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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Sep 30. 2021

서해에서

제 처녀작 수필입니다. 첫 수필집 발간을 기념하며 공개해 봅니다.

서해 먼 바다 위로 노을이 비단결처럼 고운데, 나 떠나가는 배의 물결은 멀리멀리 퍼져간다. 꿈을 꾸는 저녁 바다에 갈매기 날아가고, 섬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 물결 따라 멀어져간다….
                                                                                정태춘 작사‧작곡, 「서해에서」 중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 룸메이트의 영향으로 정태춘이라는 가수에게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군 복무 중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며 작곡했다는 노래 「서해에서」의 나는 해 질 녘 서해를 물들이는 진홍의 낙조처럼 젖어 들어갔다. 그러면서 20년이 넘도록 영남 지방을 떠나본 날들을 손꼽을 정도였던 나의 가슴에는, 가본 적 한번 없는 서해가 화가 모네의 그림 「해돋이 인상」처럼 채색되어 갔다.

  대학교 3학년이 되던 어느 가을날, 불현듯 뇌리를 스친 「서해에서」의 애조띤 가락에 나는 홀로 부안행 버스표를 끊었다. 해도 뜨기 전에 대구에서 출발한 기차는 점심때를 조금 넘겨 부안행 버스로 도착했고, 낙조를 보려던 내 소망을 조롱하듯 흩뿌리는 빗방울 너머로 영화 「조폭 마누라 2」의 포스터만 선명했다.

  택시요금 같은 운임을 받던 격포행 구형 버스는 시골 외가에 다니곤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렸고, 제철을 맞은 전어는 신혼집 집들이를 하러 간듯한 풍미를 자랑했다. 납작하게 접은 종이 상자를 수백 장 쌓은듯한 채석강의 절경은 서해를 뒤덮은 구름에 낙조의 감격을 차단당한 나의 아쉬움을 달래 주었다. 변산의 품에 안긴 내소사는 산사의 고즈넉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수백 년 세월에 빛바랜 대웅전 지주는 그것이 가져다준 여유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담한 절간엔 훈장 달린 군복에 군화 대신 운동화를 신은 퇴역 군인들이 노후를 즐기고 있었고, 변산에 올라서니 저 멀리 곰소 앞바다가 눈에 잡힐 듯 펼쳐졌다.

  오래된 사진처럼 곱게 퇴색되던 서해와 변산반도라는 장소에 나는 2년 후 또다시 발길을 닿게 되었다. 대학원 답사차 갔던 남도의 들판은 여전히 드넓었고, 수묵화같은 간조의 갯벌은 닥스 회사의 손수건처럼 구획진 간석지의 전답과 자리를 함께했다. 유난히 구름 낀 날이 많았던 그해 여름답게 수평선 너머론 구름만 가득했지만, 채석강의 절경과 내소사의 고즈넉함은 변함없이 나를 반겨 주었다. 한여름의 녹음이 가득했던 서해와 변산반도, 하지만 그곳에는 철 지난 개나리처럼 샛노란 핵시설 반대의 포스터가 섬뜩하게 피어나 있었다.

  장교로 군 복무를 하는 나는 포병 병과로 임관하여 전남 장성에 있는 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매주 외박을 나갔던 그곳에서 나는 절친한 임관 동기와 함께 여행을 계획했고, 우리는 무엇에 끌리기라도 한 듯 다시금 변산으로 향했다. 군인티 내지 말자던 그 친구는 사복에다 군용 양말을 신고는 007가방을 들었고, 나는 군인 모자 대신 체크 무늬 모자를 쓰고는 서해 일몰을 보고야 말겠노라는 다짐과 함께 길을 떠났다. 진눈깨비 날리던 밤바다는 벗과 나누는 술잔에 가치를 더했지만, 이번에는 기필코 서해 낙조를 보고야 말겠다던 나의 야심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한겨울의 서해는 추위에 몸을 떠는 듯 요동쳤지만, 그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채석강의 층진 바위는 차가운 공기와 거친 바다 앞에서도 의연하기만 했다. 친정처럼 찾아간 변산에서 함께 소주를 마시던 그 동기생과는 몸이 떨어진 지금도 좋은 벗으로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서해, 정확히 말해서는 변산에 3번이나 다녀온 나는, 아직도 그 비단결 같다는 노을을 감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간조의 갯벌과 잿빛을 띤 서해가 그려낸 아늑한 수묵화, 아득한 세월이 깎고 다듬은 채석강의 정경, 그리고 내소사의 여유로운 풍광은 나만의 「서해에서」를 작사하고 작곡하여 내 귓가에 그 선율을 들려주고 있다.

  「서해에서」를 듣고 흥얼거리며 살아온 나의 삶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이어질 현재진행형이다. 마찬가지로 서해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기다리는 나의 마음도 현재진행형이다. 언젠가는 화창한 날의 해 질 녘에 서해 앞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낙조를 바라보며 감탄에 젖을 것을 고대하며, 다시금 「서해에서」의 노래가 담긴 CD를 내가 아끼는 오디오에 걸어 본다.

- 계간 『지구문학』 2006년 여름호에 최초 발표.
- 이동민 수필집 『서해에서』(2001년 발간, 지구문학)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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