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 다른 뜻

말의 뜻은 그 말이 가리키는 ‘뜻’과 ‘그 뜻’이 ‘아닌 것’이다.

by 인레트르

세 사람이 모여 바다의 노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말합니다.


“노을이 빨갛다.”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노을이 노랗네.”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노을이 누르스름하다.”


이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대상을 본 것일까요?


주말에 가까운 곳에 놀러 가기로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부부끼리 오붓한 시간을 기대했고,

남편은 피곤했지만 아내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함께 가기로 합니다.


그날 아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말합니다. “비가 온다.”

남편도 말합니다. “비가 오네.”

하지만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하면서도 전혀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아쉬움과 함께 “그래도 가자”는 마음,

남편은 “비가 오니 가지 말자”는 내심의 기대.

같은 말을 했지만 같은 뜻은 아니었습니다.


라캉은 기표 아래에서 기의가 미끄러진다고 하였습니다.

기표는 문자나 소리를 의미하고,

기의는 그 말이 불러일으키는 의미입니다.

같은 기표라도 주체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해석됩니다.


프로이트도 말이 가진 무의식적 이면을 세심하게 살피며

그 속에 담긴 주체의 욕망을 읽어냈습니다.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말합니다.


“정말 잘했어.”


한 학생은 고마운 마음으로 더 잘하고 싶다고 느끼고,

다른 학생은 “그냥 형식적인 말이지”라고 넘기며,

또 다른 학생은 “날 길들이려는 거야”라며 긴장합니다.

같은 말이지만 듣는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기의가 발생한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이런 미끄러짐은 발생합니다.

상사가 말합니다.


“요즘 고생 많지? 늘 수고 많아.”


직원 A는 위로로 받아들이고,

직원 B는 ‘퇴직 암시인가?’ 의심하며 불안해하고,

직원 C는 자신이 방치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말은 같지만, 주체의 위치에 따라 기의는 달라집니다.

한 집에서 자란 쌍둥이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똑같이 말합니다.


“넌 정말 대견하구나.”


형은 “기대에 부응해야 해”라며 책임감을 느끼고,

동생은 “형보다 내가 더 잘했다는 말이지”라며 경쟁심을 키웁니다.

같은 말이지만 각자 다르게 해석되고,

그 말은 무의식에 각기 다른 흔적으로 남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말이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내가 의도한 뜻은 이것인데,

상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말로 의미를 고정하려 애쓰지만,

말은 마치 독립된 주체인 양 제 갈 길을 걸어갑니다.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다르게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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