 미미한 정도였다. 비록 기병대를 비롯한 주력 부대가 여전히 건재했다고는 하나, 이들만으로 전승을 거두어 사기가 충만한 아테네군 병력이 방어하는 아테네에 공격을 가하기란 무리한 일이었다. 결국 아르타페르네스와 다티스는 원정군을 철수시켰다.


  마라톤 전투를 통해서 아테네군은 당대 세계 최강의 국력과 군사력을 자랑했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을 좌절시켰다. 이로서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정확히는 아테네의 승리로 끝났다. 아테네는 그들보다도 월등히 국력이 앞섰던 메디아, 리디아 등의 나라들조차도 정복했던 대제국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군대에게 처음으로 패배의 쓴맛을 보게 해 준 셈이었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그리스 세계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외부의 거대한 세력을 상대로도 자국의 독립과 영광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후대의 코린트 동맹, 델로스 동맹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제1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사실상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했던 아테네는, 이후 그리스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명분과 실력을 얻을 수 있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 이전에 이미 민주정을 확립하고 이를 방해했던 테베, 스파르타 등을 격퇴하는 등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은 고대 그리스라는 영역이 아테네가 주도하는 영역, 나아가 아테네 중심의 고대 그리스 문화가 꽃피는 영역으로 재편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게 패배의 쓴맛을 안겨주었다지만, 그 타격은 치명적인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 비록 아테네를 굴복시키지는 못했지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에레트리아를 파괴하고 수많은 노예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라톤 전투에서의 손실 역시, 치명상이라기보다는 충분히 회복가능한 피해였다. 그리고 이는 제1차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도 수십년간 이어질 피르시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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