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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ul 25. 2021

기후변화에 따른 훈족, 게르만족의 이주와 서로마의 멸망

유럽, 통합에서 분열로

  4~5세기에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유럽의 영역을 송두리째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고, 유럽은 여러 나라로 분열된 채 두 번 다시 통일된 나라가 지배하는 영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유럽이라는 지리적 스케일에만 국한해서 볼 일이 아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의 이동은 중국의 지정학적 변화와 세계적인 기후변화라는 세계 스케일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는 사건이다.

  이번 장에서는 유럽의 지도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의 멸망을 지리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훈족의 조상은 오늘날 중국 북부와 몽골 일대에 걸쳐 분포하던 튀르크계 유목민족인 흉노족으로 알려져 있다. 흉노족은 한 고조 유방의 원정군을 섬멸하고 전한 초~중기에 한나라의 상국(上國) 행세를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흉노족이 살던 초원이 펼쳐진 드넓은 광야는 말을 키우고 기병을 훈련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지리적 환경을 갖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몸에 익힌 흉노족은 태생적으로 당할 자가 없는 강력한 기병이었다.

  흉노족은 싸움에만 능한 집단이 아니었다. 비록 고유의 문자 체계를 발달시키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중국 북부와 몽골은 물론 바이칼호 인근, 중앙아시아의 동부 일대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흉노족은 고대의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취했고 수준 높은 금속가공 기술까지 발전시켰다. 아울러 유목민족이었지만 초원에 군데군데 펼쳐진 기름진 땅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

B.C. 200년 무렵 흉노족의 영역(위키피디아)

  그런데 B.C. 1-2세기 무렵부터 동아시아의 기온은 계속해서 낮아지다가 B.C. 29년-A.D. 219년 사이에는 소빙하기라 부를 정도로 기온이 크게 떨어졌다. 고위도 지대의 초원에서 살아가던 흉노족은 그들보다 위도가 낮은 곳에 살던 중국인에 비해 이 같은 기후변화에 특히 취약했다. 위도가 낮은 중국 본토에서는 기후가 한랭해져도 그런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위도가 높은 몽골의 초원지대는 한랭화가 닥치자 급속하게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추위와 서리가 내리자 흉노족의 농경지에서는 흉작이 이어졌다. 추워진 날씨 탓에 풀이 말라죽고 초원의 면적이 줄어들면서 말을 키우기도 어려워졌다. 기후변화로 인해 인구 부양력이 약해짐은 물론 무적의 기병대를 존재하게 해 준 말조차 키우기 힘들어지면서 흉노족의 힘은 약화되어 갔다.

  B.C. 2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무제(武帝, 157-87 B.C., 재위 141-87 B.C.) 북벌에 흉노는 연패를 거듭하며 분열했다. 수십  동안 착착 국력을 키우며 체제를 다져갔던 한나라와 달리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은 흉노족의 힘은 예전 같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제의 지정학적 전략은 흉노족의 힘을 더한층 약화시켰다. 무제가 장건(張騫, ?-114 B.C.) 중앙아시아 일대로 파견하여 실크로드를 개척함에 따라 흉노족은 동서 교역을 독점하면서 얻었던 막대한 이익까지 잃어버렸다. 한나라가 월지  중앙아시아의 나라들과 연합하면서 흉노족은 동서로 포위당하는 국면에까지 몰렸다.

  흉노족은 결국 서쪽으로 쫓겨가기 시작했다.  흉노족은 중국 북부와 몽골에서 쫓겨나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방면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스키타이족 등 현지의 여러 민족집단과 통혼하고 동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마치 오늘날의 터키인이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조상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갔다. 흉노족의 후예인 그들은 훈족이라 불렸다.

  A.D. 2-3세기에 접어들며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기후는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온난 습윤해졌다. 한랭화로 인해 중국 북부와 몽골의 기반을 잃고 근거지에서 쫓겨난 흉노족은 2-3백 년 뒤 중앙아시아의 또 다른 기후변화로 인해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외모와 DNA는 바뀌었지만 대대로 물려받은 뛰어난 기마 궁술은 결코 녹슬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에의 초원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훈족은 조상들 못지않게 강력한 유목민 집단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4세기에 접어들면서 중앙아시아의 기후는 또다시 급변했다. 강력한 엘니뇨 남방진동의 영향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 사상 최악의 가뭄이 수십 년 동안이나 이어지면서 훈족은 또다시 삶의 근거지를 옮겨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훈족은 피폐해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떠나 또다시 서쪽으로 이주했다. 그들 앞에는 수백 년 전 조상들의 고향을 빼앗았던 한나라라는 대제국 대신, 용맹한 전사이기는 했지만 체계적인 나라를 이루지 못했던 게르만족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영역 서쪽에는 자리 잡고 있던 로마제국은 이미 전성기를 지나 있었다.


흉노족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며 훈족으로 변모해 갔다.(출처: Erdy, 1994

  기후변화는 흉노족의 운명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서구의 문명과 영토의 직접적인 토대를 이룩했던 로마 역시 기후변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B.C. 2세기-A.D. 2세기에 걸쳐 로마는 온난 습윤한 기후와 줄어든 자연재해 속에서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로마가 유럽의 지리적 기반을 이룬 대제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온화하고 안정되었던 기후조건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3세기 이후 로마에도 기후변화가 도래했다. 일조량이 줄어든 데다 화산 활동까지 빈번해지면서 로마의 기후는 한랭 건조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춥고 건조한 기후로 인해 로마의 농업 생산력은 크게 감소했고,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이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감소와 인구 부양력 및 경제력의 악화는 빈부격차의 확대에 따른 양극화, 정복 전쟁의 중단에 따른 노예 수급의 급감 등과 맞물리며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러한 기후변화의 문제는 특히 로마의 서부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동부 지역은 대체로 기후변화의 타격을 비교적 덜 입은 덕분에 인구 부양력과 경제 및 사회의 건전성을 유지했지만, 기후변화의 피해를 크게 입은 서부 지역에서는 인구 부양력과 경제력이 쇠퇴하면서 사회적인 혼란도 심화되어 갔다.

  로마는 기후변화와 맞물려 일어난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3세기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정복전쟁이 중단되고 로마 경제를 지탱하던 노예의 수급이 줄어들면서 로마의 경제와 사회는 활력을 잃어 갔다. 소수의 부유한 시민은 대지주가 되어 기득권을 키운 반면 강력한 군단병을 지탱했던 대다수의 자영농 시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양극화에 질병까지 유행하여 병력 자원이 줄어든 탓에 로마는 넓은 국경을 지킬 여력마저 부족해졌다.

  3세기부터 게르만족의 국경 침입과 약탈도 빈번해졌다. 갈리아 전쟁을 계기로 로마에 복속되며 크게 쇠퇴한 켈트족과 달리 게르만족은 로마의 최전성기에도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가 로마가 쇠퇴하자 갈리아 등 로마 서부를 대대적으로 침략하며 약탈을 일삼았다. 224년 건국된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로마의 남동부 영토를 잠식하며 안보를 위협했다. 게다가  235-284년에 걸쳐 군사지도자들이 멋대로 황제를 칭하며 쿠데타를 일삼는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하면서 로마의 정치와 사회 체제는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이 와중에 게르만족이 제국 동부의 아나톨리아반도와 발칸반도까지 침략해와 약탈을 일삼으면서 로마는 더더욱 피폐해져 갔다. 세계서 교과서나 책을 보면 대개 4세기 후반 훈족의 서진이 촉발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서로마 멸망을 불러왔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게르만족의 로마 침입과 약탈이 이루어져 오고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eocletianus, 244-311, 재위 286-305) 황제는 속주를 재편하고 총독에 대한 통제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군대와 재정을 개혁하여 쇠퇴해 가던 로마의 활력을 되살렸다. 아울러 거대한 제국의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자신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던 로마 동부를 직할령으로 삼아 로마 전역을 총괄하는 한편, 게르만족의 침입에 시달리며 쇠퇴해 가던 서방에는 자신의 통제를 받되 영토를 다스리며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지휘할 서방 황제를 두는 방식이었다. 아울러 동서의 두 황제는 각각 영토 일부를 다스릴 부황제를 두도록 하여, 로마를 사실상 4명의 군주가 분할 통치하는 4제 정치(tetrachy)를 도입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05년 은퇴한 뒤 벌어진 혼란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 272-337, 재위 306-337)가 수습했다. 단일 황제가 된 그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후대에 그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비잔티움(오늘날 이스탄불)으로 천도한 뒤 로마의 부흥을 위한 대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후변화와 사회구조적 모순 속에 쇠퇴해 가던 로마를 부흥시키고 게르만족을 제압하는 위업을 남겼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제 정치 체제는 훗날 로마가 분열할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콘스탄티누스의 비잔티움 천도는 로마의 중심지가 이탈리아반도를 포함한 서부에서 발칸반도, 아나톨리아반도와 같은 동부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였다.


  중앙아시아를 떠나 서쪽으로 이주하던 훈족은 4세기 중반에 이르러 흑해 연안에 도착했다. 그 무렵 흑해 서쪽 연안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살고 있었다. 서고트족은 타고난 전사들이었지만 신묘한 기마 궁술을 자랑하며 적진을 사정없이 치고 빠지는 훈족은 그들조차도 상대하기 버거운 강적이었다. 500년 전에 게르만족의 서진으로 인해 켈트족이 이주했듯이, 서고트족은 375년 동쪽에서 몰려오는 훈족을 피해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쪽 너머에는 500여 년 전 이상적인 기후조건 아래 번영을 구가하며 켈트족을 몰아낸 로마가 아닌, 기후변화에다 사회구조적 모순까지 더해지며 쇠퇴해 가는 로마가 자리 잡고 있었다.

  376년 서고트족은 로마에 피난을 요청하여 도나우강 일대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로마는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진 데다 행정력까지 무기력해진 탓에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거나 통제하지 못했다. 도나우강의 새 보금자리에서도 기아에 시달린 서고트족은 378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같은 해 8월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하드리아노폴리스(오늘날 터키 에디른)에서 로마의 정예군을 격파했다. 로마는 할 수 없이 서고트족과 포이두스(foedus) 관계를 맺었다. 포이두스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고 군사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일정 지역의 점유와 자치를 인정받는 일종의 영토에 기반한 동맹관계이다. 이에 따라 서고트족은 일리리쿰(Illuricum: 오늘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로마 밖의 게르마니아에 거주하며 로마와 수백 년간 분쟁을 이어온 게르만족이 로마 영내로 유입되기에 이르렀다.


훈족의 흑해 연안 진출과 서고트족의 이주(Pinterest)

  로마의 영역 내부로 들어온 서고트족은 로마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군사 부문에서의 영향력이 두드러졌다. 포이두스가 영토뿐만 아니라 군사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는 동맹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로마군 내부에는 게르만족 용병이나 군인의 비중이 늘어갔고, 게르만족 출신 장군이나 군사지도자들도 생겨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고트족의 이주를 계기로 다른 게르만족 분파들도 로마 영내로 침입이나 이주를 가속화했고, 그중 일부는 로마와 포이두스를 체결하여 로마 영내에 자치권을 갖고 정착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기후 변화로 인해 서쪽으로 이주한 훈족은, 로마의 기후변화를 배경으로 게르만족과 로마의 영역 및 지정학에도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로마는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47-395, 재위 379-395) 사후 그의 장남 아르카디우스(Arcadius, 377-408, 재위 395-408)와 차남 호노리우스(384-423, 재위 395-423)에게 각각 로마 동부와 서부를 분할 승계함으로 결국 동서의 두 제국으로 분열하고 말았다. 로마라는 단일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통일된 영역이었던 유럽이 크고 작은 여러 나라로 분열하기 시작한 신호탄이었다.

동서 로마의 분열(https://www.worldhistory.org/image/11818/western--eastern-roman-empire-395-ce/)

  동서의 두 로마 중에서도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보다 더욱 취약한 여건에 놓여 있었다. 3세기부터 이어진 기후변화로 인해 서로마는 사회경제적 기반이 크게 흔들리면서 로마의 중심지 위치를 빼앗긴 상태였다. 게르만족 등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에도 불리했다. 로마와 게르마니아의 접경지대였던 라인강과 도나우강 일대는 서로마 방면에 있었고, 이 지역은 평야와 완만한 구릉이 발달한 지형이라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만한 천연 장애물도 발달하지 못했다. 반면 동로마는 서로마에 비해 기후변화의 타격을 덜 입어 이미 로마의 중심지로 발돋움해 있었다. 경제력과 군사력, 국력 모두 서로마보다 우위에 있었다. 동로마에 발달한 카르파티아산맥, 발칸산맥 등은 방어에 큰 이점도 가져다주었다.

   서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는 게르만족과 로마인의 혼혈이었던 섭정 스틸리코(Flavius Stilicho, 359-408)의 충성과 군사적 재능 덕분에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쿠스 1세(Alaricus I, 370-410, 재위 395-410)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내고 서로마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알라리쿠스와 전쟁을 이어가는 가운데 서로마는 계속해서 피폐해졌다. 게다가 접경지 일리리쿰 의 영유권 분쟁으로 인해 동서 로마의 갈등까지 깊어갔다. 408년 스틸리코가 실각한 뒤 처형당하자 알라리쿠스 1세는 그의 복수를 명분 삼아 로마를 침공했고, 410년에는 로마가 알라리쿠스 1세의 군대에게 약탈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5세기 초반에는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에도 게르만족이 대대적으로 침입했고,  서로마는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을 비롯한 외세의 침입을 막아낼 역량이 고갈되었고, 게르만족 용병들로 부족한 병력을 충원해야 했다. 서로마의 군부에는 게르만족 출신의 장군과 장교들이 대거 포진했고, 그 효시는 바로 게르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서로마를 지켜낸 스틸리코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이후 로마의 중심지로 변모한 동로마는 서로마보다 국력도 군사력도 강했다. 기후변화의 피해를 덜 받은 덕분에 국력도 경제력도 비교적 탄탄했고, 서로마와 달리 로마인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군대도 보유하고 있었다. 397년 알라리쿠스 1세는 그리스와 발칸반도를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동로마가 훈족, 사산조 페르시아 등 사방에서 닥쳐오는 위협에 대처하느라 그리스 방면에 충분한 병력을 배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로마는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1-450, 재위 408-450)의 지도 아래 위기에 대처하며 국력을 키워 갔다. 그의 섭정 안테미우스(Flavius Anthemius, 370-414)는 어린 황제를 잘 보좌하며 콘스탄티노플에 난공불락의 3중 성벽을 구축했다. 외적의 위협과 침공이 끊이지 않았던 5세기 초반 동로마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외부의 이민족들과 기민한 외교를 맺어가며 제국의 기틀을 다져 갔고, 그러면서도 5세기 초반에는 두 번에 걸쳐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공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동서 로마가 게르만족의 이주와 침입이라는 도전에 직면했던 5세기 초반에 접어들어 훈족은 서진을 계속하여 로마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다. 훈족의 목표는 수백 년 전 조상들이 한나라를 상대로 그랬듯이 로마를 속국처럼 부려먹으며 공물과 이권을 뜯어내는 데 있었다. 훈족은 당대 최강의 전사이기는 했지만 광대한 로마를 완전히 지배하기에는 인구가 너무 적었고, 농경지와 도시가 발달한 로마 땅의 지리적 환경은 기마민족인 훈족의 삶터였던 초원지대와는 크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5세기 초반에 훈족은 이미 로마로부터 상당한 이익과 이권을 뜯어내고 있었다. 422년 훈족의 지도자 루아(Ruga, 367-434)는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적대관계를 이용하여, 평화 유지를 조건으로 동로마로부터 거액의 상납금을 받아내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방면의 동로마 전선과는 반대 방향에 위치한 훈족의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한 외교 전략의 성공이었다. 훈족은 게르만족의 침입과 내분이 이어지던 서로마에도 세력을 뻗쳤다. 루아는 433년 서로마의 장군이자 권신 아에티우스(Flavius Aëtius, 396-454)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판노니아 세쿤다(오늘날 세르비아 및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일부)를 얻었다. 이로써 게르만족에 이어 훈족까지 서로마의 영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서기 423년의 동서로마와 훈족,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역(https://brief-history-of-the-world.fandom.com)

  서로마는 내부의 문제와 더불어 게르만족, 훈족이라는 외부의 위협에도 시달려야 했지만 어떻게든 국체를 유지해 갔다. 하지만 서로마의 운명과 중서부 유럽의 지정학적 질서는 훈족의 왕 아틸라(Attila, 406-453, 재위 434-453)의 등장으로 인해 또다시 격변을 맞이했다. 훈족을 규합하여 거대한 제국을 확립한 아틸라는 동서 로마를 완전한 속국으로 삼고자 두 로마 제국에 대한 원정을 단행했다. 훈족 전사는 당해낼 자가 없는 무적의 궁기병이었지만 그 수는 10만 명이 채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아틸라는 게르만족을 비롯한 자신이 복속시킨 민족이나 부족집단의 전사들까지 로마 원정에 동원했다.

  447년 아틸라는 동로마를 침공했다.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발칸반도를 통과하는 아틸라 제국의 군대는 말 그대로 신이 내린 재앙이나 천벌에 비길 만했다. 동로마 제국은 발칸산맥을 따라 훈족의 공격을 막기 위한 요새와 방어시설을 구축했지만, 그들은 비교적 지세가 완만한 데다 동로마의 방어 시설도 밀집되지 않았던 발칸반도의 동쪽을 향해서 신속하게 남하했다. 훈족 궁기병대는 기동력을 살려 동로마의 요새와 방어군을 잽싸게 우회했고, 동로마 군대의 기동력으로는 그들의 기동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게다가 훈족 전사들은 불필요한 전투는 철저히 회피하되 한번 싸움이 붙으면 전쟁터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불살라 버렸다. 그러다 보니 동로마 군대의 사기와 보급 문제는 크게 악화되고 말았다.

아틸라의 콘스탄티노플 원정

  아틸라는 몇 번의 야전을 통해 동로마군까지 격파한 다음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진격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지는 못했다. 안테미우스가 구축한 난공불락의 삼중 성벽을 파괴할 수단도 없었거니와 마침 그즈음 이질과 말라리아까지 창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콘스탄티노플까지 육박하며 지나간 곳을 초토화한 훈족의 공세는 동로마의 사기를 제대로 꺾었다. 전염병은 아틸라의 공세를 늦추었을 뿐 완전하게 저지하거나 패퇴시키지 못한데 그치지 않고 동로마에게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결국 동로마는 이전에 훈족에게 바친 액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액의 공물을 아틸라 제국에게 바쳐야 했고, 도나우강 하류의 니시(오늘날 세르비아 소재) 일대까지 넘겨주어야 했다.

  동로마로부터 공물을 뜯어내는 데 성공한 아틸라는 칼끝을 서쪽 방향으로 돌렸다. 451년에는 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대대적인 약탈을 벌이고 여러 도시를 초토화하였다. 약체화된 서로마, 그리고 로마의 지배력이 약화된 틈을 타 세워진 여러 게르만족 분파들의 나라는 훈족의 공세 앞에 제대로 연합하거나 결속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했다. 이들을 규합하여 훈족에 맞서 싸우도록 해 줄 이는 이탈리아반도에서 정예부대를 이끌고 올라올 아에티우스뿐이었다. 451년 6월 20일 카탈라우눔(오늘날 프랑스 북동부 상파뉴아르덴 일대)에서 서로마 군대와 아틸라 제국 군대는 대대적인 결전을 벌였다. 아틸라 제국은 훈족 궁기병대뿐만 아니라 속국의 전사들까지 동원했고, 아에티우스가 이끈 군대 역시 서로마의 정예부대와 갈리아의 여러 게르만계 왕국들의 연합군이었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궁기병대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기존의 보병 중심이 아닌 기병과 궁병 위주의 부대를 편성했다. 그런 노력의 보람이 있었는지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고, 훈족은 더 이상의 약탈이나 침략 행위를 하지 않은 채 자기네 영역으로 돌아갔다.

  동로마 제국과 갈리아에서 기대한 만큼의 이권을 얻지 못한 아틸라는 452년 이탈리아반도 침공을 감행했다. 알프스산맥의 산세가 비교적 덜 험한 이탈리아반도 북동단의 트리에스테 방면에서 진격한 아틸라의 군대는 트리에스테 인근의 도시 아퀠레이아(Aquileia)에서 서로마군의 저항을 고전 끝에 격파한 뒤 이탈리아반도 북부를 대대적으로 유린했다. 1년 전과 달리 게르만 부족들을 소집하지 못한 아에티우스는 아틸라의 이탈리이반도 침공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아틸라는 메디올라눔(오늘날 밀라노)까지 점령하였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아틸라의 군세는 이탈리아에 불어닥친 기근에 따른 말라리아의 창궐과 보급의 난항이라는 장애물을 만난 끝에 결국 교황 레오 1세(Leo I, 390-461, 재위 440-461)의 중재로 서로마와 화의를 맺었다. 서로마는 레오 1세의 외교력 덕분에 멸망의 위기를 일단은 면했고, 서로마에서 약탈품을 챙긴 아틸라도 더 이상의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군사를 물렸다.


  아틸라는 453년 새로 얻은 젊은 아내와 결혼한 첫날밤에 급서했다. 동서 로마와 게르만족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훈족의 위대한 지도자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뒤 아틸라 제국은 머지않아 해체되고 말았다. 훈족은 무적의 전사였지만 인구가 적었던 데다, 아틸라가 복속시켰던 여러 부족과 민족집단 역시 그의 사망과 더불어 제국에서 이탈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테오도시우스 2세의 뒤를 이은 마르키아누스(Marcianus, 392-457, 재위 450-457) 황제는 아틸라에 대한 공물을 끊고 아틸라 제국과 일전을 벌일 준비까지 해 두고 있던 터였다. 아틸라 제국의 해체로 동서 로마는 눈앞의 절대적인 위기에서 일단은 벗어났다.

  하지만 아틸라 사후 통제불능의 혼란에 빠진 나라는 아틸라 제국뿐만이 아니었다. 아틸라 제국과 게르만족의 위협에서 간신히 서로마를 지탱하던 아에티우스가 454년 정적의 손에 암살당한 뒤 서로마 역시 내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말았다. 서로마에서는 실력자가 선대 황제를 암살하고 제위를 찬탈한 지 수년만에 또 다른 실력자가 황제 자리를 빼앗는 극도의 정치적 불안과 혼란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들은 서로마 영토를 계속해서 잠식하며 서로마에 심한 내정 간섭을 일삼았다. 멸망을 향해 달려가던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족 출신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435-493)가 일으킨 정변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황제가 될 명분을 가진 황족조차 부족했던 서로마는 오도아케르의 정변 이후 새 황제를 옹립할 수 없어서 자연히 멸망했고, 오도아케르는 황제에 오르는 대신 동로마 제국을 섬기는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오도아케르의 제거를 원했던 동로마가 게르만족의 분파인 동고트족을 앞세워 오도아케르를 제거함에 따라, 서로마의 영토는 완전한 무주공산처럼 변해 버리고 말았다.

  서로마 제국에 멸망하고 오도아케르까지 몰락한 뒤, 서유럽에는 게르만족의 여러 분파들이 세운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세워졌다. 그들은 게르만족이라는 큰 틀의 정체성은 공유했지만 세부적인 언어와 풍습, 문화는 서로 달랐다. 그런 게르만족 분파들이 서유럽과 남유럽의 이곳저곳에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면서, 로마에 의해 통일되었던 유럽의 영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알프스산맥, 피레네산맥 등과 같은 험준한 산지와 구릉지가 발달한 유럽의 지형은 유럽이 이질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가진 지역으로의 분열을 더한층 부채질했다. 게르만족의 영향력이 강했던 중부와 북부 유럽은 게르만계 문화권으로 분화되기 시작했고, 이들은 훗날 영국,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등 게르만계 문화권과 국가, 지역으로 분화되어 갔다. 로마의 영향력이 강했던 남유럽 역시 게르만족의 영향이 더해지면서 에스파냐, 이탈리아, 프랑스 등 다양한 문화권과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진나라와 한나라에 의한 통일 이후 2천 년 이상 통일 국가를 유지해 오고 있는 중국과 달리, 서로마 멸망 이후 유럽은 계속해서 지리적으로 분열된 양상을 이어오고 있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훈족의 서진이 불러온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었다.

기원전 480년 유럽의 지정학적 상황.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남서 유럽에 게르만족의 여러 분파들이 세운 나라는 유럽 각국의 영역적 기초로 이어졌다.(DevianArt)

  기원전 3-5세기의 기후변화는 로마라는 위대한 제국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중심지까지 이동시켰다. 로마의 뿌리 이탈리아반도를 포함한 서부 지역은 기후변화로 황폐화된 채 게르만족의 침입에 시달리며 쇠퇴해 갔다. 반면 기후변화의 피해를 덜 받았던 동부는 로마의 새로운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며 동로마 제국이라는 로마의 계승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로마가 아직 이탈리아반도의 공화국이었던 시절 일어난 기후변화로 인해 고향에서 쫓겨난 훈족은 중앙아시아와 서로마의 기후변화라는 또 다른 요인에 의해 로마까지 진격했다. 그리고 기후변화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게르만족에게 영토를 잠식당해 가던 서로마는 훈족의 침입에 치명타를 입은 뒤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멸망한 서로마의 영역에는 수많은 게르만계 국가들이 난립하면서 수많은 나라와 영역으로 분열된 오늘날 유럽 지도의 밑그림을 그렸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 균, 쇠》에서 평야가 발달하고 황허와 양쯔강을 운하로 이을 수 있었던 중국의 지형, 그리고 험준한 산맥과 구릉이 발달했고 하계망이 복잡한 유럽의 지형 차이가 통일된 중국과 분열된 유럽의 차이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유럽과 중국의 상이한 지정학적 판도에는 유럽의 지형적 특성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판도를 바꾸었던 기후변화라는 요인 또한 깃들어 있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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