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에 대한 다중스케일적 접근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1035-1099, 재위 1088-1099)는 프랑스 중부의 클레르몽에서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이교도의 손에 떨어진 성지를 되찾고 고통받는 그리스도교 형제들을 구원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전 유럽에서 대대적인 호응을 얻었고, 유럽 각지의 군주와 영주, 기사들은 성지 탈환을 위해 머나먼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떠났다. 1291년까지 200년 가까이 이어진 십자군 전쟁의 서막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성지, 즉 성스러운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에서 시작했듯이 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지를 둘러싼 그리스도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대립은 물론, 그리스도교와 봉건제가 지배하던 유럽 세계의 복잡 다양했던 지정학, 유럽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던 동로마의 위기,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분열과도 같은 다양한 지리적 스케일의 요인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십자군 전쟁의 과정과 결과 역시 단순히 '그리스도교 대 이슬람교'라는 이분법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하기에는 부족할 만큼 다양한 스케일의 지정학적 관계가 엮이고 교차되면서 유럽과 이슬람 문화권의 지정학적 판도를 새롭게 짰다.
요컨대 십자군 전쟁은 성지를 수호하려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 열정 아래 다양한 지정학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인류사와 세계지도를 바꾼 전쟁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십자군 전쟁은 다중스케일적 접근을 통해서 해석될 필요가 있다.
<글상자 안에 들어갈 내용. 제목: 지리적 스케일과 다중스케일적 접근>
스케일(scale)이란 무엇일까? 대개 범위나 규모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며, 저울이나 척도를 뜻하는 영단어이기도 하다. 지도의 축척을 뜻하는 영단어 또한 scale이다. 그리고 인문지리학에서 스케일이라는 개념은 지표 공간을 인식하는 틀이나 단위로 쓰이기도 한다. 지역, 국가, 문화권, 대륙 등이 바로 인문지리학적 스케일의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스케일에 따라 땅의 의미, 그리고 땅 위에서 나타나는 사회문화 현상의 의미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한국과 일본은 국가 스케일에서 보면 명백히 다른 나라이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스케일에서는 동질적인 지역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 지리학계에서는 지표 공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국가 등 한 가지 스케일에만 고착하여 보는 대신 다양한 스케일의 상호 관련성에 착안하여 접근하는 다중스케일적 접근(multiscalar approach)이 주목받고 있다. 한 가지 스케일만 고집하면 자칫 다양한 스케일과 관련된 요인이나 문제를 간과할 소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통일연구원의 황진태 박사와 서울대학교 지리교육과의 박배균 교수에 따르면 본래 지방 산업단지 정도로 기획되었던 구미공단이 1970년대 이후 첨단산업으로의 산업구조 전환을 꾀했던 한국의 중앙정부 스케일 행위자, 박정희와의 지연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의 극적인 발전을 꾀했던 구미의 지역 주민과 유지 등과 같은 지역사회 스케일 행위자,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1960-70년대 한국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재일교포 사업가라는 국제 스케일 행위자 등이 지역, 국가, 해외 등의 다양한 지리적 스케일을 오가며 상호작용한 끝에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전자제품 생산과 수출을 전담해 온 국가산업단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황진태ㆍ박배균, 2014, 7-20). 그리고 아일랜드의 지리학자 샘 바렛(Sam Barrett, 2013, 220-229)은 전 지구적인 문제인 기후위기는 탄소배출량 등이 적은 개도국일수록 취약한 데다 국가 내부에서도 지역별로 그 영향이나 피해 등이 상이하기 때문에, 환경정의 관련 사안은 다중스케일적으로 접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은 동로마 제국과 달리 크고 작은 게르만 왕국들이 난립하는 분열상을 이어갔다.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연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742-814, 재위 768-814)는 서유럽을 사실상 통일한 뒤 800년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후계자로 인정받는 위업을 쌓았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의 경제나 재정 수준 역시 동로마나 아바스 왕조 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중세 초기 서유럽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세우며 정예 용병 집단과 강대한 함대를 거느렸던 동로마, 그리고 실크로드를 장악하며 부를 축적하고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 등으로 구성된 정예 기병 집단인 맘루크 군단을 확보했던 이슬람 세계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프랑크 왕국은 이러한 문제의 대안으로 봉건제를 채택했다. 군주와 봉신의 쌍무계약 관계에 입각한 봉건제는 군주의 봉신에 대한 토지 소유권 인정과 보호, 그리고 세습 토지 귀족인 봉신의 군주에 대한 세금 납부와 병역 제공을 골자로 한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동로마나 아바스 왕조 등과 달리 왕권이 제한되기 쉽지만, 용병을 고용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강력한 중장기병(기사) 전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왕권은 약했지만 국가 권력 역시 여러 토지 귀족들에게 분산됨으로써 반란의 위험도 줄어들면서 사회 체제는 역설적이게도 안정되었다. 11세기에 접어들어 봉건제가 서유럽 전역에 정착되고 농업 생산성이 발달하면서 서유럽의 인구와 경제력은 크게 발전했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 같은 변화를 '봉건 혁명(Feudal Revolution)'이라고도 부른다.
봉건 혁명으로 서유럽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달하며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영지를 둘러싼 영주와 기사들의 대립이 심해졌다. 토지 생산성의 증가 속도가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명문 귀족의 자제 중에는 계승 서열이 낮거나 권력다툼에서 패하여 제대로 된 영지와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일례로 11세기 후반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장악한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 1015-1085)의 장남인 보에몽 드 타랑트(Bohémond de Tarente, 1058-1111)은 대영주의 장남인 데다 기사로서의 역량과 군사적 업적 모두 탁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속 관련 문제로 인해 아버지의 영지를 대부분 이복동생에게 빼앗기고 허송세월을 보냈다. 영지 상속 경쟁에서 밀려난 귀족들은 용병이 되거나 심지어 떼강도로 전락하기까지 하였다. 장자상속제의 도입은 이 같은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한편 중세 유럽인들의 그리스도교 신앙심은 현대인이 상상하는 수준보다도 훨씬 강했다. 중세 유럽인들은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죄를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여겼다. 하지만 9-10세기에 걸쳐 프랑크 왕국이 분열한 뒤 몰락하면서 가톨릭 교회는 세속에서의 권력 기반을 크게 상실했다.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 직할령인 교황령을 소유했지만 봉건 영주나 세속 군주를 완전히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독실한 신앙심과는 별개로 봉건 영주들은 교황이 아닌 자신의 이해관계에 충실했다. 프랑크의 뒤를 이어 교황을 보호해야 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조차 권력 강화를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하는가 하면 교황과 권력 투쟁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봉건 혁명으로 세력을 키운 봉건영주와 군주들이 유럽의 땅을 지배함에 따라 토지라는 권력 기반을 갖지 못했던 가톨릭 교회는 힘을 잃었고, 성직 매매가 횡행하는 등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일어났다.
11세기에 접어들어 가톨릭 교회의 위기를 인식한 교황들은 교회 개혁에 나섰다. 그 정점은 그레고리오 7세(1020-1085, 재위 1073-1085)였다. 그는 성직 매매 엄단, 성직자의 독신 의무 도입, 군주나 영주 등 평신도의 성직자 서임권 금지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1077년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IV, 1050-1106, 재위 1056-1105)와 이에 반발하는 제후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켜 그를 굴복시키기까지 하였다(카노사의 굴욕). 하지만 교회 개혁은 만만찮은 반발을 불러왔다. 11세기에 이루어진 교황 중심의 교회 개혁에 반발하는 자들은 수많은 이단 종파를 세웠다. 적지 않은 봉건 귀족과 영주들까지 이단의 교리에 빠져들었고 이는 교황은 물론 세속 군주의 권위까지 침범했다. 게다가 하인리히 4세는 1084년 로마에 침공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키기까지 하였다. 11세기 말에 접어들어 교황은 내부적인 부패와 세속 군주와의 대립, 그리고 이단 종파의 등장이라는 위기 속에서 교회를 되살릴 묘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 한편으로 교황은 평신도인 국왕과 영주, 귀족들을 파문할 권력을 가졌고, 비록 다른 종파로 갈라져 나오기는 했지만 같은 그리스도교 세력인 동로마와의 연결고리 또한 갖고 있었다.
고대 로마의 직계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동로마 제국은 중세 유럽의 강자였다. 서유럽과 달리 중앙집권제를 유지했던 동로마는 지중해와 흑해, 아나톨리아반도를 잇는 교역로에서 나오는 부를 바탕으로 막대한 국부를 축적했다. 동로마의 강력한 중장기병대와 노르만, 잉글랜드 등지에서 고용한 싸움에 능한 용병부대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강병이었다. 동로마의 해군은 유럽 세계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하였다. 동로마의 과학기술 수준과 문화적 소양 역시 서유럽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동로마는 이처럼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정학적 입지조건으로 인해 외침에 시달려야 했다. 남동쪽에서는 이슬람 세력과의 지난한 전쟁을 이어가야 했고, 캅카스와 흑해 방면에서 침략을 일삼는 유목민 집단도 동로마의 골칫거리였다. 게다가 지중해의 게르만족 분파와도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다.
동로마는 8세기에 접어들어 흑사병의 대유행, 이슬람 세력의 발흥 등으로 인해 북아프리카와 레반트의 광대한 영토를 상실했지만, 9-10세기 이후 내정과 군사 부문의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중흥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11세기 중후반에 접어들면서 동로마는 또다시 위기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도나우강 하류에서 카스피해 연안을 근거지로 삼았던 튀르크계 유목민족인 페체네그족은 1040년대 이후 도나우강을 넘어 발칸반도 일대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1057-1076년에는 노르만 용병 출신인 로베르 기스카르가 동로마와 이슬람 세력, 롬바르디아 왕국, 교황청 등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틈을 타서 본래 동로마의 영역이었던 이탈리아반도 남단과 시칠리아를 정복한 뒤 동로마 제위까지 노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위협은 1037년 등장한 튀르크계 이슬람 왕조인 셀주크 제국이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오늘날 터키 무슈주 말라즈기르트 일대)에서 셀주크 제국군이 동로마군을 대파하고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4세(1032-1072, 재위 1068-1071)를 사로잡음(제2차 만지케르트 전투)으로써 동로마는 아나톨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1081년 즉위한 전쟁 영웅 출신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Alexios I Komnenos, 1056?1057?-1118, 재위 1081-1118)는 화폐 개혁과 친인척의 요직 기용 등을 통해 재정난을 해소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페체네그족, 시칠리아의 노르만 세력 등의 침공을 격퇴하거나 저지하며 몰락해 가는 제국을 중흥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영토도 국력도 이전에 비해 크게 줄어든 동로마의 힘만으로는 사방으로부터 몰려드는 외적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한계가 분명했다. 무엇보다 아나톨리아반도를 비롯한 이슬람 세계의 동부를 대부분 장악한 신흥 강국 셀주크 제국의 위협은 동로마 혼자서 막아내기에는 버겁기 그지없었다. 셀주크 제국을 몰아내고 아나톨리아반도를 수복하는 일은 동로마의 지상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기 위해서 동로마는 외부의 강력한 동맹자를 구해야만 했다. 알렉시오스 1세가 찾은 동맹자는 바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동지인 교황이었다.
다양한 민족집단은 물론 이교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며 이슬람 문화의 화려한 꽃을 피웠던 열었던 아바스 왕조는 10세기에 접어들면서 내분에 휩싸이며 분열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각지에 파견한 총독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칼리파에게 반기를 드는 일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맘루크와 튀르크계 용병들은 지방 총독이나 반란 세력의 군사력으로 변질되었고, 때로는 이들이 칼리파에게 반기를 들거나 세력을 일으켜 할거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영토가 분열되면서 권력 기반을 잠식당한 아바스 왕조는 반기를 든 지방 세력을 제어할 힘을 잃었고, 심지어 칼리파가 반란자의 손에 목이 베이거나 맞아죽는 일까지 생겨났다.
이 틈을 타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은 909년 이집트, 레반트, 북아프리카 일대를 다스리는 파티마 왕조를 세우고 독자적인 칼리파를 옹립했다. 옛 우마이야 왕조의 잔존 세력 역시 929년 이베리아반도에서 칼리파를 옹립하며 후 우마이야 왕조를 열었다. 게다가 페르시아 출신의 장군 알리 이븐 부야(Ali ibn Buya, 891?92?-949, 재위 932-949)는 932년 페르시아 남부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여 부와이 왕조를 개창한 뒤, 페르시아를 통일하고는 945년 바그다들로 진격하여 섭정을 구실로 아바스 왕조의 중심부를 사실상 통치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는 종교적 권위만 남은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이슬람 세계의 분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로부터 이주해 온 튀르크계 셀주크인이 1037년 건국한 셀주크 제국은 이슬람 세계의 지정학적 질서를 다시 한번 뒤흔들어 놓았다. 셀주크 제국의 건국자 토그릴 베그(Toghrïl Beg, 995-1063, 재위 1032-1063)는 1055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부와이 왕조를 멸망시킨 뒤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술탄 칭호를 받아 투으룰 1세로 즉위하며 수니파 이슬람교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광대한 영토와 더불어 아바스 왕조까지 손에 넣은 셀주크 제국은 동로마로부터 아나톨리아반도의 대부분을 빼앗는데 이어 인접한 파티마 왕조를 공격하여 1070년에는 레반트 일대까지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셀주크 제국은 이슬람 세계의 강자로 대두하기는 했어도 통일 왕조로 발돋움하지는 못했다. 파티마 왕조는 레반트 일대를 되찾기 위해 반격을 감행했고, 셀주크 제국의 왕족인 술레이만 이븐 쿠탈므쉬(Suleiman ibn Qutalmish, ?-1086)는 1075년 동로마로부터 아나톨리아반도 북서부의 도시 니케아(오늘날 터키 이즈니크)를 빼앗은 뒤 1077년 독립하여 룸 술탄국을 세웠다.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슬람 세계는 튀르크족의 대두와 더불어 오랫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아오던 아나톨리아반도를 대부분 정복하는 등 겉으로는 세력을 확장하는 듯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분열되어 있었다. 이슬람 세력 스케일의 지정학적 상황은 거대한 외부 세력의 침공에 대처하기에는 불리한 방향으로 조성되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지 스케일에 대한 고찰도 이루어져야 한다. 성지, 즉 예루살렘 일대는 정통 칼리파 시대였던 7세기 초반에 이미 이슬람 문화권의 지배하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등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성지 순례를 허용했고,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교도 순례자들을 위한 예배당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슬람 세력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교도 순례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짭짤한 수익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셀주크 제국이 대두하면서 그리스도교도들의 예루살렘 순례길은 막히고 말았다. 셀주크 제국은 군사력이나 이슬람교 신앙심은 강했을지 몰라도, 아랍과 유럽 세계의 문화와 지정학적 질서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피정복민이나 이교도에 대한 관용을 베풀 줄도 몰랐고, 1071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에는 그리스도교도의 예루살렘 순례를 금지했다. 순식간에 성지순례라는 종교적 사명을 다할 길을 차단당한 그리스도교인들은 극도의 분노와 혼란에 사로잡혔다. 이는 셀주크 제국의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반도에서 종파는 달랐지만 같은 그리스도교인들을 대상을 저질렀던 무자비한 학살, 약탈, 강간 등에 대한 소문과 겹쳐지면서 그리스도교 세계의 셀주크 제국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이교도 야만인’의 손에서 성지를 되찾아야 한다는 열망이 고조되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이라는 지리적 스케일에서 일어난 변화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스케일에서 십자군 전쟁의 원동력이 들불처럼 퍼져가게 만들었다.
게다가 셀주크 제국 역시 예루살렘을 비롯한 레반트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지도 못했다. 파티마 왕조는 여전히 건재했고, 이들은 레반트 일대를 수복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갔고, 셀주크 제국 치하의 예루살렘에서는 지방 총독들의 내분이 일어났다. 1098년에는 파티마 왕조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까지 하였다. 서방에서 성지 탈환을 위한 성전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던 11세기 말에 이르러, 동방의 성지에서는 서방의 군사적 침공을 막을 준비를 하기는커녕 이슬람교도들 간의 분쟁만 되풀이되고 있었다.
1095년 우르바누스 2세가 성지 탈환을 위한 성전을 호소하자, 은자 피에르(Pierre l’Ermite, 1050?-1115?)라는 프랑스 출신의 수도자가 사람들을 모아 선구적인 십자군을 결성했다. 그런데 빈민과 몰락 귀족, 평민 위주로 이루어졌기에 ‘민중 십자군’이라 불리는 이들은 종교적 열망만 강했을 뿐 군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규율과 기강이 문란했다. 이들은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다 이를 보다 못한 헝가리 기사들에게 토벌당해 흩어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민중 십자군은 제대로 된 십자군 전쟁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은 1097년에 비로소 일어났다. 유럽 전역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영주와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채 동방으로 향했다. 그중에는 영지와 재산을 상속받지 못한 가난한 기사들도 있지만, 많은 영지와 강력한 권력을 가진 명문 대귀족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군대와 달리 개별적으로 목적지에 집결한 뒤 전장으로 향했던 중세 십자군 기사들은 1097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을 완료했다. 도나우강에서 판노니아 일대를 거쳐 집결한 기사들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기사들은 이탈리아반도에서 해로를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 병력을 아나톨리아반도 탈환의 선봉대로 써먹기 위해 이들에게 융숭한 대접과 더불어 충분한 보급을 제공했다. 작전의 주도권과 서열을 둘러싼 알렉시오스 1세와 십자군 기사들의 알력이 있기는 했지만, 알렉시오스 1세는 막대한 선물 공세를 퍼부으며 기사들로부터 일단 충성 맹세를 받는 데 성공했다.
1097년 5월, 십자군은 동로마의 함대 및 타티키오스(Tatikios, 1048-12세기 초반)가 지휘하는 지원군 2천 명과 더불어 룸 술탄국의 수도 니케아에 도착했다. 민중 십자군의 추태를 알고 있던 룸 술탄국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1세(Kılıç Arslan I, 1079-1107, 재위 1095-1107)는 제1차 십자군을 과소평가하여 니케아를 떠나 아나톨리아반도 동부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러 가 있었다. 십자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니케아를 포위하여 같은 해 6월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지도자급 기사들로는 보에몽 드 타랑트, 신성 로마 제국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Godefroy de Bouillon, 1060-1100), 프랑스의 베르됭 백작 보두앵 드 불로뉴(Baudouin de Boulogne, 1065-1118), 툴루즈 백작 레몽(Raymond IV de Toulouse, 1052-1105)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보에몽을 제와한 이들은 영주였지만, 그들 역시 상속이나 권력 기반 등에 문제가 있었다.
니케아의 함락은 알렉시오스 1세에게는 아나톨리아반도를 탈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십자군 기사들에게는 성지를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십자군은 그들을 아나톨리아반도 탈환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는 알렉시오스 1세의 지원을 받으며 아나톨리아반도 남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 보에몽에게 특히 많은 지원을 해 주었다. 십자군은 그 와중에 이루어진 룸 셀주크군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지만 모두 격퇴했다. 1097년 10월에 이르러 4만 명의 십자군은 아나톨리아반도 남동쪽 끝에 위치한 무역항이자 그리스도교 총대주교 교좌가 입지했던 도시 안티오키아(오늘날 터키 안타키아)를 포위했다.
그런데 안티오키아 공략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대도시 안티오키아는 그 자체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콘스탄티노플로부터의 거리가 멀어진 탓에 보급 문제도 불거졌다. 게다가 겨울이라 주변을 약탈하여 물자를 충당하기도 어려웠다. 레몽은 속전속결로 안티오키아를 공략하려 했으나, 안티오키아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보에몽이 그를 제지했다. 십자군의 다른 고위 기사들도 병력의 피로 누적, 안티오키아성 공략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보에몽의 의견을 따랐다. 안티오키아 공략은 장기 공성전으로 이루어졌다.
안티오키아를 포위한 십자군은 동로마로부터의 보급이 차질을 빚은 데다 현지 약탈의 어려움, 안티오키아 방어군의 기습 등에 따른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했다. 먹을 것이 부족해진 십자군은 가축의 분뇨에 섞여 나온 곡식의 낱알을 주워 먹기까지 한 적도 있었고, 타타키오스는 보급품 조달을 이유로 1098년 1월 전장을 이탈하기까지 했다. 타타키오스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1098년 1월-3월에 걸쳐 동로마로부터 막대한 양의 식량과 무기, 장비가 안티오키아의 십자군에 전달되면서, 십자군의 사기와 동로마에 대한 충성심은 다시 한번 고조되었다.
이 무렵 보에몽은 타타키오스가 부재한 상황을 이용하여 동로마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시도를 하였다. 그는 알렉시오스 1세가 진두지휘는커녕 전투병력도 충분히 보내 주지 않고 있으니 십자군이 그를 위해 충성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안티오키아 함락을 주도한 기사가 안티오키아를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십자군 기사들을 선동했다. 그런 한편으로 안티오키아 인근의 이슬람 토호들이 십자군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이용하여 십자군 내부에 위기감을 조성하는 한편으로, 안티오키아 내부의 수비대 장교를 회유하기까지 하였다. 이로써 보에몽은 기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1098년 6월 야습을 감행하여 성내에 잠입한 뒤 성문을 열어 기사들을 진입시키는 방식으로 안티오키아를 함락시켰다. 무려 8개월 만에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지사를 참수하고 성내에서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그리고 이어진 모술의 지사 카르부가(Qiwam al-Dawla Kerbogha, ?-1102)의 포위 또한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카르부가는 유능한 군인이었고 십자군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지휘했지만 그의 부하들은 십자군과 달리 여러 토호들의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게다가 피에르 바르텔레미(Pierre Barthélemy, ?-1099)라는 기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성창(聖槍)을 찾아냄(후일 거짓으로 판명)으로써 십자군은 사기충천했다. 카르부가는 1098년 7월 십자군의 역습을 받아 참패했고 목숨만 겨우 부지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1세(재위 1098-1111)로 즉위하여 안티오키아 공국(1098-1268)을 세웠다.
하지만 안티오키아를 점령한 십자군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알렉시오스 1세가 성지 탈환을 지원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리라는 소문을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반도를 상당 부분 수복한 알렉시오스 1세는 더 이상 십자군을 도울 마음이 없었고, 군사적 지원을 해 달라는 십자군 사절단의 요청도 거부한 상태였다. 십자군 지도부는 어쩔 수 없이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교황의 지원 병력 역시 오지 않았다. 1098년 11월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안티오키아로부터 남하하기 시작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 공국에 잔류했고, 고드프루아와 레몽이 십자군 병력을 지휘했다.
한편 보두앵 드 볼로뉴는 병력 500명을 데리고 십자군 본대에서 이탈하여 에데사(오늘날 터키 남동부 우르파)로 향한 뒤 그곳의 토호인 토로스(Thoros of Edesa, ?-1098)를 포섭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본래 친 동로마 인사였던 토로스는 셀주크 제국에게 충성을 바친 대가로 에데사의 지배권을 얻었다. 그런데 무능한 데다 동로마의 정교회 신앙을 강요하던 토로스는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신봉하던 민중이 일으킨 반란으로 1198년 살해당했다. 토로스와 달리 보두앵은 온유하고 유능한 데다 민중에게도 우호적이었다. 보두앵은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에데사 백국(1198-1150)을 세운 뒤 보두앵 1세(에데사 백작 재위 1198-1110)로 즉위했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진군에는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난이 뒤따랐다. 겨울철인 데다 기근까지 닥쳤고, 보급로가 길어져 동로마로부터의 물자 보급마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함에 따라 십자군은 전사한 적군의 인육을 먹을 정도로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다. 1099년 1월에 시작된 십자군의 아르카(오늘날 레바논 트리불로스 북쪽) 공성전은 무려 3개월이나 끌었다. 이 와중에 알렉시오스 1세는 사절을 보내어 십자군의 충성 맹세를 빌미로 안티오키아 등 점령지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본인이 인솔하는 병력이 합류할 때까지 전선을 유지한 채 기다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십자군 내부에서도 의견 충돌이 발생했지만, 1099년 5월 십자군은 아르카를 포기하고 신속히 예루살렘으로 남하하여 동로마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점령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1099년 6월 예루살렘에 도착한 십자군의 총병력은 2만 명을 훨씬 밑돌 정도로 줄어 있었다. 게다가 얼마 되지 않는 식수원에 예루살렘 수비 병력이 독을 푸는 바람에 식수 부족에까지 시달렸다. 마침 1098년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되찾은 파티마 왕조는 이집트로부터 예루살렘에 증원군을 보낼 계획까지 세웠다. 전령과 전서구(傳書鳩)를 포획하여 파티마 왕조의 계획을 간파한 십자군은 예루살렘 공략을 서둘렀다. 1099년 7월 9일 십자군은 서유럽이 자랑하던 공성병기를 앞세워 예루살렘 남쪽과 북쪽 성벽을 동시에 공격했다. 예루살렘 수비대는 남쪽 성벽을 잘 방어했지만 그 와중에 십자군은 북쪽 성벽을 돌파한 뒤 예루살렘 성내로 난입했다. 예루살렘을 지배한 파티마 왕조가 시아 파를 신봉했기 때문에 주변의 수니 파 이슬람 토호들은 예루살렘을 돕기는커녕 십자군을 응원하고 지원할 정도였다. 결국 예루살렘 수비대는 무력화되었고, 7월 15일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파티마 왕조의 지원군은 8월에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아슈켈론에서 십자군에게 요격당해 패퇴하고 말았다. 제1차 십자군은 성지 탈환에 성공했다.
대다수의 십자군은 탈환한 성지에서 신을 찾기에 앞서 전리품을 얻고 분풀이를 하기에 바빴다. 십자군은 이틀에 걸쳐 성민들의 재산과 목숨을 가차 없이 빼앗았다. 수만 명의 무슬림과 유대인이 애꿎게 희생된 뒤에야 십자군 지도부는 그들의 시신을 매장하고 치안 유지를 위해 더 이상의 학살과 약탈을 금지했다.
동로마와 교황의 직접적인 병력 지원 없이 악전고투 끝에 성지를 수복한 십자군 기사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땅에 십자군의 나라를 세웠다. 예루살렘 탈환의 영웅이었던 고드프루아는 '성묘 수호자'라는 이름의 예루살렘 통치자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예루살렘 왕국(1099-1291)이 탄생하였다. 이어서 1102년에는 레몽이 보에몽 등을 견제하려는 동로마의 지원을 받아 트리폴리(오늘날 레바논 트리불로스) 일대에 트리폴리 백국(1102-1289)을 세웠다.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세워진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을 포함하여 총 4개의 십자군 국가가 제1차 십자군 전쟁의 결과로 세워졌다. 서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은 지중해를 통하여 성지 순례를 하는 한편으로 수백 년 동안 끊어졌던 레반트-시리아 일대와의 교역을 재개했다. 성지 순례자와 무역품을 운송하는 일은 이탈리아반도 북부에 위치한 무역항 도시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몫이 되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으로 세워진 십자군 국가의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인접한 무슬림 토후와 군주들은 계속해서 십자군 국가들을 공격했고, 예루살렘을 헌납하라는 교황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던 고드프루아는 1100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교황의 대리인이었던 다고베르토 다 피사(Dagoberto da Pisa, 1050-1105) 대주교의 호소에 따라 십자군 국가를 지원하기 위해 1101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한 기사들은 알렉시오스 1세의 조언을 듣지 않고 공명심을 앞세워 룸 술탄국의 영토에 정면으로 침입했다가 클르츠 아르슬란 1세의 반격을 받아 궤멸당했다. 게다가 보에몽 1세는 1103년 다니슈멘드 토후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된 뒤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간신히 풀려났으며, 이후 동로마 공격에도 실패한 끝에 섭정에게 국정을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예루살렘 등지에서 이루어진 학살과는 별개로, 짧게는 50여 년에서 길게는 200년 이상 지속된 십자군 국가들의 지도층은 현지의 무슬림과 유대인을 포용하려고 노력했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주변의 무슬림 토호들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십자군 국가들은 본토인 서유럽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고, 지배층인 십자군 기사들의 숫자는 십자군 국가를 동방에 존재하는 가톨릭의 땅으로 변모시키거나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유대교의 융합이 이루어진 새로운 문화권으로 탈바꿈시키기에는 턱없이 적었다. 셀주크 제국은 12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내분 끝에 수많은 토후국들로 분열했지만, 그들은 이교도가 세운 십자군 국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1150년 에데사 백국은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토후국 장기 왕조(1127-1250)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멸망했다.
서유럽의 가톨릭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십자군 국가의 구원을 위해 제2차 십자군 전쟁(1145-1149)을 개시했다. 이때부터 십자군 전쟁은 성지 수호를 통해 이권을 얻으려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시칠리아 등지의 군주들이 참여하는 국제전 스케일로 비화되었다. 군주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속국을 확보하여 유럽 세계에서의 영향력을 키우는 한편으로, 성전을 명목으로 이교도 귀족들을 제거하고 봉신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제2차 십자군은 십자군 국가의 건설로 인해 십자군에 대한 신뢰를 잃은 동로마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데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탓에 제대로 공조하지도 못했다. 더욱이 제1차 십자군 전쟁 때와 달리 이슬람 세력은 분열하지 않았다. 장기 왕조의 지도자 누르 앗 딘(Nur ad-Din, 1118-1174, 재위 1146-1174)은 시리아와 이라크 남부 일대에 이르는 지역을 통합한 뒤 몰락한 셀주크 제국을 대신하여 십자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었다. 아랍의 지정학적 상황에 무지했던 제2차 십자군은 1148년 7월 십자군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다마스쿠스를 공략했다가 누르 앗 딘의 반격을 받아 실패하고 이듬해 퇴각했다. 다마스쿠스는 1155년 장기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1171년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슬람 세계를 통합한 아이유브 왕조(1174-1250)의 초대 술탄 살라흐 앗 딘(살라딘, 1137-1193, 재위 1174-1193)은 1187년 예루살렘 왕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기까지 했다.
잃어버린 성지를 되찾기 위한 제3차 십자군 전쟁(1189-1192)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 재위 1152-1190),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 재위 1189-1199) 등이 참전한 대규모 원정이었다. 하지만 전 유럽에 무용을 떨쳤던 프리드리히 1세는 노령의 몸으로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던 도중 강을 건너다 익사했고, 신성 로마 제국 병력은 십자군 원정에서 이탈했다. 리처드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초인적인 무용을 떨치며 숱한 전공을 쌓아 갔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 이탈한 마당에 혼자만의 무용으로 아이유브 왕조를 격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의 싸움에서 고전을 이어간 끝에 그리스도교도의 예루살렘 순레를 허용한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1192년 후퇴해야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 동로마는 계속해서 쇠퇴해 갔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이슬람교 세력이 아닌, 지중해와 발칸반도에 있었다. 로베르 기스카르를 따라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한 노르만족이 1130년에 건국한 시칠리아 왕국은 동로마의 영토를 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동로마를 침략했다.
이어진 십자군 전쟁 역시 성지 탈환이라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며 실패하거나 변질되어 갔다. 아이유브 왕조의 중심지인 이집트의 정복을 목표로 했던 제4차 십자군 전쟁(1202-1204)에서 십자군은 해군력을 지원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꾐에 넘어가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했다. 연이은 외침과 내분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동로마는 제4차 십자군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십자군에게 함락됨으로써 동로마는 일시 멸망했고, 그 영토는 십자군이 세운 라틴 제국(1204-1261)과 동로마의 잔존 세력인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친왕국, 트레페준타 제국으로 분열하였다. 니케아 제국의 미하일 8세(Michael VIII Palaiologos)가 1261년 라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재건한 동로마는 발칸반도 남부를 지배하는 중소국가일 뿐이었다.
이후에 서유럽 각국이 벌인 제5-9차 십자군 전쟁은 졸전을 거듭하며 실패를 이어 갔다.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한 유럽의 군주들은 제대로 공조하지 못한 채 예루살렘, 시리아, 이집트 등지를 점령한다는 목적 달성에 끝내 실패했다. 1258년 아바스 왕조가 몽골 제국의 침공에 의해 멸망했지만 이는 십자군의 기회가 되지 못했다. 아이유브 왕조를 이어받은 맘루크 왕조는 십자군은 물론 1260년 이루어진 몽골의 침공마저 격퇴하고 이집트와 아라비아를 통일했다. 강력한 맘루크 왕조의 대두는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이합집산하던 십자군과 십자군 국가들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안티오키아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은 몽골계 일 칸국과 동맹까지 맺으며 나라를 유지하려 했지만 1268년과 1289년에 각각 멸망했고, 십자군 국가들의 지원을 위해 일어난 제9차 십자군 전쟁(1271-72)이 키프로스에서 맘루크 왕조의 공격을 받아 저지됨에 따라 마지막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미 오래전에 예루살렘을 잃은 채 아크레(이스라엘 서북부 위치)에서 항전하던 예루살렘 왕국이 1291년 맘루크 왕조의 침공으로 멸망하면서,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패배로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여러 지리적 스케일과 관련된 다양한 요인들이 성지 탈환의 이름으로 불거진 십자군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 스케일의 지정학적 분열을 기회로 성지를 일시 탈환하고 이슬람의 땅에 십자군 국가까지 세웠지만, 이들은 레반트와 시리아 일대를 끝내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재편입시키거나 새로운 문화권으로 변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2세기에 걸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문화권의 지리적 스케일을 또 다른 양상으로 재편하였다.
서유럽 스케일에서는 수많은 봉건 귀족과 기사들은 십자군 원정에서 전사하거나, 원정에 소요된 막대한 경비를 감당하지 못한 채 몰락했다. 봉건 혁명으로 이루어진 봉건 영주들의 전성기는 십자군 전쟁을 기점으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을 직접적으로 촉발시킨 주체인 교황 역시 전쟁의 패배로 인해 권위를 크게 실추했다. 반면 도시는 크게 발달했다.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도시는 십자군 전쟁에 소요된 병력과 물자의 운송과 군자금 마련을 위한 금융업 등을 담당했다. 아울러 십자군 국가 수립 후에 이루어진 서유럽과의 교역 또한 이들의 몫이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지중해 동부의 제해권은 동로마에서 베네치아, 제노바 등지로 넘어왔고, 이들은 중세 시대에 쇠퇴한 지중해 무역을 부활시켰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교황권과 봉건 귀족들의 힘이 쇠퇴한 반면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하면서 왕권 또한 강화되었다. 그 효시는 프랑스의 필리프 4세(Philippe IV, 1268-1314)였다. 그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권이 추락한 틈을 타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으로 강제 이전(아비뇽 유수, 1309-1377)하고 십자군 전쟁을 주도했던 성전기사단을 해체하여 그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수단을 통해 프랑스가 중앙집권 국가로 거듭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외 서유럽의 다른 나라 군주들도 도시, 상공업자 등과 손을 잡고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 체제 확립을 위한 시도에 차근차근 나서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부활한 지중해 무역은 동방의 자원과 귀중품뿐만 아니라 아바스 왕조에서 번영한 자연과학과 인문학까지도 서유럽에 가져왔다. 아라비아 숫자도 이때 유럽 세계에 소개되어 서구의 수학 발전을 촉진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연금술, 점성술 등은 서구의 화학, 천문학 등 자연과학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이슬람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고대 그리스 철학 연구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발달에도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한편으로 십자군 원정은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는 끝내 실패했지만, 성지 회복이라는 십자군의 모토는 다른 방향에서 서유럽이 온전한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재편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일례로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잉글랜드의 병력이 악천후로 인해 포르투갈에 상륙한 뒤 포르투갈 왕국과 협조하여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리스본을 함락(1147)시켰고, 이는 이베리아반도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일으킨 영토 회복 운동인 레콩키스타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아울러 독일계 기사단들이 덴마크, 스웨덴과 공조하여 일으킨 북방십자군(1198-)은 핀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해 연안의 북유럽 지역을 온전한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유럽 각지에 산재하던 이외의 여러 비그리스도교 지역들 또한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 편입되었다.
동로마 스케일에서 십자군 전쟁은 재양에 비유할 만했다. 십자군의 힘을 빌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했던 동로마는 십자군 전쟁 때문에 결과적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쇠퇴했다. 아나톨리아반도의 수복은 끝내 실패했고, 유럽 세계의 최강국이었던 동로마는 십자군 전쟁이 끝난 뒤에는 망국의 상처를 이기지 못한 채 중소국가로 전락했다. 천 년 이상 로마 문화권에 속했고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도 중요성이 컸던 땅인 아나톨리아반도는 십자군 전쟁이 이후 이슬람 문화권의 땅으로 편입되었다. 동로마의 문화는 아나톨리아반도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와 동유럽 땅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스케일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야기하였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성공은 지정학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세계를 자극시켰다. 12세기 이후 무슬림은 십자군의 원정에 맞서기 위해 단결했고, 이는 장기 왕조,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등과 같은 강력한 통일 왕조의 등장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살라딘은 십자군에게까지 관용을 베푼 위대한 지도자로 오늘날에는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비이슬람 문화권에서도 위인으로 존경받고 있지만, 그의 이러한 업적은 이슬람 세계의 영역적 통일에서 나온 성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였던 아라비아 일대는 십자군 전쟁에 이어 몽골 제국의 침략까지 받으며 크게 쇠퇴했다. 아이유브 왕조나 맘루크 왕조가 이집트를 지리적 기반으로 했던 까닭도 이와 결코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동쪽의 튀르크족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로 작용했다. 1299년 아나톨리아반도 내륙지대의 작은 토후국으로 시작한 오스만 제국은 십자군 전쟁, 몽골 제국의 침략 등으로 쇠퇴하고 분열된 아나톨리아반도와 아라비아를 차례차례 정복하여 15세기에는 이슬람 세계의 대부분은 물론 동로마의 영역까지도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점에서 십자군 전쟁은 튀르크인이 아랍인을 대신하여 이슬람 세계를 장악하고 그리스도교 문화권과 대치하는 르네상스기 이후의 지정학적 질서를 배태한 계기였다고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2백 년 가까이 이어진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교 세계 간의 적대감을 크게 증폭시켰다. 이러한 적대감은 르네상스와 근현대를 이어오며 다양한 역사적, 지정학적 요인과 맞물리며 해소되기는커녕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다. 지난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십자군 전쟁을 그리스도교 교회의 과오로 인정하고 사죄한 바 있다. 십자군 전쟁이 빚어낸 대립과 갈등의 지정학적 스케일은, 900년 이상이 흐른 21세기에 들어와서야 용서와 화합의 지정학적 스케일로 옮겨 가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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