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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해탄적일천 (1983)」

by 전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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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灘的一天」85/100


자신을 신뢰하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Sobald du dir vertraust, sobald weißt du zu leben.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 《파우스트 제1부 (Faust: Eine Tragödie [erster Teil])》


「해탄적일천」, 해변의 그날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허우샤오셴 감독과 더불어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에드워드 양 감독의 첫 장편영화로 사람에 따라서는 대만에서 뉴웨이브 사조의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황혼이 짙게 깔린 바닷가,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파도 소리가 들린다. 파도 소리는 이내 멎고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의 끝자락이 흘러나온다. 뒤이어 흘러나오는 연주자와의 인터뷰 음성. 피아니스트 탄웨이칭은 대만으로의 귀국이 13년 만이라고 말한다. 그런 웨이칭 앞으로 남겨진 하나의 전화번호. 무심하게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바라보던 그녀는 수심에 찬 눈빛으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럭비를 하는 남학생들, 스탠드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다름 아닌 젊은 시절의 탄웨이칭이다. 탄웨이칭은 린자썬의 땀을 닦아주며 대화를 나누고, 그런 그들 곁으로 린자썬의 동생 린자리가 걸어온다.

화면은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고 비서는 웨이칭에게 오늘의 일정을 보고한다. 비서는 세 시의 기자회견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비서가 나가고 웨이칭은 창밖을 내다보고 피아노 연주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피아노 앞에는 젊은 웨이칭이 앉아있다. 자썬과 웨이칭은 춤을 춘다. 숨을 한차례 들이마시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후 웨이칭은 수화기를 들고 비서를 부른다. 그녀의 표정이 복잡하다.

자썬, 자리 남매와 함께 그들의 집을 찾아간 웨이칭. 일본식 가옥. 아버지와 독대하는 자썬. 아버지는 기모노를 입고 근엄한 자세로 앉아있다. 해부학 시간만 되면 기분이 조금 그렇다는 자썬에게 아버지는 수술 장면을 많이 볼수록 좋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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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칭은 비서에게 기자회견을 취소해달라고 말하며 나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비서는 음악에 집중할 수 없으면 연주회를 망칠 테니 다녀오라고 말한다. 그렇게 도착한 한 카페. 그곳에는 나이를 먹은 자리가 앉아있다. 13년 만에 만난 그들. 자리는 자썬의 편지를 웨이칭에게 건네주려 하지만, 웨이칭은 없다는 답만이 돌아오고 나중에서야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노라 말한다.

기차역, 기차에 올라탄 자썬 남매를 웨이칭은 배웅한다. 고향 집에 도착하자 자썬의 아버지는 자썬을 친구의 딸과 혼인시키기로 약조한다. 자썬은 이에 불공평하다며 항의하지만, 그로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썬은 아무 말 없이 공터에서 홀로 벽에 공을 던지고 받기를 반복한다. 그의 손을 떠난 공이 벽에 부딪히는 반향만이 울려 퍼진다.

웨이칭은 오스트리아로 떠날 마음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위급할 때 보호색을 띠는 곤충처럼, 자썬과 끝난 뒤 음악밖에 남지 않은 그는, 집으로 자리가 찾아온 것도, 자썬의 편지도 알고 있었지만, 그땐 만날 용기가 없어 살 길을 찾아 떠나는 일뿐이었다고 말한다. 웨이칭이 커피를 젓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긴 정적이 고통스럽게 찾아온다. 웨이칭이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게 결혼은 했느냐고 묻는다.

다시 대학 시절의 회상, 자리는 웃음이 순박한 더웨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졸업 후 타이베이에 있던 그녀의 방을 빼버려 자리는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고, 더웨이는 군대에 가게 된다. 그 사이 자썬은 의사가 되어 아버지와 함께 흰 가운을 입고 있고, 아이도 생겼지만,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리마저 정략결혼시키려 하고, 그녀는 오빠를 찾아가 묻는다. 행복하느냐고. 그런 그녀에게 자썬은 되묻는다. 행복이란 게 뭐냐고. 그런 오빠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던 그녀는 그날 밤 야반도주해 더웨이와 결혼한다.

그런 자리에게 웨이칭은 흐뭇한 미소를 보내며 저녁에 있을 자신의 공연 VIP 티켓을 두 장 줄 테니 더웨이와 함께 오라 말하지만, 머뭇거리던 자리는 오늘 밤에는 가지 못한다 말하며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간다. 3년 전 어느 날, 오랜만에 들뜬 기분으로 집에 들어선 자리는 가정부로부터 경찰에게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더웨이가 어떤 해변에 있다고. 익사했다고.


오랜 친구 아차이와의 사업이 크게 성공하며 더웨이는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그렇게 자연히 권태를 겪던 중, 자리는 더웨이가 한 여자와 바람피우는 듯한 장면을 목격한다. 더웨이를 의심하는 자리는 그를 미행하고, 이 일로 인해 둘은 다투게 된다. 그녀는 더웨이에게 전화를 걸어 먼저 화해의 손길을 건네고, 둘은 차에 올라탄다. 무거운 분위기 속 그녀는 이런저런 질문들을 더웨이에게 건네지만, 그조차 자신을 의심하는 말들로 들린 더웨이는 난폭하게 차를 몰고, 이에 화내는 자리에게 자신을 믿지 못하니 겁이 나는 거라며 되려 역정을 낸다.

다시 해변. 경찰이 더웨이의 소지품인 것으로 추정되는 물품들을 보여주지만 자리는 그것들 중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의 이름이 적힌 약병마저 처음 보는 것이다. 이상한 점이 없었느냐는 경찰의 질문에도 역시 아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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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고 피운다. 사실 그녀도 이미 모든 것들이 달라져 버린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을 뿐.

그렇게 둘은 자꾸만 다투고,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게 어떻냐는 아차이의 제안으로 더웨이는 해외 지사로 떠난다. 더웨이가 떠난 사이 자리는 친구가 소개해 준 남자에게 잠시 마음이 흔들리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한다.

그러던 중 자리에게 한 여자가 찾아온다. 종종 더웨이의 사무실에 얼굴을 비추던 그녀의 이름은 샤오후이. 그녀는 자신에게 보낸 편지봉투 속 내용물이 자리를 향해 쓴 편지임을 보고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스스로를 더웨이의 불륜 상대라고 밝히며 샤오후이는 더웨이가 의도적으로 그 편지봉투 속 내용물을 바꾸어 보낸 것이라 말한다. 자신감이 없고 소심한 더웨이가 부인에게는 자신이 처한 곤경을 알리면서 그녀에게는 자신의 무능함을 하소연하는 그만의 방식이라고 말이다. 골치 아픈 게 싫기에 더웨이와는 끝났다고 말하며 일어서는 샤오후이에게 자리는 더웨이를 사랑하냐고 묻지만, 샤오후이는 순간적인 충동만이 있을 뿐, 사랑이란 없다고 답하며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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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더웨이의 귀국 날은 다가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인지 꺾꽂이를 하던 중 자리는 쓰러지고 만다. 더웨이는 꽃을 사들고 병문안을 오고, 그간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털어놓은 자리의 손을 더웨이는 말없이 잡는다. 자리는 친구에게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열고 더웨이를 믿겠다 말한다. 그리고, 3년 전의 그 어느 날은 불현듯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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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경찰의 질문에 자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말한다. 그런 그녀를 찾아온 것은 아차이. 아차이는 자리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더웨이가 회사 돈 5천만 위안마저 횡령했고, 큰 빚을 져 집과 차, 부동산마저 모두 저당잡혔을 것이라고. 게다가 그는 며칠 전 출국했었다고.

그날 오전, 아차이는 황망한 표정으로 더웨이가 죽었다는 자리의 전화를 받고 샤오후이를 찾아간다. 샤오후이는 더웨이와 몇 번, 심지어 지난주에도 그 해변에 갔었다고 말한다. 더웨이가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에. 하지만 아차이는 더웨이를 일본에 보낸 적이 없었다. 아차이가 해변에서 발견된 더웨이의 약병에 대해 묻자, 샤오후이는 지난주에 더웨이가 해변에서 그것을 던졌던 것 같다며 그것이 항우울제의 일종이고, 최근 회사일로 바빠 처방받았다는 말을 한다. 아차이는 샤오후이에게 함께 해변으로 가자고 한다. 샤오후이는 이런 일에 휘말리기 싫다며 태연히 거절한다. 아차이는 무언가 눈치챈 것인지 샤오후이에게 더웨이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면서 입을 다물고 있다니, 모든 것을 더웨이와 짠 것 아니냐며 샤오후이에게 화를 내며 떠난다.

모래톱에 아차이와 자리가 앉아있다. 아차이는 모든 게 자신의 탓이 아닌지 자책하고, 더웨이가 죽었거나 멀리 떠나버렸을 것이라 한다. 물론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결과는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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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집은 비워지고 있고 자리는 자썬과 대화하던 것을 회상한다.


자썬

 시간의 힘은 그만치 위대하고 그만치 무섭기도 하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병원도 같이 도태되고 있어. 나도 병원과 함께 세상에서 잊혔고. 네가 집을 나가던 날 밤이 기억나는구나. 우리 지금처럼 이렇게 조용히 대화했었잖아. 기억하고 있니? 듣기론 더웨이랑 요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던데.

 時間的力量是那麼地偉大, 也是那麼地可怕。爸爸去世了, 醫院也跟着被淘汰。我也跟着醫院被世界所遺忘了。記得你離家出去那天的晚上。我們就現在一樣靜靜地談了很久。你還記得嗎?聽說你跟德偉最近處得不太融洽, 是嗎?


자리

 나중에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날 밤 그렇게 순진하게 대화하진 않았을 거야. 어쩌다 보니 이 모양 이 꼴이지. 그래도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더웨이와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

 假如我知道以後我們會變成這個樣子, 那天晚上, 我就不會那麼天真地跑去找你談。可是事情已經演變到現在這個局面。我想我已經知道應該怎麼去改進, 我跟德偉關係的方法。


자썬

 어떻게 해야 하는데?

 什麼方法?


자리

 내가 그에게 완전한 신뢰를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我想, 我應該給他完全的信任。


자썬

 너는 정말 네가 정말 더웨이를 믿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살면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내 한평생의 모든 것들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거야. 하지만 나는 한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었지. 누군가를 너무 맹목적으로 믿으면 안 돼. 자리, 나는 당초에 아버지를 너무 믿고 말았어. 지금 나를 봐. 아버지를, 그 모든 것을 따라 시간 속에서 잊히고 있어.

 만약에 그날 밤의 일이 지금 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나는 네게 다시 똑같은 말을 할 거야. 어쩌면 내가 한 말들이 네가 집을 떠나도록 하는 암시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렇더라도 나의 가장 중요한 의도는, 네가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고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거야. 내가 짐작해보건대, 너는 지금 또다시, 같은 문제에 부딪힌 것 같구나.

 你相信德偉嗎?也許, 我這一生當中, 所學到最好的教訓, 就是這個, 我這一輩子一切都靠自己。可是我卻盲目去相信了一個人。不要太盲目地去相信任何一個人。佳莉, 當初我就是太信任了爸爸。你看我現在。隨着他, 隨着這一切, 都被時間所遺忘了。

 如果你離開家那天晚上的事, 是發生在現在, 我還是一樣地會跟你講同樣的話。也許, 我所說的那些話, 是給了你那種, 鼓勵你離開家的那種暗示。可是, 我最主要的意圖, 是希望你完全地信賴自己, 和用自己的方式去做一個選擇。我可以猜的到, 你現在所面臨的, 還是同樣的問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의원은 기울었고, 자썬은 자신도 의원도 세상의 뒷전에서 잊혀만 간다고 생각한다. 자썬에게 자리는 그날 밤 집을 떠난 자신의 행동에 후회한다고 토로하며 더웨이를 믿었다 토로하고, 그런 자리에게 자썬은 자신도 한때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믿었다며, 아버지를 너무 믿었다며, 살면서 자신이 배운 교훈은 모든 게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라 대답한다. 착잡한 표정의 자썬은 눈가가 붉고, 자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돌린다. 둘 다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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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은 붉게 타오르고 파도 소리만이 가득하다. 자리는 앉은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더웨이의 시신을 찾던 잠수부가 무언가 발견했는지 바지선 위 인부들에게 내려오라는 손짓을 하고 잠수부들이 바다로 뛰어든다. 경찰이 황급히 자리를 찾지만 그녀는 자리에 이미 없다. 그녀는 사구 위를 터벅터벅 걸어 올라간다. 경찰이 소리치지만 들리지 않는다.

다시 카페, 이야기를 끝마친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눈에는 물이 괴었다. 웨이칭은 그런 그녀를 그저 바라본다. 깊은 침묵은 씁쓸하게 그리고 오래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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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 웨이칭은 자썬의 근황을 묻는다. 자썬은 2년 전 간암에 걸려 지난겨울 죽었다.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올라섰다. 자리는 자썬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 그의 삶이 보잘것없었지만 보배와 같이 경이로웠다 말하며 편안히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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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자리의 뒷모습을 보며 웨이칭은 생각한다. 아직 나는 더웨이가 그날 그 해변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내가 알던 소녀 자리는 이제 여인이 되었고, 그건 아마 그날의 그 해변에서 일어난 일일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긴 호흡을 따라가기에 내 폐는 턱없이 작았다. 166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 속 대화와 대화 사이의 침묵, 그 간극이 참을 수 없이 답답하다. 자리가 풀어놓는 지난 13년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버거운 것이었고, 자꾸만 서사는 지연된다. 그럴 때마다 다시 침묵은 흐르고, 등장인물들의 야릇하고도 슬픈 눈빛을 보며 그들의 어찌할 도리 없던 지난날들의 무기력한 권태감에 함께 늘어진다. 그렇게 영화가 막을 내리고 조금 시간이 지났을 때, 와인을 끓이듯, 후각을 마비시키던 알코올이 날아가고 진한 포도의 향만 남는 것처럼, 그때야 비로소 이 영화의 잔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샤오후이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사랑은 없고 충동만이 있을 뿐이라고. 정말 그러한가? 혹은 충동만이 사랑이라고 오도하는 것은 아닐까? 권태는 달리 말하면 익숙함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게 되어있다. 유리가 언제까지고 그렇게 단단하게 있을 것만 같지만, 사실 유리는 항상 흘러내리고 있다는 이야기처럼, 모든 것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이완되기 마련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인류학자 헬렌 피셔(Helen Fisher, 1945-)는 1998년 《휴먼 네이처 (Human Nature)》에 게재한 「포유동물의 번식에 있어서의 갈망, 끌림, 애착 (Lust, attraction, and attachment in mammalian reproduction)」이라는 논문에서 인간을 포함하는 포유류의 사랑은 갈망, 끌림, 그리고 애착의 삼 단계로 나누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사랑의 첫 번째 단계인 갈망(lust) 단계에 접어든 포유류는 주로 안드로겐과 에스트로겐이 분비된다. 이러한 호르몬의 작용으로 인한 결과, 어떠한 대상인지는 크게 상관없이 성적 만족에 대한 갈망(craving for sexual gratification with any conspecific)이 일어나고, 이는 성적 접촉에 대한 충동(sex drive)을 이끈다.

두 번째 단계인 끌림(attraction) 단계에서는 카테콜아민(catecholamines) 계통의 호르몬인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 펜에틸아민(Phenylethylamine, PEA), 그리고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이는 크게 관심(attention)과 집착(obsession)으로 대표되는 유쾌한 기분(feelings of exhilaration)이 드는 것을 비롯해 상대가 거슬릴 정도로 자꾸만 떠오르거나("intrusive thinking" about a mate), 상대방과의 감정을 교환하기를 열망(craving for emotional union)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이 주는 강렬한 행복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약해지고 마지막 세 번째 단계인 애착(attachment) 단계에 이르게 되면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이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호르몬들의 작용은 모성애(parenting)적 사랑과도 유사한 것으로 대상 간의 긴밀한 사회적 접촉(maintenance of close social contact)을 유도하며, 이러한 관계로부터 침착함(calm), 편안함(comfort), 그리고 감정적 합일(emotional union) 등을 제공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꽃같은 것만을 사랑으로 생각하고는 하며, 그 불씨가 꺼지게 되었을 때 어쩔 줄 몰라 하곤 한다. 애착 관계의 편안함보다는 사그라든 열망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보여 불안해지고, 사랑이 이제는 새로운 형태로 변화했으며 다음 단계로 옮겨 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는 하는 것이다.

작중에서 입원한 자리는 더웨이에게 말했다. 그런 권태를 이겨내는 것이 '우리가 예전에 학교에서 본 그 어떤 시험보다도 어려웠(比我們以前在學校裏任何考試都難)'다고.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연인들은 언젠가 그러한 순간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을 극복할 때, 비로소 사랑은 마지막 성숙을 이룬다.


조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자썬은 더웨이를 믿어주겠다는 자리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극 중에서 자리가 자신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집을 나간 것도, 더웨이를 선택한 것도, 그를 믿어주겠다는 것도, 끝끝내 그를 찾지 않은 것도 모두 그녀의 선택이고, 선택에는 언제나 믿음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벽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이러한 면모는 그녀의 야반도주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그녀가 정말 자신의 선택을 신뢰했다면, 자신이 하는 일이 정말 옳은 일이라고 믿었다면, 떳떳하지 못하게 도망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감은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녀는 부모님께 자신의 선택을 말할 자신감이 없었고, 그건 결국 자신의 행동에 그만큼의 믿음이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금 더 단어의 뉘앙스적인 측면에서도 파악해 보자면 자썬이 말한 믿음의 원문은 신임(信任)이다. 신임은 믿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맡기는 것, 혹은 그럴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신임이다. 자리는 결혼 후 사회적인 측면 대부분을 더웨이에게 맡겼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그녀의 사회적 관계망을 파괴했다. 쓰러져 입원한 자리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간호사를 친구 옌옌으로 착각해 "너 같은 친구는 이제 너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我只剩下你這麼一個朋友了)"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녀의 단절되어버린 사회적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자썬이 시간과 함께 잊혀가는 것처럼 그녀도 잊히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개인이 아닌 더웨이에게 예속된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종종 성장은 우화에 비유되고는 한다. 나는 자리라는 캐릭터에서 그러한 변신의 메타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 결혼 생활, 여인으로서의 성숙이라는 세 가지 단계, 이는 각각 애벌레, 번데기, 나비에 대응될 수 있겠다. 생기 넘치던 애벌레는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한 채 고치 속에 들어가 마치 무생물과도 같은 시간들을 보낸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지나면 고치 속에서는 마법 같은 변화가 일어나, 그 끝에는 고치를 찢고 나오는 한 마리의 고고한 나비의 탄생이 기다리는 것이다.

자리의 인생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생기 넘치던 대학생 시절의 자리는 더웨이와 결혼하고, 이후 직장 생활까지 그만두며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여기서 집은 고치다. 더웨이가 보기에는 마냥 편안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공간. 그 속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자신과 그 주변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고, 성숙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더웨이가 그날 그 해변에서 사라지고, 웨이칭은 아마도 그날 소녀는 여인이 되었으리라고 말한다. 자신과 헤어져 일터로 향하는 자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자리는 당대 여성을 은유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결혼 후 남편에게 예속되어 살아가는 삶. 자신에 대한 신임을 잃고 타인인 남편을 맹목적으로 신임하는 삶. 에드워드 양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을 조명하며, 그들을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남편의 실종, 그것은 자리에게 있어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자아가 수복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웨이칭은 더웨이가 그 해변에서 익사했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녀가 해방되었으며 나비로 우화하였다는 사실이니까. 아차이가 그가 진짜 죽었던지 살았던지 어찌 되었든 간에 결과는 크게 차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더 이상 남편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을 믿어야만 하는 상황, 그런 상황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도 더웨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증은 남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는 정말로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수줍음이 가득한 미소와, 어리숙한 첫 키스의 장면,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풀이 죽고, 회식자리에서도 혼자 조용한 모습. 더웨이는 소심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한 사람이 일부러 편지를 바꾸어 넣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자신을 고해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자신의 죄를 고한 이후로도 모종의 이유로 그는 샤오후이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계속해서 눈더미처럼 불어났을 빚과 횡령한 공금 또한 소심한 그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자리가 사구를 올라갈 때, 잠수부가 무언가를 발견했음에는 틀림없다. 분명 그것은 익수자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육신의 주인은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린자썬 역을 맡은 가오밍홍(高鳴鴻)과 샤오후이 역의 옌펑자오(顏鳳嬌) 등 많은 배우들의 정보를 구글이나 시나 등 검색 플랫폼에서 찾을 수 없었다. 특히 가오밍홍은 출연작 또한 이 작품 하나 뿐인데, 그의 훌륭한 연기력이 참 아까워지는 대목이다.


P.S. "자신을 신뢰하는 순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라는 파우스트의 대사는 흔히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하지만, 사실은 극 중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취하기 위해 그를 현혹하는 장면이다. 진실과 거짓이 교묘히 섞였을 때 거짓말은 한층 더 완벽해진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또 거짓인지 판단은 독자의 몫이겠다.


관람 일자


2024/01/15 - 메가박스 ARTNINE 9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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