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수필』 18권(2021년 11월 발간) 발표작
이 글은 2021년 11월 발간된 『영동수필』 18권 58-64쪽에 수록된 글입니다.
2000년대 중후반에 경기도 양주시에서 포병 장교로 군 복무를 했던 나는 주말이면 의정부 정보도서관에 들르곤 했다. 학자를 지망한 데다 유학에도 뜻이 있어 영어와 일본어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 외에도 전공 관련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북한산 끝자락에 있는 의정부 정보도서관은 주변 시설이 공원처럼 아주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도서관 바로 옆의 정원에는 연꽃이 피어나는 연못이 있고, 나지막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운동 시설과 놀이기구가 배치된 공간에서 뻐근해진 몸을 풀 수도 있었다. 조금 더 발길을 옮겨 산기슭의 산책로로 향하면 동화나 만화 속의 숲속 집처럼 생긴 세모난 방갈로가 몇 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군가의 별장일지, 아니면 의정부시나 개인 사업자가 운영하는 일종의 휴양시설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궁금증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태다.
도서관에서 보내는 주말의 점심 식사는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해결했지만, 저녁 시간은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내 기억에 도서관 식당은 주말에는 점심때만 문을 열었고 저녁 시간에는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저녁 시간이면 근처의 식당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해결한 뒤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그 덕택에 의정부 시내의 맛집을 제법 많이 알 수 있었다.
의정부의 주말 저녁을 책임지던 여러 맛집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곳은 강원도막국수라는 이름을 단 막국수 식당이었다. 그곳은 사실 내 눈에 띄기 딱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왜냐하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한 버스정류장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식당 입구로 들어가는 길이 5m 정도 되는 짤막한 길목의 입구가 정류장 앞에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그 식당의 큰 창문의 빛깔은 갈색이었다. 1970년대나 80년대에 유행했을 법한 짙은 갈색의 목재로 마감한 벽체와 천장에서 나오는 갈색빛이었다. 메밀요리와 노포(老圃) 모두 사족을 못 쓴다고 할 정도로 좋아하는 내 눈에 그곳이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다. 당장 문을 열고 막국숫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모습은 내 예상과 그대로였다. 천장에는 조각을 해 놓은 갈색 나무판들이 규칙적인 패턴을 이루며 노포의 세월을 장식했고, 폭 10㎝가량 되어 보이는 세로로 긴 어두운 갈색 나무판들이 2~3㎜ 간격으로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집집마다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천장과 벽면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잘 보이지 않아 기억 속에서 멀어져간 그 공간에 주말 저녁 다시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목제 천장과 벽면과 어우러지듯 다소 옅은 갈색으로 맞춘 식탁과 의자에도 세월의 흔적이 선명하여 색감은 물론 분위기도 잘 어우러졌다. 벽면에는 별다른 장식은 없었지만 메뉴판 옆의 커다란 메밀밭 사진과 메밀의 효능에 관한 유명 식품영양학자의 글을 붓글씨로 옮긴 족자는 이곳의 내공이 보통은 아니겠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해 주었다.
아무리 실내 분위기가 좋아도 맛집의 본질은 음식 맛일 터. 식사를 주문하고 몇 분 뒤 나온 막국수의 모습은 흔히 먹던 막국수와는 뭔가 달랐다. 열무김치와 얇게 썬 무김치 몇 조각, 그리고 고기 한 점이 전부인 고명이 얹힌 국수 그릇에서는 꾸밈없이 유행을 좇는 일도 없이 그저 본인의 내공과 손맛만을 믿는 장인과도 같은 주인의 음식 철학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향이 메밀 본연의 향임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요즘에야 스마트폰, SNS, 블로그 등을 활용하여 다양한 맛집과 노포의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고 맛집, 노포를 주제로 한 TV 프로그램과 유튜브 영상도 넘쳐나듯 하지만, 똑같은 인터넷 시대라고는 해도 2000년대 초중반은 지금처럼 다양한 맛집 찾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찾은 강원도막국수는 내가 제대로 된 강원도식 막국수를 처음 맛보게, 그리고 메밀 향의 매력을 태어나서 처음 느끼게 해 주었다. 이곳이 내 주말 저녁을 책임지는 장소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날 이후 강원도막국수 식당은 전역할 때까지 다른 약속이 있거나 휴가를 떠나거나, 아니면 당직근무, 훈련 등으로 인해 주말에 시간을 낼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매주 한 번씩 찾는 장소가 되었다. 물론 의정부의 맛집이 강원도막국수 한 곳뿐인 것은 아니었고 다른 맛집들도 찾아다녔지만, 의정부의 시립 도서관을 방문하는 주말이면 막국숫집은 거의 의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르지 않고 방문했다. 메뉴는 오직 물막국수 하나뿐. 매주 거르지 않고 물막국수를 맛보았으면 질릴 법도 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많지 않은 메뉴에는 비빔막국수도 있었지만, 혹여나 비빔 양념장에 메밀 향을 온전히 못 느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에 전역하는 그 날까지 강원도막국수의 비빔막국수는 맛보지 못했다.
막국수도 막국수지만 강원도막국수를 찾는 날이면 국수 삶은 면수를 거의 5~6잔 이상 들이키곤 했다. 처음 막국수를 맛본 날 딸려 온 따듯한 물의 맛이 낯설었던 나는 그 물의 정체를 궁금해했고, 사장님은 보리차나 옥수수 차 같은 게 아니라 막국수 삶은 물이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어린 시절 메밀요리를 그다지 많이 접하지 못했던 나는 면수를 물처럼 마신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한잔 들이키고 나니 또 한잔, 두 잔째를 비우고는 석 잔……. 메밀면수에 맛 들인 나는 마치 막국수가 아닌 면수 마시러 막국숫집에 들른 사람처럼 갈 때마다 대여선 잔도 넘는 면수를 비워대곤 했다.
막국수와 면수도 인상적이었지만 방학을 할 무렵이 되면 그 집 막내딸인듯한 여고생이 식당에 와 있곤 했다. 일손도 도울 겸 방학이나 주말을 부모님이 하시는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양새였다. 사장님 부부가 제법 연배가 있던 터라 언뜻 보더라도 막내딸로 보였다. 내 부모님보다도 연배가 덜하지는 않아 보이는 그 집 사장님의 여고생 딸이 부모님 일손을 돕는 모습은 내 눈에도 꽤나 인상적이었던 듯 싶다.
강원도막국수에서 주말 저녁 식사로 물막국수를 맛보는 일상은 군 전역과 더불어 끝났다. 메밀전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통 비워 보겠다는 군 시절의 작은 소망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강원도막국수는 늘 혼자서 갔고, 군대의 동료나 의정부의 지인과 가끔 의정부에서 식사나 술자리를 하기는 했지만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그토록 단골이었던 강원도막국수는 그런 동료나 지인과는 한 번도 함께하지 못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군문을 떠나고 나니 의정부는 얼마든지 시간을 내어 올 수 있는 곳이었음에도 찾는 일 없었다. 2014년 2월 무렵 무슨 볼일이 있어 의정부를 찾았던 날은 하필 강원도막국수가 문을 닫은 날이었다. 군 시절 주말 식사를 담당하지 못했던 맛집을 다시 찾지 못한 아쉬움은, 몇 년 만에 상전벽해처럼 바뀐 의정부 시내의 모습이 가져다주는 생경함으로 인해 내 가슴 속을 더한층 쓸쓸하게 만들었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 덕분에 강원도막국수의 후기는 틈날 때마다 읽었다. 인터넷 후기를 보니 내가 군 시절 느꼈던 오랜 맛집의 내공은 결코 나 혼자만 느낀 게 아니었다. 메밀 향과 면수를 즐기지는 못했지만, 학자의 꿈을 키우며 주말마다 외국어 공부, 전공 공부를 하던 시절의 주말 저녁을 책임져 주던 맛집의 모습을 되살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언젠가는 강원도막국수의 단골인 듯한 누군가가 쓴 블로그에서, 주인집 미녀 대학생 딸 덕분에 식당에 발걸음을 한 번 더 한다는 고백 아닌 고백글도 읽을 수 있었다. 여러 해 전 식당에서 주인집 딸이 왜 그렇게 내 이목을 끌었는지, 그저 부모님을 돕는 딸의 착한 마음씨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세 해 뒤에 읽은 또 다른 후기에서는 딸 결혼식으로 인해 막국숫집이 며칠간 휴업을 했다는 이야기도 읽을 수 있었다.
강원도막국수 식당에는 전역한 지 십 년도 더 지나서야 다시 들를 수 있었다. 가족과 원도봉산, 망월사를 찾은 날이었다. 그날은 2014년 2월과 달리 문을 열었고, 가족들과 함께 한 자리라 군 시절 주야장천 맛보던 추억의 물막국수는 물론 비빔막국수, 그리고 메밀전병까지도 맛볼 수 있었다. 추억의 맛과 메밀 향은 십 년도 넘는 시간을 거치면서도 변하지 않았고, 갈색빛이 고풍스러운 목제 천장과 벽체도 그대로였다. 물론 여러 해 전에 결혼했을 막내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에는 없던 카카오스토리 캐릭터들이 식당의 구석구석을 장식한 걸 보니, 막내딸이나 외손자녀들의 흔적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힘들었던 군 시절에 즐거움을 보태 주었던 강원도막국수의 음식 맛은 가족들의 마음도 사로잡았고, 그 뒤 나는 가족과 함께 몇 번인가 더 강원도막국수 식당에 행차했다.
몇 달 전 강원도막국수 후기를 검색하려 웹브라우저에 들어가 보니, 그사이 폐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혹시나 해서 살펴보니, 단골 노포 막국숫집이 결국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새롭게 카페가 들어섰다는 소식이 들렸다. 십수 년 전에 벌써 노포 느낌을 주던 추억의 그 막국수 식당이 문을 닫는구나 하는 생각에 아쉬움을 넘어 상실감까지 몰려 왔다. 이제 의정부를 갈 일이 생기면 어느 맛집을 가야 할까나…….
그러고 보니 군문을 떠난 지 십여 년 뒤에야 여러 메뉴를 골고루 맛보았던 강원도막국수 식당에서는 끝끝내 막걸릿잔을 기울이지는 못했다. 메밀전병은 가족과 함께 맛있게 먹었지만, 전역 후 결혼해서 몇 번 다시 찾았을 때는 그때마다 운전해서 왔었으니까. 의정부역 앞에서 메밀 안주 곁들여 막걸리에 취해 본다는 나의 작은 소망은 결국 이루어질 길이 없어진 셈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와서 참 아쉬운 일이, 가족과 함께 식당을 다시 찾았을 때 사장 내외께 십여 년 전 주말마다 혼자 와서는 면수만 대여섯 잔도 넘게 비우고 가던 젊은 손님 기억나느냐고 한번 여쭤보지도 못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