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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Sep 30. 2021

침산낙조(砧山落照)

2008년에 발표한 수필입니다. 『서해에서』 수록 작품입니다.

        

水自西流山盡頭  물줄기 서로 흘러 산머리에 닿고
砧巒蒼翠屬凊秋  침산의 푸른 숲은 가을 청취 더하네
晩風何處春聲急  저녁 바람 타고 오는 방아 소리는
一任斜陽搗客愁  노을에 젖은 나그네 시름 애끓게 하네
                   -서거정, 『신증동국여지승람』 중에서-    

  대구 달성 출신의 학자이자 문관이었던 서거정 선생, 그는 왕명을 받아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고향 대구의 아름다움을 열 편의 칠언시(七言詩)로 노래하였다. 이름하여 대구십경(大邱十景)이라 불리는 열 군데의 명승지, 이 중 제10경은 바로 금호강이 휘돌아 나가는 다섯 봉우리를 가진 언덕인 침산에서 맞이하는 낙조, 즉 침산낙조이다.

  직장 생활과 대학원 수업을 병행하는 나에게 다른 약속이 없는 일요일은 흔히 ‘하고 싶은 공부’를 위해서 돌리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 직장인 생활에 대학원생 신분까지 겸한다고는 하지만 햇살 좋은 일요일 오후에 집 안에서 책만 붙잡고 있는 것도 그다지 즐겁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니다.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손에 잡은 대구 관광 안내 책자에서 우연히 대구십경에 관해 쓴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눈 덮인 팔공산(八公山)의 설경, 금호강(琴湖江)에서의 뱃놀이 등, 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법한 기사의 말미에는 어딘가 생경한 이름의 침산낙조가 산기슭 너머로 쓸쓸하게, 하지만 우아하게 져 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그래, 오늘 저녁에는 침산에서 저 고적한 낙조를 보러 가자!’

  남과 북을 1,000m도 넘는 고봉 준령이 둘러싼 분지, 바다 내음이라고는 횟집의 수족관에서나 맡을 수 있는 내륙도시 대구에서 낙조를 본다는 것은 마치 푸른 나무에서 고기를 잡겠다는 말처럼 들릴 법도 하겠지만, 옛 현인이 이르기를 그냥 낙조도 아니고 절경이라고 전하니 빈말로 헛되이 들어 넘길 이야기는 아닌가 싶다.

  날씨 화창하겠다, 시곗바늘은 오후를 지나 저녁 먹을 시간으로 달려가고 있겠다, 더 늦기 전에 발걸음을 재촉해야겠다.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목적지인 침산 공원으로 향하니, 삼십 분 남짓한 시간을 타고 인터넷의 사진으로만 보아야 했던 이정표가 이제는 실물이 되어 내 눈앞에 다가온다. 나지막한 침산의 자태를 온통 가려 버리는 신도시 아파트촌, 하지만 몇 걸음 돌아 나가니 마치 20년 전의 대구가 되살아나듯 옹기종기 작은 집들이 야구장을 메운 관중들처럼 언덕을 기대고 앉아들 있다. 시장이라도 할까 싶어 ‘베이커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고 ‘빵집’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제과점에서 천 원짜리 빵 한 봉지 사 들고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니, 산허리를 따라 집들이 일렬로 도열하고 저 너머로는 300만 인구가 모여 사는 대구의 정경이 공들여 만든 한 폭의 디오라마처럼 펼쳐진다.     

“뉴질랜드의 부호들은 해안가의 언덕마루에 집을 짓고 그 멋진 바다 경치를 즐긴다네. 우리나라와는 상반된 모습이지.”     

  문득 귓가에서 되살아나는 지도교수님 말씀. 몇 년 전 뉴질랜드에서 안식년을 보내셨던 지도교수님은 그곳의 세태를 이렇게 전하셨다. 대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와도 같을 법한 침산 언덕을 따라 늘어선 집들은 필경 큰 부자나 물질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이 살 법한 집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과연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어떤 곳일까? 풍광 좋은 아름다운 마을일까, 돈을 더 모으면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떠나야 할 그런 곳일까,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단지 수십 년 정을 붙여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고향인 것인가?

  푸르른 나무 사이로 완만하면서도 널찍한 산책로는 등산의 힘겨움이 아닌 늦은 오후 산책길의 아늑함을 주었고, 휴일 저녁의 한가로움을 즐기러 나온 가족들의 모습은 공원의 편안함과 사람 살아가는 내음의 살가움을 더해 준다. 어느덧 저녁해는 서산에 기울고, 주홍빛으로 식어가는 저녁해는 참나무 가지를 건들며 대지를 향한다. 낙조의 주홍빛 저녁놀, 그것은 갯벌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희뿌연 서해도 아니고 하늘 가는 길 같은 지리산 운해도 아닌, 내가 살아가는 땅 대구의 터전을 발갛게 물들인다. 저녁노을에 물든 도시의 풍경, 그리고 먼 산 너머로 저물어 가는 저녁해, 이제껏 고향은 아름답다고, 사람 사는 풍경은 아름답다고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말이고 또 해 왔던 말이건만 이것이 이토록 장엄한 풍광이 되리라고 언제 생각이라도 해 보기나 했던가? 진회색으로 포장된 도로도, 넓게 펼쳐진 대지 위로 우뚝 솟은 빌딩도, 대구라는 거대한 분지를 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빼곡히 메운 크고 작은 집들과 건물들도 침사의 저녁 햇살을 받으며 주홍빛 비단 자락이 되어 대지를 너울거린다. 눈 부신 햇살 대신 은은하면서도 붉디붉은 노을을 선사하며 서쪽 산자락 너머로 발길을 재촉하는 저녁해는 침산의 푸른 숲 가지 잘 뻗은 나무와 멋진 조화를 이루고, 노을에 젖은 도시의 그림자는 나그네 시름을 애끓게 하는 대신 한 시민의 가슴을 심미(審美)와 감동의 물결로 적신다.

  낙조의 붉은 파도도 한밤중의 검은 장막에 자리를 양보하고, 어둠이 드리워 가는 침산 공원의 등산로를 따라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 나의 눈앞으로 바다처럼 보이던 도시의 풍광이 조금씩 도로와 건물의 윤곽을 뚜렷이 해 간다. 구름과 빗물이 해를 가리지 않는다면, 침산의 낙조는 내일도 내년에도 그 언제까지라도 이 큰 도시를 붉게 물들이겠지. 더운 공기가 선선해지고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가 되면, 다시 한번 이 나지막하지만 아름다운 산에 올라야겠다. 저녁 바람 타고 방앗소리를 들을 수야 있으련만, 가을바람 타고 오는 낙조의 붉은 빛에 물들며 옛 현인의 풍류를 따르는 즐거움이야 비할 일이 없으리라….


계간 『지구문학』 2008년 여름호 수록.
이동민 수필집 『서해에서』(2021년, 지구문학) 수록 작품
  * 『서해에서』 발간 기념으로 공개하는 수록 작품 3편 가운데 2번째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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