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왕조는 왜 대부분 단명했거나 피정복 농경민에게 동화 흡수되었을까?
인류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유목민 집단의 활약상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 흉노(훈), 튀르크, 몽골, 페세네그, 거란 등의 유목민, 그리고 여진족이나 고대 켈트족, 게르만족 등 반농 반유목민은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하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동로마를 포함한 로마, 중국의 역대 통일왕조 등 강력한 제국을 약탈하거나 심지어 그들의 상국으로 군림하기까지 했다. 여진족이나 몽골족은 농경 국가를 지배하는 정복 왕조를 세우기까지 했다. 이들이 세운 유목민 제국은 인류사의 향방에도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목 생활을 통해 막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승마와 기마 궁술을 익혀 온 그들은 타고난 전사였다. 무시무시한 기동력을 발휘하며 마상에서 합성궁을 자유롭게 쏘아대는 그들은 농경민 국가의 최정예 군대조차 상대하기 버거운 강적이었다. 유목 생활은 그들에게 또 다른 군사적 이점까지 가져다주었다. 일정한 장소에 정주하지 않고 근거지를 수시로 이동했기 때문에, 농경민 국가에서 애써 그들을 토벌하려 해도 토벌 자체가 어려웠다. 유목민의 땅은 농경이나 부적합한 스텝 지대였고 유목민의 문화와 생활 방식은 농경민과는 너무나 상이했기 때문에, 농경 국가로서도 그들의 땅을 정복하거나 그들을 완전히 복속시키기는 어려웠다.
유목민은 대개 고도의 문자 체계를 발달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문화가 없이 그저 싸움에만 능했던 야만인이라고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그들이 살아가던 터전이었던 중앙아시아에서 흑해 연안에 걸친 스텝 지대는 고대부터 동서 교역의 무대였던 실크로드가 지나는 통로였다. 중앙아시아 스텝의 유목민들은 동서 교역을 주관하며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축적했고, 교역로를 따라 전파되는 문화와 재화 또한 흡수했다. 스텝 지대는 농경에는 부적합하지만 철광석 등의 자원은 제공하는 땅이었다. 그 덕분이 유목민들은 견고하고 효율적인 갑옷, 크기가 작아 휴대하기 간편하면서도 사정거리와 관통력이 탁월한 합성궁 등의 우수한 무기 체계를 개발할 수 있었다. 흉노족, 돌궐족은 지금으로부터 천오백 년-이천 년도 더 전에 대단히 세련되고 수준 높은 공예품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유목민이 한 번 결집하면 말 그대로 당해낼 상대가 없는 대 제국을 세웠다. 일례로 훈 족의 왕 아틸라가 세운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마보다 국력이 월등했던 동로마 제국조차 한때 속국처럼 부릴 정도였다. 반농 반유목민이기는 했지만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양쯔강 이북의 중국 중부와 북부까지 지배했고, 청나라는 오늘날의 중국보다 더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몽골 제국이 세계사와 세계지리에 끼친 영향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본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했던 유목민 왕조는 대부분 단명했다. 아틸라 제국은 아틸라가 사망한 직후 와해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급속히 소멸했다. 금나라와 몽골 제국의 역사 또한 100-150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청나라가 300년 가까이 이어졌지만, 청나라 건국의 주역이자 지배층이었던 여진족은 오늘날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에 불과하다. 그토록 강력했던, 그저 크고 강한 수준을 넘어 인류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유목민 왕조는 왜 단명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넓은 영토를 지배하며 그곳의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에 동화시켰던 로마,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등과 달리 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광대한 땅을 자신들의 문화권으로 변모시키지도 못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중세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리는 이븐 할둔(Ibn Khaldun)은 용감하고 강건한 유목민이 정복 왕조를 세운 다음 편안하고 안락한 농경문화, 그것도 특권층 생활에 젖어 들어 초기의 기백을 잃어버리고 결국 쇠퇴하다 멸망하는 수순을 밟는다는 논의를 제시한 바 있다. 문자 문화의 부재가 그들의 지속적인 발달을 저해하고 나중에는 농경민이 문자로 남긴 문서에 야만인처럼 기록된다는 지적도 있다. 건축 문화의 부재가 그들의 제국이 지속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논의도 존재한다. 필자는 고교 시절 몽골 제국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중국 땅을 정복했지만 문화의 부재로 인해 결국 중국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이야기를 교과서에서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상기한 여러 논의는 나름의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유목민이 문화가 없어서 소멸했다는 이야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흉노족은 문자 문화가 부재했을 뿐 고도로 세련된 문화재를 남겼다. 몽골 제국 역시 역참제, 천호제(千戶制) 등 제국 통치를 위한 법령과 제도를 구축했고 나중에는 세계제국 통치를 위한 파스파 문자까지 남겼다. 조선 실학자들은 청나라의 문물을 본받아 조선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논의를 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유목민 왕조의 단명을 인구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찾고자 한다. 스텝 지대는 그 특성상 인구 부양력이 매우 낮다. 연평균 250-500mm에 불과한 강수량은 수목이 자라기에도 농업이나 집약적인 목축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이곳의 유목민들은 가축을 키우며 목초지를 찾아 주기적으로 이동하는 유목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유목민의 인구는 농경민 국가의 인구보다 월등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아틸라 제국은 전성기에조차 인구가 20-30만 명에 불과했고, 동원 가능한 병력은 5만 명을 채 넘지 못했다. 몽골 제국 역시 전성기에 몽골인 인구가 100만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틸라 제국은 동서 로마와 싸우기 위해 그들에게 복속한 게르만족 전사들까지 동원해야 했고, 몽골 제국 역시 '색목인'이라 알려진 중앙아시아계 이민족을 관료집단에 받아들여야 했다.
유목민의 기마 궁술은 농경 국가들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에, 유목민은 궁기병을 앞세워 부족한 병력을 질적 우세로 상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복한 땅에 유목민의 문화를 확산시키고 그 땅을 온전히 유목민의 땅으로 탈바꿈시키기에는 유목민의 수가 너무나 적었다. 스텝에서 유목 생활만 한다면 그 정도의 인구로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고향에서 그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은 농경민의 땅까지 다스리고 지배하기에는 여전히 턱없이 적은 인구였다. 가뜩이나 적은 인구가 제국의 확장과 더불어 드넓은 땅으로 흩어졌으니, 그들의 인구밀도는 더한층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시간이 흐를수록 유목민 정복 왕조는 로마, 중국의 통일 왕조 등과 달리 정복한 땅을 완전히 그들의 땅으로 동화시키지 못했고, 결국 피정복민에게 동화되거나 그들에게 축출될 수밖에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유목민의 정복 왕조는 유라시아의 스텝에서 단련된 강력한 궁기병 전술로 승승장구하며 성장할 수 있었지만, 유라시아 스텝의 낮은 인구 부양력으로 인해 태생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던 인구가 광대한 제국 영토로 흩어지면서 거대한 제국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태곳적부터 유라시아의 동서교류를 담당해 왔던 스텝 지대는 이처럼 유목민들에게 양날의 칼과도 같은 운명을 부여하며 유라시아의 역사와 지리를 써나간 셈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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