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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Aug 06. 2022

20여 년만에 다시 읽는 존 키건

『월간문학』 통권 642호(2022년 8월호) 발표작(수필)

이 글은 한국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문예지 『월간문학』 통권 642호(2022년 8월호)의 257-60쪽에 실린 작품임을 밝혀 둡니다.


  1998년 겨울, 수능 시험을 갓 치른 나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명저 《전쟁론》을 사러 서점에 달려갔다. 전쟁사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었던 데다 전쟁사, 군사 및 외교 안보 전문가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전쟁론》 읽기는 수능 시험을 치른 다음 해야 할 소원 1순위였다.

  마침 서점 한편에는 《전쟁론》이 꽂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집어 드는 순간, 그 옆에 있던 두꺼운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전쟁사》라는 제목 밑에는 존 키건(Sir John Desmond Patrick Keegan, 1934-2012)이라는 저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전쟁사에 심취해 있던 내가 그 책의 유혹을 뿌리칠 리는 없었다. 들어본 적 없는 저자 존 키건이 누구인가 궁금해 책 표지를 넘겨 보니, 영국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의 석좌교수이며 전쟁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라는 소개 글이 적혀 있었다. 결국 나는 얼마 안 되는 용돈을 털어 《전쟁론》은 물론 《세계전쟁사》까지 사고 말았다.

  대학 입학을 하기까지 석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나는 두 책을 밑줄까지 그어 가며 읽었다. 마치 내가 군사전문가, 전쟁사 전문가가 된 듯한 마음으로.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두 책에 대한 이해 수준은 수박 겉핥기 정도에 머물렀다. 수능 시험을 막 치른 고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책이었으니까. 《전쟁론》은 군사 분야 전문가에게도 난해하기로 어려운 책이니, ‘전쟁이란 또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다’라든가 ‘절대전쟁’과 ‘현실전쟁’의 차이와 같은 《전쟁론》의 유명한 구절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몇몇 인상적인 문구를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수준에 그쳤다. 

  《세계전쟁사》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이야기체의 쉬운 역사책이나 전쟁사와는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간주하는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을 비판하고 전쟁을 문화와 관련지어 바라보아야 한다는 키건의 논지 역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그 시절의 내게는 너무 어려웠다. 클라우제비츠도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클라우제비츠를 비판하는 키건의 논의를 이해할 리는 없었다. 

  그나마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전쟁론》과는 달리,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한 《세계전쟁사》는 단편적이기는 했으나 머릿속에 분명한 인상을 심어 주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장 공간은 자연환경과 군사기술의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논의였다. 극지대나 열대우림과 같은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내용, 통신 기술의 미발달로 인해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전까지는 근해에서만 해전이 벌어졌다는 내용 등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전쟁사에 대한 남다른 흥미와 조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오래도록 취미나 개인적인 관심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집안의 반대로 인해 전쟁사나 군사‧외교·안보를 진로로 연결 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학업을 계속 이어 갔지만, 학위를 받고 대학 강의를 시작한 뒤에도 전쟁사는 여러 해 동안 취미와 관심사에 머물렀다. 몇 년 전에는 어느 고등학교에 진로 특강을 나가 흥미와 적성, 취미와 직업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내 전공과 직업, 그리고 나의 전쟁사에 대한 흥미와 이해를 그 사례로 든 적도 있었다. 다만 인문지리학을 강의하면서 원체 전쟁사 이야기를 사례로 많이 들어서인지, 나중에는 강의 중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마다 학생들이 ‘교수님 지금 사무라이 이야기할 타이밍이다’, ‘좀 있으면 중세 기사 이야기가 나올 거다’라는 반응을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2~3년 전부터 나는 전쟁사를 지리적으로 재해석하는 연구와 책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강의 중 학생들이 내가 사무라이, 기사 이야기를 할 타이밍을 읽어낼 정도로 전쟁사를 예시로 많이 들다 보니, 전쟁사를 역사학이 아닌 지리학으로 재해석한다는 아이디어가 자연히 생겨난 덕분이었다. 그 가운데 이십 년도 더 전에 읽었던 《세계전쟁사》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새롭게 되살아났다. 존 키건은 역사학자이지만, 자연환경과 문화의 영역성이 전쟁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키건의 논의는 다분히 지리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교에 입학한 뒤 오래도록 책꽂이에 고이 모셔 두었던 《세계전쟁사》를 다시 펼쳤다. 시간이 많이 흘러 고등학생이 아닌 대학의 교원으로 성장한 데다 집필이라는 목적까지 있어서였는지, 같은 책을 읽지만 그 느낌과 이해 수준은 사뭇 달랐다. 지형과 기후, 문화 등의 지리적 요인이 전쟁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세계전쟁사》의 내용은 여러 책을 집필하고 연구를 진행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내게 《세계전쟁사》는 구입한 지 22-3년이나 지나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각별한 책인 셈이다.

  며칠 전 《제1차 세계대전사》라는 책을 집필과 연구에 참고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빌렸다. 저자가 누구인지 살펴보니, 존 키건이다. 존 키건의 또 다른 저서를 보며, 이해도 안 되는 책을 밑줄까지 그으며 씨름하던 20여 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낯익은 저자의 이름을 다른 책에서 또다시 만나니, 키건이 역시나 전쟁사 연구 분야의 거장은 거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방대한 자료 조사와 다방면에 걸친 깊이 있는 통찰을 전쟁사에 녹여낸 필력은 역시나 키건이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냈다. 언젠가 키건과 같은 거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꿈과 더불어, 이미 고인이 된 존 키건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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