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2-3차 그리스 침공과 아테네의 대두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아테네, 나아가 그리스 세계를 정복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몰락이나 파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국력과 군사력은 여전히 강대했고, 마라톤 전투로 인해 이 거대한 제국의 기반이 흔들리거나 심각한 균열이 일어났다고 보기도 어렵다. 요컨대 아테네 입장에서 마라톤 전투는 동방의 거대한 제국으로부터의 침략을 격퇴한 영웅적인 승리였을지 몰라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입장에서는 에게 해 너머에 있는 작은 나라의 반항을 완전히 짓밟지 못한 수준 정도였다. 사실 다리우스 1세의 그리스 원정은 완전한 실패라고 보기도 어렵다. 비록 아테네의 파괴에는 실패했지만,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던 또 다른 주역이었던 에레트리아를 초토화시키는 데는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보다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원정을 통해,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그리스의 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세력을 철저히 응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이 계획을 성공에 옮기지 못했다. B.C.486년 이집트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진압하던 도중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 B.C.519?-465, 재위 486-465)는 다리우스 1세의 유지를 이어 두 차례에 걸친 그리스 침공을 감행했다. 그리고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세력이 크세르크세스 1세의 침공을 격퇴함에 따라, 고대 서구 세계의 지정학적 판도와 역사의 흐름은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당대 세계 최대의 판도를 자랑했던 거대한 세계제국이었다. 이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영광을 상징하는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키루스 2세-다리우스 1세의 치세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국가, 민족집단을 정복했다. 이 때문에 자칫 제국을 구성하는 속주나 속국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난다면, 이 거대한 제국은 자칫 내부에서 붕괴될 수도 있었다. 물론 키루스 2세와 다리우스 1세가 인류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위대한 군주들이었고, 그들은 왕도를 건설하고 각지에 총독을 파견하며 피정복민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등 단기간의 정복전쟁으로 건설된 세계제국이 유지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적인 조치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오니아 반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의 위대하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수완과 업적 역시 빈틈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라톤 전투가 끝난 뒤에는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어서 바빌로니아인들 역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다리우스 1세까지 세상을 떠났으니,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중대한 위기에 봉착한 셈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 못지않은 수완가였던 듯하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의 반란 진압에 성공했고, 이외에도 제국령 내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반란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를 통해서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 1세 사후 제국이 직면했던 위기를 극복하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라는 세계제국의 영역과 영속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자신의 권좌 또한 공고하게 다졌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크세르크세스 1세는 외모가 수려할 뿐만 아니라 통치자로서의 자질 또한 뛰어나 부왕 다리우스 1세에게 많은 기대를 받았다고 하는데, 즉위 초기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러한 평가는 결코 왜곡되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제국 영내에서의 반란을 지배하고 자신의 통치권을 확고히 하는 데 성공한 크세르크세스 1세의 다음 목표는,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세계였다. 고대 그리스 세계는 독자적인 세계관을 갖고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하는 등,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세계 지배를 방해할 위험 요소였다. 다리우스 1세가 아테네를 정복하고 징벌하려던 계획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은, 크세르크세스 1세가 고대 그리스 세계를 정벌해야 할 중요한 명분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세계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세계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반드시 점령해야 할 지정학적 이유를 갖고 있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동부는 당대에도 이미 변경이라고 여겨졌던데서 볼 수 있듯이, 그야말로 ‘문명 밖’의 세계였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동부와 인접해 있었던 스키타이 족의 영역은 캅카스 산맥 등의 자연 장애물로 경계지워졌고, 기마민족이었던 스키타이 족의 문화와 영역성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영역성과는 이질적이었다. 스키타이 족은 키루스 2세를 참살했을 뿐만 아니라, 다리우스 1세의 대공세를 기마민족 특유의 유목 생활과 유격전을 통해 막아 내기도 하였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정벌할 만한 영역이 아니었다. 바빌로니아와 인접한 아라비아반도의 사막, 그리고 이집트 영역 밖의 영역 또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굳이 정복할 이유가 없었다. 이집트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카르타고는 이미 그 시대에 지중해의 해양력과 해상 무역을 장악한 강자였지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데다 이미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협조하고 있었다. 반면 에게 해의 해양력을 상당 부분 장악했던 고대 그리스 세계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국익을 위협하는 지정학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세계는 달랐다. 고대 그리스 세계는 에게 해를 사이에 두고 아케네메스 페르시아의 영역과 인접했었다. 이오니아 반란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 세계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수백 년 전에 이미 이오니아인들은 아나톨리아반도 동부 해안지대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든 상태였다. 그리고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는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함으로써,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세계 경영을 방해할 수 있는 세력임을 입증했다. 스파르타 역시 흙과 물을 요구하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사절단을 살해함으로써, 그들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대한 적대관계를 분명히 했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있어 고대 그리스 세계의 정벌은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는 수준을 넘어, 전 세계에 군림하는 샤한샤로서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업이기도 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비롯한 아케메네스 영내에서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이 실시했던 그리스 원정의 규모와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대규모의 그리스 원정을 준비했다. 그리고 B.C.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이 고대 그리스 세계 정벌을 위해 동원했던 병력 규모를 압도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하여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헤로도토스의 “사기”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규모가 육해군을 통틀어 500만 명에 육박했다고 기록한다. 물론 당시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실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규모가 그 정도였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연구자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 원정에 동원했던 병력 규모를 6만-3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Kelly, 2003). 하지만 이 정도의 병력 규모 역시 당대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군이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병력 규모를 6만 명 정도로 추산하더라도, 다리우스 1세가 동원했던 병력의 2배가 넘었던 데다 고대 그리스 세계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 규모보다 많았다. 그 이상의 병력이 동원되었다면, 고대 그리스 세계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군이었다고 볼 수 있다.
크세르크세스는 대규모의 병력 동원뿐만 아니라, 그리스 세계의 분열과 그리스인들의 사기 저하를 위한 심리전에도 공을 들였다. 크세르크세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로 피신해 있던 그리스인 배신자들을 시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서신을 일부러 그리스 세계로 흘렸다. 심지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영내에서 붙잡힌 그리스인 첩자들을 처형하는 대신, 제국의 화려한 도시와 강대한 군대를 눈으로 보도록 한 다음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국력과 군사력이 그리스 세계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음을 과시함으로써, 그리스인들의 저항 의지를 꺾고 친 페르시아 폴리스의 수를 늘리려는 계책이었다. 아울러 다리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소 침공에 앞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 폴리스들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흙과 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하였다.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 세계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이루어졌다. 아테네에서는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테아데스가 제1차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협력했던 에게 해의 섬들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에 나섰다가 실패한 뒤 실각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아테네의 지도자가 된 테미스토클레스(Θεμιστοκλῆς, B.C. 524?-459?)는 대규모 함대 건설을 추진했다. 그리스 시민 계급은 중장보병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은 마라톤 전투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을 격퇴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중장보병이 아닌 노잡이 양성에 주안점을 두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해군 건설 계획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적지 않은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아테네 시민들의 기득권과 이해관계에 반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1차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의 존재로 인해 마라톤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아테네가 함락될 뻔했던 사실, 그리스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에게 해를 사이에 두고 이격 되었다는 지리적 특성, 그리고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그리스 세계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를 격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데미스토클레스의 이러한 결정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역량과 그의 주도로 건설된 아테네 함대의 전투력이 아무리 뛰어났다고 한들,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을 아테네의 힘만으로 격퇴할 수는 없었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 때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지원군 파견이 지연된 상황 속에서 불리한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고, 지형지물의 이점을 적절히 활용한 데다,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30km에 이르는 구간을 신속하게 기동한 덕분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크세르크세스가 동원한 병력의 규모는 제1차 페르시아 전쟁과 비교해도 최소 수 배 이상의 대규모였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승리가 되풀이될 것을 기대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따라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스파르타를 비롯한 여러 폴리스들에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동맹의 결성을 요청하였다. 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성향의 폴리스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동맹 결성 제안에 호응했지만, 아테네가 동맹의 주도권을 쥐기를 원치는 않았다. 예를 들어 아이기나 , 코린토스 등의 해군이 발달했던 폴리스들은 해군의 전통이 미약한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 해군의 지휘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다. 아테네만의 힘만으로는 아케네메스 페르시아의 대군을 대적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테미스토클레스는 여러 폴리스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동맹은 전 그리스 세계의 연합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스 연합으로 명명되었고, 육해군의 지휘권은 아테네가 아닌 스파르타 측에 돌아갔다. 물론 모든 그리스 폴리스들이 헬라스 연합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테베, 아르고스 등의 폴리스들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편을 들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육군은 아나톨리아반도 북서단의 다르다넬스해협을 건너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 방면으로 진격했다. 육군과 보조를 맞추어 해군 함대는 에게해 북단의 트라키아해 해안선을 따라 그리스 방면으로 향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육군이 북쪽의 마케도니아로부터 그리스 방면으로 쇄도하고, 해군이 그리스의 서부 및 남부 해안을 봉쇄하여 그리스 세계를 무력화한다는 전략이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는 에우보이아섬 동쪽 해안을 우회했던 방식을 버리고, 에우보이아섬과 그리스 사이를 통과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에우보이아섬은 험준한 산악지형이었기 때문에 상륙해서 군사 거점을 마련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에우보이아섬 동부 해안을 우회할 경우 그만큼 항해거리가 길어진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이 실패한 까닭은 마라톤 전투의 패배뿐만 아니라, 아테네를 공략했어야 할 함대와 정예부대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던데 기인하는 부분도 컸다. 따라서 크세르크세스는 대규모 육군 병력을 마케도니아로부터 남하시킨 뒤 라미아에서 테베, 아테네로 이어지는 협곡과 분지를 따라 진격시키고, 함대는 아르테미시온해협을 통과한 뒤 말리아만에서 북에우보이아만, 남에우보이아만을 따라 남진시킨 뒤 아테네 해안으로 육박하게 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이러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서쪽의 핀두스산과 북쪽의 오트리스산, 동쪽의 말리아만 , 남쪽의 칼리드모르산 등으로 둘러싸인 테르모필레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이 아테네, 펠로폰네소스 방면으로 남진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교통의 요지였다. 이 같은 테르모필레는 지형의 특성상 그리스군 측에서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했다. 산악지대와 바다로 둘러싸인 좁은 통로 형태의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예부대로 테르모필레의 협로를 가로막는다면, 대규모 병력의 침공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지형 조건으로 인해, 테르모필레에서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자랑하던 기병대가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B.C. 480년 8월 무렵에 접어들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육군은 테르모필레 인근까지 남진하였고, 해군 함대도 이와 발맞추어 남하하였다.
헬라스 연합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에 따라, 남진하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육해군을 저지 및 요격할 계획을 세웠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가 지휘하는 육군 병력은 테르모필레에 집결했다. 테르모필레에 집결한 병력은 흔히 레오니다스의 300 용사라 알려져 있지만, 실제 병력은 5천 명-1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레오니다스 1세는 왕실 근위대 300명 외에 스파르타 보병 1,000여 명을 동원했고, 이외에 헬라스 연합에 속한 폴리스들이 수천 명의 병력을 지원해 주었다. 이와 더불어 아테네 해군을 중심으로 하는 200여 척의 그리스 함대는 에우보이아섬 북단의 곶인 아르테미시움에 집결했다. 아르테미시움은 에우보이아섬과 마그네시아섬 사이의 아르테미시움해협 입구에 위치했고, 말리아만 및 테르모필레와도 이어지는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테르모필레 전투 발발 직전이었던 B.C. 480년 8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는 마그네시아반도 근해에서 풍랑을 맞아 400여 척에 달하는 함선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는 800척 이상의 함선을 여전히 보유하였고, 이는 헬라스 연합이 동원한 함선의 3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는 마그네시아반도 남단의 아르테미시움해협 입구에 도달했다.
그리스 측의 해군력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해군에 비해 확연히 열세에 처해 있었지만, 한 가지 유리한 고지를 점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정보전에서의 우위였다. 아르테미시움 해전이 일어나기 직전, 스킬리아스(Scyllias)라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 소속 병사가 탈영한 뒤 아르테미시움에 주둔한 그리스 함대로 헤엄쳐 왔다. 그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가 200척으로 구성된 별동대를 에우보이아섬 동해안에서 에우보이아해협으로 이어지는 경로로 우회시켜 아르테미시아해협에서 그리스 함대를 포위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웠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만일 성공한다면, 그리스 해군 전력이 섬멸당할 위험성이 큰 작전이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가 분단된 기회를 틈타 그들을 각개격파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에 따라 아르테미시아의 그리스 함대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아르테미시움 해전이 막을 올렸다.
전투는 그리스 함대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의 본대 간의 교전으로 시작되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 본대는 여전히 그리스 함대보다 숫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충각을 장착한 그리스 함선들이 밀집대형을 이루며 돌격을 개시하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의 전열은 흐트러지고 말았다. 그리스 해군은 30여 척의 적함을 나포하는 성과를 얻었다. 이어진 폭풍우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에 치명타를 가했다. 그리스 함대와 달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의 본대는 두 번째 폭풍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해군의 별동대를 추격한다는 그리스 해군의 계획은 폭풍으로 취소되었지만, 별동대는 폭풍우 때문에 전멸했다. 폭풍우로 인해 두 번이나 막대한 손실을 입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는 사기마저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이튿날 아테네에서 53척의 함선이 증원되어 아르테미시아의 그리스 함대에 합류했고, 길리키아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격파하는 전과도 올렸다. 3일째에는 그리스 함대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협소한 아르테미시아해협에서 벌어진 난전에서 그리스 함대는 소속 함선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고 말았다. 하지만 막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함대는 아르테미시아해협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스 함대는 중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아케메네스 함대는 폭풍우와 그리스 함대와의 교전으로 인해 그리스 함대의 손실을 월등히 상회하는 수백 척 이상의 함선을 상실하고 말았다.
테르모필레에 배치된 그리스 육군 병력의 규모 역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동원했던 7만-30만 명 규모의 병력에 비하면 현격할 정도의 열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르모필레의 지형은 일종의 병목 현상을 일으키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이 가졌던 병력상의 우위를 크게 상쇄하였다. 테르모필레 협곡의 좁은 너비로 인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대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넓은 면적에 전개하여 압도적인 공격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지형적인 제약으로 인해 사실상의 축차 투입을 강요당했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강력한 스파르타 중장보병을 중심으로 한 헬라스 연합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거듭 격퇴당하고 말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최정예 불사부대까지 동원했지만, 헬라스 연합이 동원한 중장보병대의 질적 수준과 사기는 불사부대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스파르타군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을 상대로도 그 용명을 보란듯 떨쳤다.
험준한 산지와 말리아만으로 둘러싸인 병목 형태의 지형 때문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기병대의 우회를 통해 그리스군의 측방이나 후방을 급습한다는 필승의 작전을 구사할 수도 없었다. 테르모필레 협로에서의 공방전이 계속 진행되었다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손실의 누적과 보급의 차질에 따른 사기 저하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반 연구결과도 있다(Bongers and Torres, 2019). 하지만 병목과도 같은 지형 조건을 활용한 그리스의 우위는 테르모필레 지역의 토박이 주민이었던 에피알테스(Εφιάλτης, ?-B.C. 470?)의 배신 행위로 깨어지고 말았다. 에피알테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제공할 보상금을 노리고, 테르모필레 남쪽 칼리드모르산에 우회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크세르크세스는 휘하 지휘관 히다르네스(Hydarnes, ?-?)에게 불사부대를 포함한 2만여 명의 정예부대를 지휘하여 테르모필레에 포진한 그리스군의 배후를 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다르네스 휘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 병력의 테르모필레 우회는 레오니다스 이하 그리스군에게는 파멸을 의미했다. 스파르타군을 비롯한 그리스군 장병들의 전투력과 전투의지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는 포위 섬멸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키스 출신의 척후부대가 히다르네스군의 우회 사실을 전해오자, 레오니다스는 수천 명에 달하는 그리스군의 주력부대로 하여금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신속히 전선을 이탈하도록 하였다. 그리스군 육군의 정예 병력이 테르모필레에서 포위 섬멸당한다면, 헬라스 연합이 전쟁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레오니다스는 휘하 300명의 근위대에게 테르모필레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을 저지하고 아군 주력의 후퇴를 엄호한다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외에 테스피아이 출신 병력, 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폴리스였던 테베 출신의 의용군 병력, 레오니다스 근위대가 데려온 헬로트 등도 테르모필레에 잔류하였다. 총 1,500여 명의 헬라스 연합군 병력이 테르모필레에 잔류하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과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레오니다스 휘하 장병들은 팔랑크스 대오를 굳힌 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대군을 상대로 결사적으로 싸웠다. 스파르타와 테스피아이, 테베의 전사들은 자신들의 몇 배에 달하는 적군을 살육하였고, 그들의 시체는 테르모필레 일대에 산을 이룰 정도였다. 하지만 고립된 데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 병력에게 포위당하기까지 한 레오니다스 휘하 병력의 한계는 뚜렷했다. 거듭되는 전투 끝에 그리스 전사들의 창과 방패도 무뎌지고 꺾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투입된 불사부대와 정예 기병대, 궁병대의 공격은 테르모필레에 잔류한 그리스군의 숨통을 끊고 말았다.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군 장병들은 마지막까지 격전을 치르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창검과 화살촉에 쓰러지고 말았다. 크세르크세스는 2만명 이상의 휘하 병력을 잃은 채 테르모필레 협로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스군의 손실은 2천명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는 적군이라 하더라도 전사자의 시체를 정중히 매장하는 관습이 있었지만,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군 장병의 시신은 수습하지 않고 방치했다. 크세르크세스가 예상조차 하지 못한 막대한 손실을 입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던 레오니다스 1세의 머리는 테르모필레에서 아테네로 통하는 길목에 효수되었고, 스파르타인들은 수십 년 뒤에야 그의 유골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테르모필레에서 레오니다스 1세 휘하의 그리스군 병력이 전멸한 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파죽지세로 남하를 개시했다. 테르모필레에서 수천 명의 그리스군 병력이 전장을 이탈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병력으로 지형지물의 이점도 갖지 못한 상황에서 수만-수십만명에 달하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을 대적할 수는 없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로 선전했던 그리스 함대 역시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포기하고 후퇴해야 했다. 아르테미시움 해전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을 입은 데다, 테르모필레가 함락된 상황에서 아르테미시움을 유지해 본들 의미가 없었고 유지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B.C. 480년 9월, 아테네는 결국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아테네의 시가지와 주요 건물, 신전, 기념물들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 병사들에 의해 불타거나 파괴당하고, 일부는 전리품으로 노획되기까지 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 하에 아테네 시민들은 아테네 서쪽에 위치한 살라미스섬으로 피난하였다.
헬라스 연합 내부에서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의 승산 없는 전쟁의 지속에 대한 회의의 목소리도 불거져 나왔다. 크세르크세스는 헬라스 연합의 저항을 무력화하고 그리스 세계의 전역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게 복속하도록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첩자, 석방된 포로 등을 보내어 내분을 유도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해군을 살라미스해협에서 격파하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전쟁지속능력 및 의지를 분쇄하고, 그리스로부터 완전히 격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코린트 지협에 함대를 배치한다는 헬라스 연합 구성원들을 설득하여, 살라미스해협에 함대를 배치하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를 요격할 준비를 하였다. 그는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그리스군이 선전했던데 착안하여, 좁은 살라미스해협의 지형을 이용하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가 가진 숫적 우위를 상쇄할 수 있다고 보았다.
크세르크세스 역시 살라미스의 그리스 함대를 격파하고 살라미스섬을 점령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아테네를 점령하여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살라미스섬으로 피난하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고 있었다. 360-80척 가량의 함선을 보유했던 그리스군의 전력은 여전히 무시하기 어려웠고, 헬라스 연합도 아직 건재했다. 사실 살리미스 해전 직전의 전황은 아테네가 함락당하는 등 헬라스 연합이 완연한 수세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살라미스 해전을 굳이 강행할 필요가 없는 측면도 있었다. 예컨대 크세르크세스의 참모였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속국 할리카르나소스의 여왕 아르테미시아 1세는 협소한 살라미스만에서 무리하게 전투를 벌이는 대신, 전세를 관망하며 헬라스 연합이 자중지란에 빠지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조언을 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살라미스해협까지 진격해온 크세르크세스에게 보급문제는 날이 갈수록 중대한 골칫거리로 부상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도래한다면, 대규모 원정군을 위한 보급계획에 더욱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소지도 컸다. 게다가 헬라스 연합을 분열시키려는 크세르크세스의 책략과 첩보전에도 불구하고, 헬라스 연합에서 테미스토클레스의 영향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살라미스를 함락시키기 위해, 그리스 함대를 살라마스해협 밖으로 끌어내어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살라미스해협 인근에서 패전한 뒤 엘레우시스만으로 도주하는 그리스 잔존 함대를 소탕하기 위해, 200척 가량의 별동대를 살라미스섬 남쪽으로 우회하여 엘레우시스만 방면으로 향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물론 테미스토클레스와 그리스 함대는 크세르크세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대신, 살라미스해협 내측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B.C 480년 9월 하순께의 어느 날, 테미스토클레스의 노예인 시킨누스(Sicinnus, ?-?)라는 인물이 조각배를 타고 살라미스해협을 건너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진영으로 잠입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 수뇌부의 처소로 이동한 그는, 헬라스 연합에서 중대한 내홍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스파르타 등 비 아테네 폴리스 소속 함대들이 야음을 틈타 살라미스에서 이탈하려 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했다. 시킨누스가 가져온 서신에는 그의 주인 테미스토클레스가 연이은 패전과 내분 등에 지친 끝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편으로 투항할 계획이라는 내용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시킨누스의 서신은 크세르크세스에게까지 전해졌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 수뇌부는 살라미스 해협을 완전히 봉쇄하여 내통자들과 함께 스파르타 등 저항을 계속하는 그리스군 함대를 격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크세르크세스는 저항하는 그리스인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장관을 몸소 관람하기 위해, 살라미스 해협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 아이갈레오스산에 전망대를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시킨누스의 서신은 사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를 비좁은 살라미스해협으로 유인하기 위한 테미스토클레스의 책략이었다. 헬라스 연합의 내분을 유발하기 위해 첩보전에 많은 공을 들였던 그는, 내분을 빙자한 테미스토클레스의 계략에 보기좋게 넘어가고 말았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는 시킨누스가 가져온 첩보에 따라, 살라미스 해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50척가량의 그리스군 함선들이 북쪽의 엘레우시스해협 방면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해군을 완전히 포위하여 섬멸할 기회를 포착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는 신속히 살라미스해협으로 돌입했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내홍으로 혼란에 빠진 그리스 함선들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갖춘 그리스 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시킨누스의 계략에 빠진 크세르크세스 이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 수뇌부는, 테미스토클레스가 그토록 원했던 전장이었던 살라미스해협에 스스로 함대를 바친 셈이었다. 비좁은데다 익숙하지도 않은 살라미스해협에서, 뛰어난 기동력을 자랑하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는 그들의 장기를 발휘할 공간을 잃어버린 채 그리스 함대와의 난전을 강요당했다. 하루 종일 이어진 해전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는 200-300척가량의 함선을 잃었다. 그리스 함대의 손실은 40척 정도에 그쳤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함대는 크세르크세스가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막심한 손실을 입고 결국 살라미스해협에서 패퇴하고 말았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중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그렇다고 전투력이 붕괴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해협에 거대한 부교를 설치하여 살라미스섬을 점령하고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를 설욕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군의 공격으로 인해 크세르크세스의 부교 설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게다가 이탈리아반도 남단의 시칠리아섬에서 크세르크세스의 동맹국이었던 카르타고군이 그리스군에게 패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게다가 겨울이 가까워오면서 보급 문제까지도 크세르크세스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여러 민족집단과 속주로 구성된 거대 제국이었던 거대 제국이었기 때문에,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 전선에만 장기간 머무르기도 어려웠다.
결국 크세르크세스는 다리우스 1세의 사위이자 제1차 페르시아 전쟁 직전 그리스 원정을 지휘하기도 했던 마르도니오스에게 수만 명의 정예병력을 맡겨 그리스 공략을 지속하게 한 뒤, 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마르도니오스는 그리스 북부 테살리아 지역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아테네, 스파르타 등지에 사절을 보내어 이들을 회유하고 헬라스 연합의 내분을 야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마르도니오스의 시도는 이전에 크세르크세스가 시도했던 회유와 분열 시도가 그러했듯이 성공하지 못했다.
B.C. 479년 봄이 되자, 마르도니오스는 테살리아로부터 남진하기 시작했다. 동맹국 스파르타는 지원군 파견에 소극적이었고, 아테네 시민들은 또다시 살라미스로 피난했고, 마르도니오스는 텅 빈 아테네를 또다시 불태웠다. 마르도니오스는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65km가량 떨어진 플라타이아에 요새를 구축하고, 헬라스 연합 육군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플라타이아는 아소포스강이 흐르는 그리스 중부 보이오티아 지방의 분지로, 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폴리스였던 테베와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평지가 발달하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강점이었던 기병대의 활동에 유리했다.
B.C. 479년 6월, 대규모 축제인 히아킨티아 축제를 마친 스파르타의 중장보병대는, 이번에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편에 선 아르고스를 격파하며 아테네 구원을 위해 북진하기 시작했다. 20대 청년 지휘관 파우사니아스(Παυσάνιας, ?-B.C> 470?)가 지휘하는 스파르타군은 1만명이 훨씬 넘는, 일개 폴리스가 동원한 병력으로는 유례없는 규모의 대군이었다. 아테네에서도 아리스테데스( Ἀριστείδης, B.C. 530-B.C. 468)가 지휘하는 8천여 중장보병대가 스파르타군과 합류하기 위해 보이오티아 방면으로 출명했다. 이외에도 플라타이아, 메가라, 테게아 등 헬라스 연합에 속한 폴리스들의 병력이 아테네를 또다시 유린한 뒤 플라타이아에 주둔한 외적을 격퇴하기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
B.C. 479년 8월, 파우사니아스가 인솔하는 그리스군은 플라타이아 평원 남부의 구릉지대로 진격했다. 숫적으로 우세한데다 정예 기병대까지 다수 보유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우세를 상쇄하기 위해, 고지대를 점령한 뒤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아소포스강 남쪽의 구릉지로부터 진격을 개시한 그리스군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 궁병대와 기병대의 맹공을 받아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파우사니아스의 대법하고 침착한 지휘 아래 대오를 유지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그리스군이 고지대를 차지한 탓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이 자랑하는 기병대와 궁병대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난전 중에 마르도니오스가 전사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지휘 계통도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전투가 끝났을 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은 수만 명에 달하는 인명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스군의 피해 규모는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불과 159명의 그리스군만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하는 등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의 인명 손실에 비해 현저히 작은 손실만을 입었다. 페르시아 전쟁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였던 플라타이아 전투는, 이처럼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10년이 넘도록 이어진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정확히는 헬라스 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이오니아에 에게해, 나아가 그리스 본토까지 장악하려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야망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군에게 고향을 파괴당한 아테네는 에게해에서 적극적인 세력 확장에 나섰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B.C. 478-B.C. 477년에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인 아리스티데스의 제안으로, 아테네는 이오니아를 포함한 에게해 일대의 폴리스들과 델로스 동맹을 창설하였다. 델로스 동맹의 주도자가 된 아테네는 에게해에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이어가며, 에게해뿐만 아니라 지중해 동부와 흑해 입구까지 장악하는 해양제국으로 발돋움했다. 아테네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간의 항쟁은 B.C. 449년 칼리아스 조약을 통해서 종식되었다. 이로서 고대 그리스 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아테네의 최전성기가 도래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패배와 아테네의 팽창은, 에게해를 비롯한 지중해 동부뿐만 아니라 이집트, 트라키아 등 여러 속주에 대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지배력 약화로 이어졌다. 전 세계를 호령할듯한 기세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였지만, 페르시아 전쟁의 패배로 인해 세계제국의 국력은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 아테네의 황금기도 반세기 가량 뒤에는 종언을 고했다. 델로스 동맹을 이용한 아테네의 독주는 스파르타를 비롯한 경쟁 폴리스들과의 갈등을 초래했고, 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404)으로 불거졌다. 전쟁 초반에는 아테네가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흑사병의 창궐로 인해 국력이 극도로 약화된 아테네는 결국 스파르타군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후 그리스 세계는 대립과 분열을 이어가며 전성기의 활력을 잃고 말았다.
B.C. 330년대에 접어들어, 그리스 세계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대왕'이라는 칭호로 널리 알려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B.C. 356-B.C. 323, 재위 B.C. 336-323)에 의해 정복당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멸망했고, 아테네, 스파르타 등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세운 헬레니즘 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이로서 세계제국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와 고대 그리스의 시대는,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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