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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an 12. 2022

명주동 골목

 글은 강원수필문학회에서 발간하는 문예지 『강원수필』의 창간 30주년 기념 특집호인 『강원수필』 설렘 강릉호(2021년 12월)의 248-251쪽에 실린 글임을 밝혀 둡니다.

  강릉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나는 사실 강의를 위해서 서른 줄이 중간쯤 꺾인 나이에야 강릉 땅을 밟은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전에 새해 해맞이를 보러 정동진을 들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강릉이라는 땅을 밟은 적은 그때였다. 게다가 4년 가까이 이어졌던 강사 시절에는 버스를 타고 강릉에 강의하러 온 다음 바로 타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으니, 강릉에 매주 오기는 했지만 강릉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강릉을 ‘점과 선’처럼 오가는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매주 강릉을 오가던 내게 강릉이라는 장소의 이미지는 소나무가 우거진 학교의 교정과 고속버스터미널, 그리고 대관령을 넘으면서 차창 밖으로 보던 멀리 바다가 펼쳐진 강릉 시내의 원경(遠景) 정도였다. 그나마 언젠가 무슨 일로 들렀던 오죽헌, 그리고 오죽헌 구경을 마치고 맛보았던 설탕을 넣어 먹는 투명한 강릉식 막국수 정도가 강릉에 대한 추억을 조금이나마 만들어준 정도였다.

  강사 생활을 하던 학교에서 자리를 얻으면서 강릉은 학교와 버스 터미널, 집을 점과 선처럼 오가는 장소를 넘어 내 삶이 일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강문, 안목 해변, 경포호 등과 같은 강릉의 명소, 그리고 교동이나 임당동 같은 강릉의 중요 지명도 30대의 끝물에서야 비로소 내 머릿속에 각인될 수 있었다. 오래전에 해맞이를 보러 졸린 눈을 비비며 스치듯 다녀왔던 정동진을 제대로 둘러보고 어떤 장소인지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 계기도, 학교에서 벌인 교육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한 경험이었다.

  강릉의 여러 장소 중에서도 특히 내 눈길을 끌었던 곳은 명주동이다. 일제강점기나 1950년대를 그려낸 듯한 오래된 가옥과 골목에 유난히 관심을 빼앗기는 내 취향 덕분이다. 이런 취향은 20대를 보낸 대구에서부터 생겨났다. 옛 대구의 번화가였던 대구역 근처의 북성로와 태평로는 틈만 나면 찾곤 하는 산책길이었다. 그 당시에는 번화하기는커녕 쇠락할 대로 쇠락한 골목이었지만, 낡고 허물어져 가는 오랜 건물을 보면서 나는 이곳이 과거에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하는 상상에 빠지곤 했다. 대구역에 가거나 대구 시내에 볼일이 있으면 일부러라도 큰길을 두고 북성로나 향촌동의 골목 쪽으로 향했다. 이런 나를 두고 취향이 독특하다며 놀라는 친구도 있었고, 한 번은 멋도 모르고 밤중에 그곳을 둘러보다 다른 곳도 아닌 파출소 근처에서 ‘아지야 놀다 가’를 외치는 연세 지긋한 여성분들의 공세 때문에 몹시 당황스러웠던 기억도 난다. 어쩌면 대학 시절 수강했던 「향토지리학」 과목을 들으면서 『대구시사』를 통독하고 답사를 왔던 경험 때문에 옛 건물과 골목에 대한 애정이 그토록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강릉에 익숙해지면서 경험한 명주동 골목은 쇠락한 대구역 건너편의 북성로와 태평로를 일부러 찾던 20대 시절을 떠올려 주었다. 강릉 시내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대도호부 관아 건너편의 명주동에는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한 옛 건물과 가옥들이 즐비했기 때문이었다. 한눈에 봐도 일제강점기의 모습을 담아낸 듯한 적산가옥 하며 1970-80년대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2~3층 양옥집, 오래된 건물에 ‘방앗간’이라는 간판을 내건 카페 등, 강릉의 옛 모습을 그대로 담은 골목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구에서 살던 시절에 그랬듯 명주동 골목을 속속들이 둘러보기 시작했다.

  명주동 골목을 둘러보던 나는 강릉의 옛 모습과 더불어 20대 시절의 또 다른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명주동 골목은 쇠락한 옛 골목이 아니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문화가 깃들고 활력이 넘치는 골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대구 근대골목 재생사업에 잠시 발을 들였던 20대 후반 무렵의 추억을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군 전역을 앞둔 그 무렵은 대구 근대골목 재생사업을 주도했던 어느 시민단체의 활동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였다. 그 시민단체에서 발간한 『대구 신(新)택리지』라는 책을 냉큼 산 나는 책장을 펼치자마자 시민단체의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고, 시민단체의 대표 권 국장님의 블로그에다 내 소개 글을 남겼다. 권 국장님은 생면부지의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다주었고, 나는 권 국장님과 함께 대구 근대골목 이곳저곳을 오가며 일본 문헌을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그때의 경험을 통해서 나는 대구 근대골목에 깃든 독립투사들의 이야기,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 등을 흥미롭게 접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시민단체와의 인연은 반년 정도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대구 근대골목 재생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무렵 시민단체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활동을 중단했고, 그 뒤 학업을 지속하기 위해 대구를 떠나면서 시민단체, 권 국장님과의 인연은 끝나고 말았다. 잠깐 몸담았던 근대 골목 재생사업의 추억이, 문화와 역사의 옷을 입고 새롭게 단장된 명주동 골목에서 되살아났다.

  명주동 골목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기 위한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한 적은 없지만, 명주동은 20대 시절의 대구 근대골목이 그랬듯 그저 혼자서만 경험하는 장소로 끝나지 않았다. 2019년 여름에는 학과의 다른 교수님들과 더불어 명주동 답사를 주제로 한 교사연수 프로그램을 주관했다. 답사하면서 나는 명주동 골목이 옛적에는 서울과 강릉을 잇던 경강로가 지나던 곳이었고, 명주동을 관통하는 포장된 골목길이 예전에는 빨래터로 쓰이던 실개천을 복개한 길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빨래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어느 적산가옥 앞으로는 빗물받이 구멍이 나 있었고, 그 밑으로는 수십 년 전 명주동 주민들이 빨래하러 나왔을 실개천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식당으로 쓰이는 또 다른 적산가옥의 담벼락을 떠받치고 있는 옛 강릉 읍성의 잔해를 보면서, 대구 근대골목을 답사하며 보았던 대구읍성의 주춧돌을 보고 감탄하던 기억도 떠올렸다.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한 명주동 답사는 나에게 명주동에 깃든 옛 강릉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해 가을 나는 강릉문화원의 청탁을 받아 명주동에 스토리를 불어넣어 더욱 매력적인 명주동을 만들어 가자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지난 7월 말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 스트리머들이 명주동의 작은공연장 단에서 랜선 콘서트를 열었다. 코로나 시국이라 실제 공연이 아닌 공연 장면을 동영상 스트리밍으로 실시간 송출하는 형태의 공연이었다. 2년 전의 명주동 답사에서 명주동 마을 만들기를 주도했던 명주동 주민분들의 이야기를 듣던 그 장소였다.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동영상으로 멋진 공연을 들으며, 강릉의 옛이야기를 보고 옛 명주동 사람들의 삶을 느끼던 2년 전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명주동에는 어떤 이야기가 더 숨어 있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갈까? 강릉의 이야기와 강릉 사람들의 삶을 담은 명주동에서 좋아하는 음악가들의 공연을 직접 즐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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