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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Jan 13. 2022

태백산맥을 넘으며

 글은 2021 12 발간된 강릉문인협회 발간 문예지 『강릉문학』 29권의 342-44 실린 글임을 밝혀 둡니다.

  나는 나이 서른이 넘기 전까지 강원도에 발걸음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제주도를 포함해 다른 지역은 도 단위로 치면 안 가본 적이 없는데, 유독 강원도는 서른 살이 다 되도록 나와는 없는 곳이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각각 경남 통영·남해 일대와 제주도로 갔기 때문에 설악산 수학여행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대학 시절에도 강원도 여행을 온 적은 없다. 심지어 군 복무도 경기도에서 했다. 서른셋 즘에 무슨 회의가 있어 속초 울산바위의 콘도에 왔던 게 나의 첫 강원도 행이었는데, 이 이야기를 회의 자리에서 하니 동석했던 교수님이 어떻게 지리 전공한다는 사람이 강원도 한번 안 와 봤냐며 농을 건넨다.

  서른 살이 되기 전만 하더라도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강원도는 30대 중반에 이르러 새로운 인연으로 다가왔다. 박사학위를 받은 서른다섯 살의 여름 강릉에 소재한 대학에서 강의를 맡아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그때만 하더라도 KTX 경강선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태백산맥을 넘어 강릉으로의 첫 발길을 뗐다.

  강원도, 영동 지방에 대한 별다른 경험도 이해도 없었던 내게 강릉 가는 길은 새로운 여행길이었다. 태백산맥을 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던 몇몇 어르신들의 경험담과는 달리, 새롭게 뚫린 영동고속도로는 쭉 뻗은 현대적인 고속도로였다.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세는 두 눈에 선명히 들어왔지만,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오는 험로가 아닌 쭉 뻗은 고속도로를 타고 편안하고 빠르게 이동한 첫 강릉행이었다. 높은 태백산맥의 능선이 이어지나 싶더니 어느 순간에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바다의 모습은 내게 찬탄을 가져다주었다. 그곳이 바로 내가 강의를 해야 할 학교가 있는 강릉이었다.

  막 박사학위를 받은 터라 아직은 조금은 어색한 강의장에서 학생들과 만나니, 학생들은 분명 초면이고 낯설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학교의 교정도 처음 학교에 방문하는 나의 어색함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런데 강의를 시작하니 귀가 윙윙 울린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으로 오는 길에서는 물론 터미널에서 내려 식사를 마치고 강의실 바로 앞까지 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얄궂게도 강단에 서자마자 귓속이 무섭게 울리기 시작한다. 태백산맥에 익숙지 않은 내 귀가 높은 산맥을 넘어오면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나 보다. 어린 시절엔 의도치 않게 강원도에 발길 주지 않다가 삼십 대 중반이 다 되어서야 태백산맥을 넘어 영동 지방을 찾은 나에게 대관령이 해 준 신고식이었을까? 얼마나 귀울림이 심한지 학생들의 질문은 물론 내가 내 입으로 한 말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귀가 계속 윙윙거리고 멍하니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어찌어찌 강의를 큰 문제 없이 마치기는 했지만, 강의를 마치고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이러다 이번 학기 강의를 망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내 머릿속을 엄습했다.

  다행히도 내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내 몸이 태백산맥에 적응해서인지, 두 번째 강의부터는 귀울림 없이 아주 편안하게 강의를 진행할 수 있었다. 처음이라 어색했던 학생들과도 몇 번의 강의를 이어가면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때 맡았던 과목이 「문화지리학」이었는데, 한 번은 지명을 주제로 발표를 하던 학생 몇 명이 유교 사상이 재현된 지명의 사례로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인의리(仁義里), 예지리(禮智里)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발표 화면을 보니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의 바로 옆 동네 지명이다. 어느 선배 교수님이 지리학 한다는 사람이 나이 서른이 넘도록 강원도도 안 와봤냐며 농담을 건네신 것처럼, 지리학 공부한다는 주제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부모님이 계신 마을의 바로 옆 동네 지명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셈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마음에 나는 발표를 한 학생들에게 나도 잘 몰랐던 어린 시절 고향 집 옆 동네 지명을 그네들 덕분에 알 수 있었다며 어떻게 그곳을 알고 조사했냐며 물어봤더니, 그 학생들도 내가 그 주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게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들 중 한 명은 몇 년 뒤 사회활동가가 되어 후배들에게 특강을 하러 왔고, 뒤풀이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안주 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태백산맥을 넘느라 생긴 귀울림은 호된 신고식처럼 하루를 괴롭힌 뒤 영원히 사라졌지만, 강릉에 있는 대학교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한동안은 동계올림픽을 준비한다며 영동고속도로를 대대적으로 수리하는 바람에 교통체증이 굉장히 심해지더니, 어느새 KTX 경강선이 개통되며 내가 출강하는 학교에서 남북 단일팀의 경기가 열리고 대통령까지 관람하러 왔다. 그 직후 ‘내가 출강하던 학교’는 ‘우리 학교‘가 되면서 나와 강원도, 영동 지방, 강릉과의 거리는 더한층 가까워졌다.

  서른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발길을 디딘 태백산맥 동쪽은 이제 나의 일터, 삶터가 되었다. 교정에  있노라면 풍력발전기가 도열해 있는 태백산맥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태가 선명히 보이는 능선 위의 풍력발전기를 바라볼 때마다, 지금은 익숙하다 못해 삶의 터전이  영동과 강릉으로 인도해준 태백산맥의 귀가 윙윙거리게 만들어준 신고식을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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