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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an 10. 2022

동아시아의 밑그림을 그린 한 고조와 무제

동아시아 영역의 기초를 다진 한나라의 창건과 무제의 원정

  동아시아라는 용어는 독자 여러분께도 익숙하리라 믿는다. 동아시아란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을 포괄하는 지역이다. 즉,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동아시아의 안보가 어쩌니, 경제가 이러저러하니, 문화가 어떠하니 하는 이야기는 일상 속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동아시아에 속한 나라들이 우리나라와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는 사실 또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로 간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울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공통점이 많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불선(儒佛仙), 즉 유교와 대승불교, 도교에 토대한 정신문화를 발달시켰다. 한자 또한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문자 언어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한자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고 한자를 활용하여 동아시아 고유의 문화와 예술을 발달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데다 문화적 코드 또한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보니, 단순히 가까운 나라 정도를 넘어 동아시아라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반도, 중국, 일본, 베트남은 대개 동아시아 문화권으로 분류되며, 경우에 따라 몽골도 동아시아에 포함되기도 한다.(위키피디아)
15-6세기 동아시아 여성 복식(https://onehallyu.com/topic/332596-must-know-beauty-of-sinosphere-culture/)

  그런데 동아시아는 언제부터 동아시아라는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게 되었을까? 동아시아는 어떤 계기를 통해서 유불선, 한자와 같은 문화 코드를 공유하는 문화권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물론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를 흔히 '한자 문화권'이라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한자'라는 용어의 어원이기도 한 한 왕조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계기이기도 하였다. 한 고조 유방(劉邦, 247-195 B.C., 재위 202-195 B.C.)은 말도 풍습도 서로 달랐던 부족 연맹체에 불과했던 중국 땅을 온전하게 통일하여 유라시아의 동쪽 일대가 동아시아라는 공통된 문화권으로 거듭날 수 있는 지리적 발판을 다졌다. 그리고 한 무제(武帝, 156-87 B.C., 재위 141-87 B.C.)는 한나라를 위협하며 상국 행세를 하던 흉노(匈奴)를 몰아내고 실크로드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베트남까지 원정함으로써 한나라의 문화가 인접 지역으로까지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는 진(秦) 왕조이고, 최초의 본격적인 통일 왕조는 한 왕조이다. 그렇다면 진나라 이전에는 중국에 왕조나 나라가 없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중국의 본격적인 통일은 진나라가 아닌 한나라 대에 와서 이루어졌을까?

  진나라 이전에도 중국에는 상(商, 17세기-11세기 B.C.)과 주(周, 11세기-256 B.C.)라는 왕조가 엄연히 존재했다. 상나라와 주나라의 왕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 백성과 제후들의 존중을 받았고, 제후들을 책봉하거나 군대를 동원할 힘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왕조를 본격적인 통일 왕조라 부르지는 않는다. 상나라나 주나라에는 엄연히 왕이 존재했지만, 도읍 주변에 있는 왕실의 직할령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토는 제후들이 대를 이어가며 마치 작은 왕처럼 다스렸다. 제후들은 대부분 힘 있는 부족의 장이었기 때문에 한번 책봉된 제후는 왕실도 함부로 교체하거나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제후들의 영지는 말도 풍습도 서로 달랐다. 상나라나 주나라는 서로 다른 부족이 단지 같은 임금을 모시는 연합체에 가까운 나라였다.

주나라의 영역. 도읍 주변만 왕실 직할령이고, 나머지 영역은 제후들의 봉지이다.(www.allchinainfo.com)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중국을 완전히 통일하기 위해 엄격한 법률을 제정, 시행하고 도량형, 문자, 언어 등의 통일을 시도했다. 하지만 시황제(259-210 B.C., 시황제 재위 221-210 B.C.)의 무리하고 강압적인 법치와 통일국가 건설은 백성들과 지방 세력의 반발을 샀고, 시황제 사망 직후 일어난 진승ㆍ오광의 난(209-208 B.C.)으로 인해 진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진 멸망 직후의 혼란은 항우가 일단 수습했지만, 그는 포로나 민간인을 대상으로 약탈, 학살 등의 잔혹행위를 일삼으며 민심을 잃었다. 항우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을 외치며 고향인 팽성(彭城)을 근거지로 삼았지만, 그곳은 교통과 상업이 발달한 장소이기는 했으나 고대 중국의 중심지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무엇보다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을 자처하면서 서초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 땅을 자신의 측근이나 공신, 옛 제후 등으로 구성된 18제후왕에게 분봉했다. 이는 시황제가 도입한 중앙집권체제를 폐지하고, 상나라의 부족 연맹체, 또는 부족장, 공신, 지방 유력자 등이 제후로 할거하는 주나라의 봉건제로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고조 유방은 달랐다. 유방은 항우와 달리 선정을 베풀며 민심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중국의 중심지였던 관중(關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당초 서초패왕 항우에 비해 군사력이 약했던 한왕(漢王) 유방은 관중, 그리고 당초 유배지였던 파촉(巴蜀) 땅의 저력을 활용하여 항우와 장기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유방과의 일전에 전념했던 항우와 달리, 유방은 한신(韓信, ?-196 B.C.)에게 북벌을 명하여 서초의 후방을 북쪽에서 포위하는 한편 산적 출신의 독립 세력이었던 팽월(彭越, ?-196 B.C.)을 포섭하여 서초군의 보급로를 교란하는 등 지리적으로 한층 융통성 있는 전략을 구사했다. 결국 보급 문제가 불거지고 식량난에 시달리게 된 항우는 유방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몰락했고, 유방은 기원전 202년 중국을 재통일할 수 있었다.


  황제로 즉위한 유방은 시황제와 달리 비교적 점진적인 통일 정책을 실시했다. 일례로 봉건 제후를 완전히 철폐하고 각지에 설치된 군현을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게 한 시황제와 달리, 통일을 막 이룩한 한나라에는 군현과 제후국이 섞여 있었다. 후대의 학자들은 이를 군현제와 제후국이 혼합된 형태라 하여 군국제(郡國制)라고도 부른다.

한 건국 직후의 영토. 주나라에 비해 황실의 직할령, 즉 지방관이 다스리는 군현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위키미디아 커먼즈)

  하지만 대부분의 영토를 제후들이 다스렸던 주나라와 달리, 한나라의 영토는 태반이 군현이었고 제후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었다. 초한전쟁기에 유력 제후나 제후국 왕실의 후손들이 많이 도태되었고, 유방은 초한전쟁 과정에서 점령지를 한나라의 군현으로 바꾸어 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유방은 생전에 공을 세워 제후왕에 오른 한신, 팽월 등의 이성왕(異性王)들을 숙청하고 그들의 작위와 봉지를 유씨 황족에게 수여했다. 유방의 즉위와 더불어 중국 땅은 같은 임금을 모시는 부족장이나 제후왕들이 할거하는 땅에서 왕실과 조정이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는 통일된 땅으로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했다.

  유방의 후계자인 문제(文帝, 202-157 B.C., 재위 180-157 B.C.), 경제(景帝, 188-141 B.C., 재위 156-141 B.C.) 등은 도교와 유교를 장려하며 선정을 베풀어 한나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했다. 이들은 점진적인 속도로 한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체계화하는 한편으로 문자, 언어, 풍습 등의 통일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었다. 아울러 경제-무제 재위기에 한나라는 봉건제의 요소를 탈색하고 온전한 중앙집권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후(侯), 공(公), 왕 등과 같은 봉건 제후의 호칭은 실질적인 제후왕의 명칭이 아닌 일종의 명예직으로 변모하여 이어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한나라의 건국은 서로 다른 부족령이나 제후국들이 느슨하게 이어져 있던 중국 땅을 하나의 통일된 영역으로 재탄생하게 해 준 동아시아 역사와 지리의 큰 전환점이었다.  중국 민족을 한족(漢族)이라 부르고 중국 문자를 한자(漢字)라 부르며 이외에도 중국을 수식하는 말에 '한(漢)'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 고조 유방은 서초패왕 항우와의 사투 끝에 한나라를 세운 영웅이기도 하지만,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거대한 영역의 밑그림을 그려낸 거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을 안정적으로 통일해 간 한 왕조였지만, 대외적으로는 중대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만리장성 북방의 유목민 흉노 때문이었다. 튀르크계로 알려진 흉노는 중국 북부에서 노략질을 일삼으며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골칫거리로 부상한 상태였다. 스텝 지대에서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 사냥과 노략질을 체득한 흉노족은 타고난 궁기병 전사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흉노족이 살아가던 터전이었던 몽골 일대에는 다수의 철광석 산지가 분포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까지 지났다. 흉노족은 풍부한 철광석, 그리고 실크로드를 통해 얻은 뛰어난 기술과 경제적 이익을 활용하여 수준 높은 공예품과 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단지 문자 문화를 남기지 못했을 뿐, 흉노족은 오직 싸움과 노략질밖에 할 줄 모르는 야만인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스텝 지대에서 단련된 흉노 궁기병은 일당백의 전사였다. 중국인들은 흉내내기조차 힘든 현란한 기마술과 궁술을 발휘하며 쏜살같이 난입하여 화살비를 퍼부은 뒤 잽싸게 도주하는 궁기병은 중국의 최정예 기병대조차 상대하기 버거운 강적이었다. 이들이 언제 어디서 중국의 농촌 마을을 약탈하러 올 지를 예측하기란 극도로 어려웠고, 실컷 약탈을 일삼은 뒤 추격대가 오기도 전에 도망가 버리기 예사였다. 심지어 흉노 궁기병을 추격하던 중국의 추격대가 몸을 젖혀 활을 쏘는 데 능한 흉노족의 역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흉노는 태생이 유목민이라 일정한 장소에 정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근거지를 뿌리 뽑기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황제는 만리장성을 쌓고 명장 몽염(蒙恬, ?-209 B.C.)을 시켜 흉노족을 북쪽 너머로 쫓아냈다. 하지만 초한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흉노는 또다시 강성해졌다. 그들은 심지어 기원전 200년 유방이 친히 이끄는 한나라의 원정군을  격파한 뒤 한나라의 상국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한나라는 매년 흉노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하지만 동아시아를 덮친 기후변화는 한 고조 유방조차 당해내지 못한 용감무쌍하기 그지없는 흉노에게 파국을 안겨 주었다. 기원전 1-2세기 무렵부터 동아시아의 기온이 계속해서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일어난 기후 변화는 몇 년, 또는 10-20년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수십 년이 넘도록 기온이 계속해서 낮아진 끝에, 기원전 29년부터 기원후 219년까지는 동아시아에 소빙하기라 불릴 정도의 한랭기가 도래했다. 《한서(漢書)》 등의 사료에는 이 시기에 극단적인 혹한이 닥쳤다는 기록이 다수 나와 있다.

  한랭화의 피해는 만리장성 남쪽보다 북쪽에서 더 빠르고 가혹하게 닥쳤다. 북쪽으로 갈수록 위도가 높아 한랭화의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던 데다, 유목민은 농경민보다 기후변화에 더한층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폭설이나 가뭄 등이 빈발하다 보니 가축이 뜯어먹을 풀이 말라죽거나 개체수가 격감함에 따라, 유목민의 생명줄이었던 가축 사육도 큰 피해를 입었다. 식량이 줄어드니 인구 부양력도 당연히 줄었고, 이에 따라 흉노의 힘은 약해져 갔다. 무엇보다 말(馬)의 개체수가 감소하고 건강상태마저 나빠진 점은 흉노의 군사력에 치명타를 가했다. 경제력이 약화되고 식량 사정이 나빠지니 민심이 이반함은 물론 지도층의 분열까지 이어졌다.

  기후변화로 신음하던 흉노와 달리, 한나라는 문제와 경제의 선정 덕분에 국력을 크게 신장할 수 있었다. 만리장성 남쪽 땅은 북쪽 흉노의 땅과 달리 아직 기후변화의 피해를 크게 입지 않은 상태였다. 무제는 기후변화로 인해 흉노가 쇠약해지고 분열된 틈을 놓치지 않고 기원전 129년부터 대대적인 흉노 정벌을 개시했다. 이미 쇠퇴기에 들어선 흉노는 위청(衛靑, ?-106 B.C.), 이광(李廣, ?-119 B.C.), 곽거병(霍去病, 140-117 B.C.), 공손하(公孫賀, ?- 91 B.C.) 등이 지휘하는 한군의 공세를 제대로 당해 내지 못하고 패퇴를 거듭했다.

  무제가 장건(張騫, ?-114 B.C.)을 시켜 흉노의 영역을 거치지 않는 새로운 실크로드 교역로를 개척하면서 흉노의 입지는 더욱 약해졌다. 동서 교역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하며 취했던 폭리에 가까운 이득은 흉노의 중요한 자금줄이었는데, 장건의 활약으로 인해 이러한 독점 체제가 무너지면서 흉노의 자금줄에도 중대한 균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한나라는 흉노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동서 교역에 나설 수 있게 되면서 경제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큰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기후변화는 동아시아 최강의 세력을 자랑하던 흉노의 쇠퇴를 불러왔고, 한 무제의 정벌을 이기지 못한 흉노는 쇠락을 거듭하다 결국 기원전 1세기 무렵 고향이었던 몽골 땅을 버리고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한자와 중국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밑그림이 더한층 구체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 무제는 흉노를 정벌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흉노 정벌을 통해 한나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한 무제는 양쯔강 남쪽의 오늘날의 푸젠성(福建省), 저장성(浙江省) 일대에 살고 있던 이민족 민월(閩越), 동월(東越) 등을 정벌하여 영토를 넓혔다. 나아가 무제는 기원전 111년에 오늘날 베트남 북부에 있던 나라인 남월(南越)을 정복했다. 베트남 북부에서 세력을 떨쳤던 남월이었지만, 국력이 절정에 달했고 흉노까지 정벌한 한나라의 대대적인 공세를 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남월은 본래 진나라의 장군이었던 조타(趙佗, 257?-137 B.C.)가 세운 나라였다. 즉, 지배층은 중국계였지만 백성은 토착민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나라의 정벌 앞에 남월은 분열하며 지리멸렬했다. 무제가 남월을 정복하자 그 서쪽에 인접했던 교지(交趾)도 한나라에 귀순했고, 무제는 남월 땅에 5개의 군을 세웠다. 이로써 베트남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동아시아의 문화를 공유하는 땅으로 변모해 가게 된다.

  한나라의 북동쪽에서 번성했던 고조선도 무제의 칼끝을 피해 가지 못했다. 흉노 정벌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무제는 한나라의 영토를 확장하고 흉노의 재기를 막기 위해 기원전 109년 고조선을 침공했다. 고조선은 한나라의 수륙 병진 작전을 잘 막아내며 1년 이상 항쟁을 계속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는 가운데 기원전 108년 조정 내부의 화평파가 우거왕(右渠王, ?-108 B.C.)을 암살하면서 고조선은 멸망하고 말았다. 무제는 고조선 땅에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현도군(玄菟郡), 임둔군(臨屯郡)이라는 네 개의 군, 즉 한사군(漢四郡)을 세웠다.

  한 무제가 대대적인 대외 원정을 실시한 결과 한나라는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제의 고조선과 남월을 정복을 계기로 한반도와 베트남에는 한자를 비롯한 중국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한반도와 베트남은 중국에 완전히 복속되는 대신 독립된 영역을 지키며 독자적인 역사를 발전시켜 갔지만, 이때를 계기로 유입된 중국 문화는 이들 지역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한반도로 유입되어 변용되고 발전한 중국의 문화는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전해지면서 일본 문화의 밑거름을 다져 주었다.

  한 고조 유방이 다져 놓은 통일 한나라의 기틀은 무제가 흉노를 몰아내고 한나라를 동서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무제의 팽창 정책을 따라 한반도로, 베트남으로, 일본으로 퍼져간 중국 문화는 각지에서 현지 문화와 융합하며 독자적이고 개성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되고 공통점이 많은 문화를 발달시켰다. 이것이 바로 동아시아 문화이다. 결론적으로 한 고조와 한 무제에 의해 동아시아로 퍼져간 한자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문화 창달에 기여하며 한자를 공유하는 동아시아 문화가 태동하는 씨앗을 뿌린 셈이었다.

한 무제의 팽창은 중국 문화가 인접 지역으로 전파되며  동아시아 문화권이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위키피디아 영문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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