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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an 03. 2022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이은 팍스 몽골리카의 계승자

티무르 제국과 몽골 제국

  유라시아를 동서로 이어 주었던 팍스 몽골리카는 1360년대에 종말을 맞이했다. 원나라는 명나라에게 중국 땅을 빼앗긴 채 몽골로 쫓겨났고, 나머지 세 울루스도 분열된 채 몰락했다. 이처럼 몽골 제국이 몰락한 뒤 그들에 의해 안전하게 관리되던 중앙아시아의 동서 교역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거의 연구자들은 몽골 제국의 분열과 오스만 제국의 대두, 그리고 신항로 개척으로 인해 실크로드는 결국 몰락했다고 설명해 왔다. 물론 제정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병합하고 제국주의 세계질서가 도래한 19세기 이후의 세계사와 세계질서만 놓고 보면 이런 설명도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이러한 논의는 지나친 서구 중심적 관점에 입각하여 사실을 왜곡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몽골 제국이 몰락한 뒤에도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후예를 주장하는 세력은 중앙아시아와 인도에서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이들 덕분에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는 14~18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서 문물의 교류를 담당하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 주체는 바로 티무르 제국과 무굴 제국이었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며 세력을 떨쳤던 차가타이 칸국은 14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종교였다. 타르마시린 칸(Tarmashirin Khan, ?-1334, 재위 1331-1334)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뒤  술탄 알라 앗 딘(Ala ad-Din)을 칭하기까지 했다. 타르마시린 칸의 개종은 칸국 서부의 트란스옥시아나에서는 호응을 얻었으나, 동부의 모굴리스탄 지역에서는 반발을 샀다. 중앙아시아에 이슬람교가 전파된 지 6세기도 더 지났지만, 몽골 제국은 본래 텡그리(Tengri)라 불리는 토속 신앙과 불교를 신봉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고대부터 동서 교역의 결절지였던 트란스옥시아나에 비해 모굴리스탄은 상대적으로 보수 성향도 강했다. 타르마시린 칸이 종교 문제로 인해 결국 반대 세력에게 폐위당하면서 차가타이 칸국은 분열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왕권 강화를 시도하던 카잔 칸(Qazan Khan, ?-1346, 재위 1343-1346)이 1346년 튀르크계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던 중 전사하면서 차가타이 칸국은 동서로 분열하고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모굴리스탄을 지배했던 모굴 칸국은 투글룩 티무르(Tughluq Timur, 1312?-1363, 재위 1347-1363)('티무르'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주석으로 부연하기)의 강력한 지도 아래 이슬람교로 개종하며 강성해져 갔다. 하지만 트란스옥시아나에서는 튀르크계 유력자들의 봉기가 이어지면서 내란 상태에 빠졌다.

  분열과 혼란에 빠진 트란스옥시아나에는 칭기즈 칸의 방계 후손인 티무르 이븐 타라가이 바를라스(Tāāmūūr ibn 'Tāraġaiyi Bārlās, 1336-1405, 재위 1370-1405)라는 인물이 있었다. 칭기즈 칸의 후손이라고는 했지만 팍스 몽골리카 시대에 태어난 그는 몽골계, 튀르크계, 페르시아계 등의 혈통이 섞인 혼혈인이기도 했다. 칭기즈 칸의 핏줄을 이어받은 몽골 제국의 명문 오복 바를라스는 티무르 대에 이르러 크게 쇠락해 있었기 때문에, 젊은 티무르는 가문의 일원을 이끌고 도적질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차가타이 칸국과 트란스옥시아나의 분열은 군사적 재능과 지적 소양까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칭기즈 칸의 후예라는 가문의 후광까지 가졌던 티무르가 날개를 펼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투글룩 티무르의 트란스옥시아나 정복은 티무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절호의 기회였다. 투글룩 티무르가 1360년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탁월한 전공을 세운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을 일시적으로 재통일한 투글룩 테무르의 인정을 받아 케쉬(오늘날 우즈베 키스탄 샤흐리사브즈)의 영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아울러 모굴 칸국의 트란스옥시아나 총독으로 임명된 투글룩 테무르의 아들 일리야스 호자(Ilyas Khoja, ?-1368)의 자문관으로까지 임명되었다. 투글룩 테무르의 휘하에서 종군하다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별명을 얻은 티무르는, 그 대가로 몰락한 명문가의 떠돌이 무사에서 트란스옥시아나의 세력가로 화려하게 부활하는 듯했다.

  하지만 티무르 대신 아유브 벡칙(Ayyub Begchik)이라는 인물이 일리야스 호자의 보좌관 자리에 오르면서, 투글룩 티무르의 힘을 빌어 트란스옥시아나를 차지하겠다는 티무르의 야심은 허사가 되었다. 이에 티무르는 투글룩 티무르와의 관계를 끊고 처남인 아미르 후세인(Amir Husayn, ?-1370)과 더불어 페르시아 등지를 유랑하며 용병 생활을 이어갔다. 이렇게 해서 실력을 키운 티무르와 아미르 후세인은 트란스옥사니아 침공을 감행했고, 두 사람은 1363년 오늘날 타지키스탄 일대를 흐르는 아무다리야강의 지류 바흐시강과 케쉬, 사마르칸트 인근의 미탄 등지에서 일리야스 호자군을 연이어 격파한 다음 타슈켄트까지 진격했다. 이로써 티무르와 아미르 후세인은 트란스옥시아나를 수복했다. 티무르에게는 행운이 잇다랐다. 바로 그 해에 티무르의 강력한 적수가 될 만한 인물이었던 투글룩 티무르가 세상을 떠났다.

  티무르와 아미르 후세인은 일리야스 호자를 축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곧바로 칸에 즉위할 만한 정통성은 부족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아미르 후세인이 찾아낸 차가타이 칸국의 왕족 카불 샤(Kabul Shah, ?-1370)를 허수아비 칸으로 옹립한 뒤 실권을 장악했다. 1365년 티무르와 아미르 후세인은 트란스옥시아나를 노리는 일리야스 호자의 침공을 받아 아무다리야강 서쪽까지 패퇴하는 위기에 몰렸지만, 이슬람교 종교지도자들에게 감화받은 사마르칸트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한 데다 전염병까지 창궐하는 바람에 일리야스 호자는 트란스옥시아나로 철수한 직후 반역자 카마르 웃 딘(Qamar-ud-din Khan Dughlat, ?-1392?)의 손에 최후를 맞았다. 이슬람교가 분열시킨 차가타이 칸국을 이슬람교의 힘으로 통일한 투글룩 테무르의 공은, 차가타이 칸국의 서쪽에서 일어난 티무르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필생의 동지처럼 보였던 티무르와 아미르 후세인의 관계는 투글룩 테무르 부자의 죽음과 트란스옥사니아의 지배와 더불어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모두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티무르의 아내였던 아미르 후세인의 여동생이 사망하자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트란스옥시아나와 아프가니스탄에 넓은 영지를 거느리고 있던 아미르 후세인이 우세했다. 그는 숫적 우세를 이용하여 티무르를 각지에서 연파하고 사마르칸트까지 빼앗았다. 티무르는 또다시 방랑자 신세로 전락했다. 하지만 귀족과 토호들에게 높은 세금을 물리며 권위적으로 군림한 아미르 후세인과 달리, 티무르는 부하나 토호들에게 자금과 인심을 베풀기를 꺼리지 않았기 때문에 인심을 얻을 수 있었다. 몽골의 명문 혈통까지 가졌던 그는 차가타이 칸국의 몽골인들을 포섭하여 세력을 회복한 다음, 1369년 아미르 후세인의 본거지인 발흐(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흐주 일대)를 기습하여 아미르 후세인을 실각시켰다. 티무르는 아미르 후세인을 용서하고 그를 살려 주었으나, 1370년에는 메카로 순례하러 가던 아미르 후세인을 기어코 암살했다. 이와 더불어 이용가치가 없어진 카불 칸도 티무르의 손에 숙청당했다. 티무르는 투글룩 테무르에 의해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대두한 지 10년 만인 1370년에 드디어 트란스옥시아나를 통일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칸은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들이 맡았고 티무르의 공식 직위는 아미르에 불과했지만, 티무르는 칭기즈 칸의 직계가 아닌 방계 후손이라는 혈통 때문에 칸에 오르지 못했을 뿐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티무르 사후에도 그의 후계자들이 아미르 직책을 세습하면서 티무르가 세운 나라의 실질적인 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이 나라는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을 칸으로 내세운 데다 케식, 이삭 등 몽골의 법령과 제도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튀르크, 페르시아, 인도 등 중앙아시아를 지리적 배경으로 하는 다양한 문화가 혼재된 양상을 보였다. 게다가 티무르는 자신의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유산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라는 중앙아시아의 또 다른 종교적 전통까지 활용했다. 이 때문에 1370년 티무르가 세운 나라는 '후 몽골 제국'이나 '신 차가타이 칸국' 등의 이름이 아닌, 티무르 제국이라 불린다. 공식적으로는 군주가 아닌 아미르였던 티무르와 그의 여러 후계자 역시 티무르 제국의 황제로 간주된다.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을 재통합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조상인 칭기즈 칸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제국의 지배자로 등극하려는 야심가였다. 몽골 제국의 몰락과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분열은 티무르가 야심을 펼치는 데 안성맞춤인 지리적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빠른 시일 내에 권력을 잡은 티무르였기에, 정복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고 공신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줌으로써 아직은 빈약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할 필요도 절실했다.

  티무르 제국이 출범한 1370년 무렵의 중앙아시아 및 그 인접 지역의 지정학적 상황은 티무르가 칭기즈 칸에도 비견되는 정복 군주로 부상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팍스 몽골리카가 끝나면서 몽골 제국의 울루스들은 분열하며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몽골 제국의 종주국인 원나라는 1368년 명나라에게 중국 땅을 잃고 만리장성 북쪽으로 쫓겨났다. 모굴 칸국의 칸 카마르 웃 딘은 정통성이 부족한 인물이었고, 그의 대두는 티무르에게 차가타이 칸국 통합이라는 명분까지 가져다주었다. 일 칸국은 이미 멸망했고 킵차크 칸국 역시 러시아인과 동유럽 국가들의 저항에 시달리며 쇠퇴하고 있었다. 14세기 중반에 일어난 흑사병의 대유행은 그들의 힘을 더한층 약화시켰다. 14세기 중반 무렵 인도의 대부분을 장악했던 델리 술탄국 역시 내분에 시달리며 영토가 축소되는 등 쇠퇴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티무르는 이슬람교의 성전, 즉 지하드를 명분 삼아 주변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지속했다.(각주: 티무르가 정복한 지역 가운데 상당수는 역설적이게도 이슬람 문화권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실질적인 군주가 된 티무르는 카마르 웃 딘 타도를 명분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모굴 칸국 원정을 개시했다. 티무르는 카마르 웃 딘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모굴 칸국의 영토를 잠식해 갔지만, 카마르 웃 딘의 저항도 만만찮았기에 모굴 칸국 원정은 십수 년 이상 지속되었다. 1390년 티무르에게 패배한 카마르 웃 딘이 종적을 감추면서 티무르는 오랜 적수였던 모굴 칸국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둘 수 있었다. 티무르는 투글룩 티무르의 또다른 아들 히즈르 호자(Khizr Khoja, 1363-1399)를 모굴 칸국의 칸으로 앉힌 다음 1397년 그의 딸과 결혼하여 동맹을 맺었다. 2년 뒤인 1399년 히즈르 호자가 세상을 떠나자 티무르는 모굴 칸국의 여러 지역을 또다시 침공하여 그들을 복속했다.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 통합에 만족하지 않았다. 1379년부터 티무르는 인접한 호라즘 원정을 개시했다. 일 칸국이 멸망한 이후 분열되어 있던 호라즘은 티무르의 맹공을 제대로 버텨 내지 못했다. 1381년에 이르러 호라즘의 여러 토후국들은 티무르 제국에게 병합되거나 속국이 되었다. 티무르의 다음 목표는 남서쪽의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 역시 일 칸국 멸망 이후 분열이 이어지다 보니, 페르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티무르 제국의 정복 전쟁에 맞서 적절하게 연합하거나 단결하지 못했다. 페르시아 북동부에서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존재했던 카라트 왕조는 1381년 티무르 제국의 침공을 받자 왕족은 물론 다수의 백성들조차도 저항을 거부하고 항복하는 바람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카라트 왕조를 정복하고 수도 헤라트를 빼앗은 티무르는 호라산, 이스파한, 시라즈 등지로 진격을 계속하며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 존재했던 여러 토후국들을 정벌하고 그 영토를 장악해 갔다. 이어서 1386년부터 1387년에 걸쳐서는 페르시아 서쪽의 캅카스와 바그다드 일대까지 정벌했다. 1387년 무렵에 이르러 티무르 제국은 옛 차가타이 칸국과 일 칸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자발적을 항복한 헤라트는 무사했지만, 이스파한, 바그다드 등 여러 도시들이 티무르 제국군에게 약탈 및 파괴당했고 반란자나 배신자들은 무차별 학살당했으며 예술가와 장인, 학자들은 사마르칸트로 끌려갔다.

   티무르 제국의 팽창은 제국 북서쪽에 인접한 킵차크 칸국과의 분쟁을 야기했다. 분열된 킵차크 칸국을 재통합하고 독립을 노리던 모스크바 대공국을 제압한 명군 토크타미쉬(Tokhtamysh, 1342-1406, 재위 1380-1397) 칸은 한때 티무르의 동맹자였다. 하지만 티무르 제국이 캅카스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티무르 제국과 킵차크 칸국 사이에는 심각한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 게다가 토크타미쉬 역시 티무르와 마찬가지로 몽골 제국의 정통성 있는 후계자를 자처했고, 이는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더한층 증폭했다. 결국 1387년 토크타미쉬가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함으로써 티무르 제국과 킵차크 칸국 사이의 갈등은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1389년 1월 티무르는 토크타미쉬의 병력을 시르다리야강 북쪽으로 축출했지만, 그는 군대를 이끌고 시르다리야강 인근에 주둔하면서 티무르 제국의 영토를 약탈하고 유격전을 이어 갔다. 결국 티무르는 토크타미쉬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대대적인 킵차크 칸국 원정을 감행했고, 1391년 6월 볼가강의 지류인 콘두르차강 인근에서 토크타미쉬를 상대로 압승을 거둔 뒤 새로 얻은 영토의 안정화와 반란 진압을 위해 페르시아로 귀환했다. 하지만 토크타미쉬가 심지어 맘루크 왕조와 동맹까지 맺고 티무르 제국을 위협하자, 티무르는 1395년 두 번째 킵차크 칸국 원정을 단행했다. 캅카스산맥을 넘어 산맥 북쪽 너머를 흐르는 테레크강변에서 악전고투 끝에 토크타미쉬를 격파한 티무르는, 곧장 시라이로 입성한 뒤 그곳의 그리스도교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무슬림이나 몽골계 주민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시라이를 비롯하여 킵차크 칸국의 주요 도시나 교역 거점들도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후 킵차크 칸국은 국력 저하와 내분을 이기지 못하고 쇠퇴해 가다 1502년에 완전히 멸망했다.

  페르시아와 중동을 석권한 티무르는 인도로 창끝을 돌렸다. 기원전부터 중앙아시아와 교류를 이어 오던 인도 원정은 팍스 몽골리카 시절 차가타이 칸국이 여러 차례 시도해 왔지만 실패한 터였다. 당시 인도는 유라시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풍요로운 지역이었던 데다 중앙아시아와도 연결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티무르는 인도 정벌의 유혹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14세기 초반 차가타이 칸국의 맹공을 격퇴해 낸 인도의 이슬람 왕조 델리 술탄국은 14세기 말에는 내분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게다가 델리 술탄국은 이슬람 왕조였지만 인도의 전통적인 신앙인 힌두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에, 티무르는 지하드라는 명분까지 얻을 수 있었다. 티무르는 1398년 인도 원정을 개시하여 델리 술탄국 군대를 상대로 연승을 거둔 다음 같은 해 델리에 입성했다. 이듬해까지 이어진 인도 원정에서 티무르는 델리를 비롯한 각지를 약탈, 파괴하고 수많은 힌두교인들을 살해하거나 이슬람교로 강제 개종했다. 티무르는 델리 술탄국을 멸망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속국화하여 조공을 받아내었다.

   인도를 정벌한 티무르는 곧이어 페르시아를 넘어 맘루크 왕조가 지배하던 시리아와 레반트 방면으로 원정을 개시했다. 1260년에는 몽골 제국의 침공마저 격퇴한 맘루크 왕조는 군사대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 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풍요와 수준 높은 문화까지 향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 티무르의 원정이 이루어지던 14세기 말의 맘루크 왕조는 내분을 겪고 있었다. 티무르는 1400년 알 나시르 파라즈(Al-Nasir Faraj, 1386-1412, 재위 1399-1412)가 친히 지휘하는 맘루크군의 기습을 격퇴하고 이듬해 초까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등 시리아, 레반트 일대를 약탈한 뒤 초토화했다. 이어서 1402년에는 아나톨리아반도와 발칸반도에서 대대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고 당대의 걸출한 정복자였던 술탄 바예지트 1세를 포로로 잡는 성과까지 올렸다. 하지만 티무르는 서쪽 이슬람 세계의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대신,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장인, 예술가, 학자들을 납치한 뒤 철수했다. 그 덕분에 맘루크 왕조는 레반트와 시리아를 수복했고, 술탄을 잃고 내란에 빠진 오스만 제국도 재기할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의 후계자라는 정체성이 확고했던 티무르에게는 서쪽 땅보다는 동쪽 땅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티무르의 생애 마지막 원정 목표는 명나라였다. 모굴리스탄 동쪽에는 아직도 모굴 칸국의 잔존 세력이 남아 있었고, 그 동쪽에는 원나라를 축출한 뒤 계속해서 세력을 키워 가며 심지어 티무르에게 조공을 요구하기까지 한 명나라가 있었다. 명나라 조정은 중앙아시아 세력의 견제를 위해 북서부의 이슬람교를 추방하는 등 탄압했다. 게다가 명나라 북서부는 북원 칸이 될 명분을 가진 오이라트 울루스와도 인접했다. 명나라 정벌은 티무르에게 몽골 제국의 헤게모니 장악과 이슬람교의 보호라는 정치적, 종교적 명분을 보장할 터였다. 명나라 정벌이 성공한다면 티무르는 중앙아시아, 나아가 유라시아 전체를 호령하는 강대한 제국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티무르는 1404년부터 명나라 원정을 시작했지만, 이미 70세를 바라보던 티무르가 이듬해 타슈켄트 인근의 우트라르에서 병사하면서 30년이 넘도록 이어진 그의 장대한 정복 전쟁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티무르 제국의 최대 판도(1405)(https://qph.fs.quoracdn.net/main-qimg-7887d3668283c085444ba1055ee6bf44-lq)

  1405년 티무르는 명나라 원정을 온전히 실행에 옮기기 전에 지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35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동서남북의 광대한 영토를 정벌했던 티무르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정복자였다. 티무르는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사라이, 델리 등 수많은 도시들을 약탈했고, 이교도는 물론 무슬림조차도 티무르의 손에 무수히 목숨을 잃었다. 심지어 티무르는 적군과 희생자의 시체로 해골탑을 쌓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다. 그 잔혹성은 초창기 몽골 제국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역사는 티무르를 그저 피에 굶주린 학살자로만 기록하지 않는다. 티무르는 단순한 파괴자가 아니라, 중앙아시아 땅에 새로운 문화가 꽃피는 계기를 조성한 인물이었다. 잔혹함과는 별개로 티무르는 영민한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와 종교, 학문의 힘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힘을 매우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칭기즈 칸의 혈통과 이슬람교를 활용하여 중앙아시아의 정복 군주가 될 명분을 확보했던 티무르는, 바그다드, 페르시아, 인도 등지에서 문화와 학문을 받아들이고 장인과 예술가, 학자들을 초빙하거나 심지어 납치하기까지 하면서 중앙아시아에 수많은 건축물을 남기고 학문과 예술을 진흥시켰다. 특히 티무르가 페르시아 장인들을 동원하여 사마르칸트에 조성한 정원은 15세기 건축 기술과 예술의 정수라고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티무르는 공신과 제후들에게 하사할 땅과 포상금을 확보하기 위한 교역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잇는 무역의 요지였던 카불, 칸다하르 등지(각주: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 속한다)는 인도와 티무르 제국 간의 무역 중계지로 번성하기도 했다. 아울러 티무르는 치세 후기에 접어들어 역사책 편찬을 장려함으로써 자신의 정복 사업을 신의 뜻과 가호에 의해 이루어진 위업으로 기록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기도 했다.

  급속히 확장된 티무르 제국을 지탱했던 티무르가 사망한 뒤 일어난 후계자 쟁탈전에서 그의 막내아들 샤루흐(Shahrukh, 1377-1447, 재위 1409-1447)가 티무르의 손자 할릴 술탄(Khalil Sultan, 1384-1411, 재위 1405-1409)를 몰아내고 1407년 티무르 제국의 실권을 차지했다. 제국의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였던 헤라트로 옮긴 샤루흐는 장남이자 후계자인 울룩 벡(Ulugh Beg, 1394-1449, 재위 1447-1449)와 더불어 티무르 제국의 안정과 영속을 위해서 종교와 문화의 힘을 더한층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우선 스스로 칼리파를 칭하며 영토 각지에 수니파 이슬람교를 적극 장려했다. 그리고 이슬람 문화권의 교육기관인 마드라사(madrasah)를 제국령 전역에 건설했다. 이를 통해서 티무르 제국은 이슬람 문화권으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공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수학과 천문학을 필두로 한 학문과 세밀화, 캘리그래피 예술이 더한층 발달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는 물론 이슬람 세계까지 대표하는 문화와 학술의 중심지로 거듭난 티무르 제국의 도처에는 몽골, 중앙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등지의 건축 양식이 융합된 독특한 건축물이 들어섰다. '티무르 르네상스(Timurid Renaissance)’라고도 불리는 티무르 제국의 화려하고 수준 높은 문화예술과 학문은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되며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사파비 왕조의 문화적 토대를 마련했고, 심지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유럽의 과학 발달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

티무르 왕조를 대표하는 건축물 구르 아미르.(위키피디아 영문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을 만류하는 구약의 내용을 그린 티무르 제국의 세밀화(위키피디아 Timurid arts)

  이와 더불어 샤루흐와 울룩 벡은 제국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역사학 또한 적극 장려했고, 이 과정에서 티무르 제국 인문학을 대표하는 명저인 알리 야즈디(Sharaf al Dīn 'Alī Yazdī, ?-1454)의 《전승기(戰勝記, Ẓafar-nāma)》가 탄생했다(야즈디의 전승기에 대한 상세한 사연은 각주로 부연하기). 티무르의 정복 전쟁사를 기록한 역사책인 《전승기》는 티무르를 신의 은총을 받은 위대한 영웅이자 구세주로 만들어 주었고, 그 덕분에 티무르 제국은 몽골 제국에 뿌리를 두되 몽골 제국과는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나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티무르 제국은 15세기 중반 이후 내분을 거듭하며 쇠퇴하기 시작했다. 티무르가 거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공신과 제후들에게 여러 지방을 다스릴 권한을 준 것이 화근이었다. 티무르 생전에는 그의 카리스마와 공포를 통해 지방 제후와 토호들의 발호를 억제할 수 있었지만, 티무르 사후 그 부작용이 불거졌고 샤루흐 등의 노력도 그 부작용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던 셈이었다. 일례로 울룩 벡은 샤루흐의 지위를 이어받은 지 고작 3년도 지나지 않은 1449년에 반역자의 손에 피살되고 말았다. 게다가 캅카스와 아나톨리아반도 동부, 페르시아 등지에서는 카라 코윤루(Qara Qoyunlu), 악 코윤루(Aq Qoyunlu) 등의 신생국이 생겨나며 분열하기 시작한 티무르 제국의 영토를 침식하기 시작했다.

  명군이라 칭송받던 아부 사이드(Abu Sa'id Mirza)가 1469년 악코윤루에 원정했다가 포로로 잡힌 뒤 처형당하면서 티무르 제국은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5세기 말에는 아랄해-바이칼호 사이의 스텝 지대에 살던 몽골-튀르크 혼혈 민족집단인 우즈베크인의 대대적인 침입이 시작되었다. 우즈베크 칸국의 칸 무함마드 샤이바니(Muhammad Shaybani, 1451-1510)는 쇠락한 티무르 제국을 상대로 연승을 거둔 끝에 1507년 수도 헤라트를 함락당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티무르 제국의 유산은 어디로 갔을까? 우즈베크인들은 티무르 제국의 화려하고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문화를 발달시켰고, 그 덕분에 티무르는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서 민족적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오스만 제국과 오랫동안 대립했던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역시 티무르 제국의 유산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티무르의 부계 후손이자 칭기즈 칸의 모계 후손이기도 한 자히르 알 딘 무함마드 바부르(Ẓahīr al-Dīn Muḥammad Bābur, 1483-1530, 재위 1526-1530)는, 이미 기원전부터 중앙아시아와 교류를 이어 오던 인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몽골 제국과 티무르 제국의 뒤를 이어받은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티무르와 마찬가지로 몽골 제국의 계보를 잇는 명문가 출신이었던 바부르는 본래 페르가나의 영주였지만, 샤이바니 칸의 침공을 이기지 못하고 세력을 잃었다. 1504년 카불로 퇴각한 바부르는 그곳에서 힘을 길러 재기를 도모했지만, 이미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아무다리야강 인근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대두한 우즈베크 칸국에게 1510년 또다시 패하고 말았다. 칭기즈 칸에게 나라를 잃은 호라즘 제국의 마지막 태자 잘랄 웃 딘처럼 갈 곳 없는 신세로 전락한 바부르는 우즈베크 칸국의 위협을 피해 추종자들을 이끌고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로 도주한 뒤 군소 토후국들을 상대로 약탈을 벌이며 연명했다. 인도 북부는 이미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와 교류를 이어온 데다 티무르 생전에는 티무르 제국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고, 그러면서 중앙아시아와 거리가 있는 데다 힌두쿠시산맥 등의 천연 장애물도 존재했다. 게다가 인도는 당대 유라시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풍요로운 지역이었다. 따라서 인도 북부는 바부르가 우즈베크 칸국의 눈길을 피해 재기할 땅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나라 부흥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객사한 잘랄 웃 딘과 달리, 인도의 지정학적 분열상은 바부르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었다. 인도의 델리 술탄국은 1451년부터 아프간족 계통의 로디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왕권을 강화하려는 술탄 이브라힘 로디(Ibrahim Lodhi, 1480-1526, 재위 1517-1526)가 귀족 세력의 반발을 사면서, 델리 술탄국은 심각한 내분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 지방을 다스리던 다울라트 칸(Daulat Khan Lodi, 1458-1526)은 자신의 세력을 위협하던 이브라힘 술탄에게 맞서기 위해 1524년 바부르에게 동맹 체결을 요청했다.  마침 펀자브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계획을 갖고 있던 바부르에게 이는 하늘이 내린 기회나 다름없었다.

  1526년 4월 20일 바부르는 델리 인근의 파니파트에서 이브라힘 술탄과 일대 격전을 벌였다. 아브라힘 술탄이 거느린 병력은 4만-10만 명에 달한 데다 무려 1천 마리의 코끼리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바부르 휘하의 병력은 1만 2천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당시로써는 최첨단 무기인 화포와 화승총, 그리고 궁기병을 보유했다. 어찌 보면 몽골과 튀르크, 그리고 인도의 군사 문화가 대결을 벌이는 양상이기도 했다.

  파니파트 전투에서 바부르는 중앙에 포병과 화승총병을, 그리고 좌우익에 궁기병을 배치했다. 숫적으로 우세한 데다 코끼리까지 보유한 적군의 돌격과 쇄도를 막기 위해 바부르는 전열 전면에 쇠가죽을 두른 수레를 쇠사슬로 연결하여 방벽처럼 세워 두었다. 투석기나 화포를 보유하지 않았던 델리군은 바부르군의 수레를 뚫지 못한 채 그 뒤에서 가해 오는 포격과 총격에 의해 진열이 와해되었다. 바부르군의 총포는 특히 코끼리 부대를 무력화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델리군이 고착된 채 진열을 흐트러뜨리는 동안 바부르는 좌우익의 궁기병을 우회시켜 적진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이 당시 화기의 한계와 궁기병 전술에 대해서는 주석으로 부연하기). 파니파트 전투에서 이브라힘이 전사하면서 델리 술탄국은 멸망했고, 바부르는 인도에서 확고한 세력 기반을 얻을 수 있었다. 300년이 넘도록 이어지며 이슬람교와 몽골 제국의 유산을 바탕으로 인도를 통일하고 세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 문화적 업적을 이룩했던 무굴 제국은, 파니파트를 초연과 포성으로 메웠던 1526년에 그 깃발을 올렸다.

바부르의 북인도 원정(https://www.militaer-wissen.de/indias-conquest-by-the-mughals/?lang=en)

  바부르는 파니파트 전투 직후 파드샤(padshah), 즉 황제로 즉위했지만 이는 무굴 제국의 완성이 아닌 시작이었다. 인도 중, 북부에 할거하던 여러 왕국과 술탄국들이 이방인인 바부르를 순순히 황제로 인정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도의 여러 군주들 중에서도 바부르에게 가장 큰 위협은 펀자브 남쪽의 라지푸트 지역에서 강국으로 대두했던 메와르 왕국의 라나 산가(Rana Sanga, 1482-1528, 재위 1508-1828)였다. 바부르가 델리 술탄국을 무너뜨리고 무굴 제국을 세우자 라나 산가는 라지푸트의 여러 토호와 부족들을 결집하여 병력 10-2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켰다. 델리 술탄국의 잔존 세력까지 포섭한 라나 산가의 역량은 바부르마저도 고전할 정도로 뛰어났고, 라지푸트의 병력 역시 무굴 제국보다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1527년 3월 16일 칸와에서 바부르는 파니파트 전투에서 그랬듯 전투용 수레와 총포를 활용한 전법을 통해 라지푸트 연맹군을 격파했다. 라나 산가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이듬해 1월 사망했고, 칸와 전투 이후 바부르의 강력한 방해물이었던 라지푸트 연맹은 와해되었다. 이어서 1529년 5월 6일에는 가가라에서 인도 북동부의 벵갈 술탄국까지 격파했다. 이로써 무굴 제국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가즈니에서 인도 북동부의 벵갈 지역을 아우르는 북인도의 거대한 제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바부르가 1530년 급서(이에 관한 일화를 주석으로 부연)한 뒤 그 1540년에 2대 황제 후마윤(Humāyūn, 1508-1556, 재위 1530-1556)의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굴 제국은 일시 와해되었고, 카불로 망명했던 후마윤은 1555년에야 사파비 왕조의 지원을 받아 제국을 완전히 재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마윤의 아들 악바르 대제(Akbar the Great, 1542-1605, 재위 1556-1605)는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군사령관 겸 지방관인 만사브다르가 일정 임기 동안 각지의 군사와 행정 업무를 관장하게 하는 만사브다리 제도를 도입하여 제국의 중앙집권화를 확립하고 국력과 군사력을 크게 강화했다. 아울러 그는 제국의 국교인 수니파 이슬람교 외에 시아파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그리스도교 등의 이교도들에게도 관용을 베풀고 그들의 교리까지도 수용함으로써 종교의 차이에 따른 갈등을 봉합하고 제국의 기반을 더한층 공고히 다졌다. 악바르 대제는 이렇게 기른 힘으로 무굴 제국의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악바르 대제의 후계자들도 정복 사업과 내정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7세기의 무굴 제국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경제 대국이자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고, 6대 황제 아우랑제브(Aurangzeb, 1618-1707, 재위 1658-1707)는 아우랑제브에게 협력했던 인도 최남단의 마이소르 왕국 정도를 제외한 인도 전역을 정복했다. 중앙아시아라는 땅에서 인류사에 큰 획을 그은 거대 제국을 세웠던 칭기즈 칸과 티무르의 후손들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와 교류해 온 인도 땅에서 인도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셈이었다.

무굴 제국의 영토(https://history.fandom.com/wiki/Mughal_Empire?file=Mughal-policy-and-administration1.jpeg)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가 인류 문명사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장소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와 실크로드를 연결 지으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 여러분도 적지 않으리라 본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는 대상의 모습은 아무래도 근대보다는 고대나 중세를 연상케 할 것이고,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세계의 무역과 문화 교류는 서양인들이 발견한 해상 교역로로 옮겨갔다는 인식 또한 여전히 강한 듯하다.

  물론 신항로의 개척과 명나라, 청나라의  해금 정책으로 인해 16-7세기 이후 실크로드가 동서 교류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이전에 비해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신항로의 개척이 곧바로 실크로드의 쇠퇴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18세기까지 무굴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육로와 인도양의 해로를 통하여 중아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사파비 왕조, 오스만 제국 등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 일례로 무굴 제국은 중앙아시아와의 대규모 말(馬) 교역을 이어 갔고, 그 중계지였던 카불, 부하라, 히바 등은 무역 중심지로 크게 번성했다. 무굴 제국은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지와도 직물, 목재 등의 교역을 이어 갔고,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등지와의 문화 교류를 통해 더한층 세련된 문화 발달도 이루어졌다. 나아가 무굴 제국은 유럽 국가들에 차(茶), 면직물 등을 수출하며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인도를 대표하는 문화재 타지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튀르크 등의 문화가 융합된 무굴 제국 이슬람 건축예술의 정수로 손꼽힌다.(위키피디아)

  18-19세기 이후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역과 무굴 제국,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 등의 국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는 바다와 육지라는 지리적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신항로 개척에 적극적이었던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대륙 국가로 중앙아시아를 통한 교역을 통해 여전히 적지 않은 이익을 창출했던 무굴 제국 등은 신항로 개척에 나설 동기가 적었다. 그런데 자연재해나 해적의 습격 등에 취약한 해상 무역은 육로를 통한 무역보다 효율적인 한편으로 훨씬 위험했기 때문에, 16-7세기 이후 유럽 국가들은 금융업, 보험업 등을 발달시켰다. 이는 무굴 제국 등의 농업이나 현물ㆍ현금 기반 경제보다 훨씬 유연한 자금 조달 및 경제 운영을 가능케 했고, 이로 인해 18-9세기 이후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 국가들에게 경제, 산업, 군사력 등을 추월당하게 된다. 19세기에 접어들며 중앙아시아는 제정 러시아의, 무굴 제국을 포함한 인도 전역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며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역은 사실상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18-9세기 이후의 이 같은 변화는 바다와 땅이라는 인간의 예측 범위를 넘어선 지리적 요인들에 따른 산물이지, 서구 문화의 우수성이나 아시아 문화의 비합리성 등에 기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 기원전부터 동서 교역의 주무대였던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는 18세기까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티무르 제국과 무굴 제국은 중세 말기-근대 초ㆍ중기에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역을 이어간 주축이었다. 요컨대 팍스 몽골리카로 개화된 중앙아시아를 통한 동서 교역의 활성화는 몽골 제국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라, 티무르 제국과 무골 제국이라는 그들의 후계자와 더불어 근대까지도 이어져온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중앙아시아는 천연자원의 보고이자 러시아, 중국, 인도, 유럽 등을 잇는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요지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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