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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Feb 18. 2023

자본주의 쓰레기통에서 숨지다

다음 소희(Next Sohee, 2022)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요즘 조용히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영화가 있다.


단지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은 아니다. 보기엔 괴롭지만 그래도 이놈의 사회에서 꼭 봐야 한다고 느끼는 영화가 여기 있다. 돈만 있으면 화려한 삶을 살 수 있지만 흙수저로 태어나면 인간 취급을 못 받는 사회, 자본주의가 풍기는 썩은 내를 똑똑히 보여주는 영화가 지금 상영 중이다.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사회 시스템에서 우리는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소소하게 월급과 용돈을 벌어 소확행을 누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평등한 사회에서 산다는 착각을 보기 좋게 깨부수는 영화가 여기에 있다. 이 사회에서 '을'이라고 느끼는 모두가 분노하고 슬퍼하는 영화. 하지만 이 모든 감정을 견디고서라도 봤으면 하는 영화이다. 그래야 이 부조리한 사회가 조금이라도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쓰레기통,
콜센터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소희는 춤을 좋아하는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이다. 학교 선생님이 대기업이라고 추천하기에 어떤 콜센터 회사에 들어간다. 하지만 실습 첫날부터 소희는 당황스럽다. 고객들의 짜증과 항의를 받아내며 무표정하게 매뉴얼 대로 응대하는 직원들을 보며 일을 익혀나간다.


일은 만만치 않다. 콜센터라는 게 어떤 곳인가. 우리가 고객으로, 갑으로 대우받는 곳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 때 우리는 을이지만, 돈을 쓸 때는 갑이 된다. 을로 살 때 억눌러 왔던 스트레스를 갑이 될 때 쏟아낼 수 있는 공간. 이제 콜센터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네가 느끼는 온갖 스트레스를 배설하는 쓰레기통 같은 곳이다. 소희는 고객의 온갖 요청을 받아내는 욕받이가 된다. 그런데 소희가 일했던 해지방어팀이라는 부서에서 하는 일은 겉과 속이 다르다. 겉으론 고객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척하며 실제론 해지를 막아야 한다. 친구와 놀 땐 당당하게 할 말을 다 하고 밝은 아이였던 소희가 이젠 가면을 쓰고 일하는 법을 배웠다. 소희는 점점 싸움닭이 되어 간다.



갈라치기를
시도하는 갑


소희는 쉽게 칼퇴를 못한다. 정식 직원이 아닌데 야근을 밥 먹듯 한다. 어느 날 저녁엔 19금 농담을 시도하는 어떤 루저 고객에게 분을 이기지 못하고 격노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며 남자 팀장은 소희를 혼내지 않았다.


다음 날, 남자 팀장은 자동차 안에서 자살한 채 투서와 함께 발견된다. 팀장이 숨진 모습을 소희가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그러나 회사의 부조리한 행태를 고발하는 투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그대로 묻힌다. 또한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팀장 장례식에 못 가게 막고, 원래 팀장은 술, 여자 등 지저분한 문제가 있던 사람이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그뿐인가. 사측에서는 이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서류에 서명하도록 직원들을 강요한다. 소희는 끝까지 이 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희도 결국 사측의 압박에 굴복하고 만다.


그 후 소희는 미친 듯이 일한다. 에이스 자리에 오를 때까지 실적을 올린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기대했던 수준만큼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유인즉슨, 하도 그만두는 직원들이 많아서 한 두 달 있다가 지급한다는 거다. 새로운 여자 팀장이 부임한 후 저녁 회식 도중 소희는 다른 동료 직원에게 시비를 걸며 몸싸움을 한다. 싸움 도중 한때 에이스였던 동료로부터 실습생은 아무리 용을 써도 170만원 이상 못 받는다는 말을 듣는다. 이런 소동을 겪은 후 소희는 이제 고객의 해지 요청을 아주 쉽게 처리해 준다. 회사 방침과 다르게 대처하는 모습에 대해 여자 팀장이 다그치자, 소희는 격분한다. 고객 요청을 그대로 처리해 준 게 무슨 잘못이냐고.


이 일로 소희는 징계 처분을 받는다. 며칠간 회사에 출근을 금지당했기에 부모에겐 휴가를 쓴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와 술로 마음을 달래는 중 자해를 한다. 하지만 부모님은 당신들의 인생도 힘겨운지 딸이 힘들어하는 목소리를 듣고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재출근을 앞둔 전날, 소희는 친구들과 낮술을 마신다. 하지만 또래들도 모두 직장일로 바쁘기에 마냥 소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순 없다. 작은 구멍가게에서 소희는 다시 술을 시켜 마신다. 눈 오는 추운 겨울날, 삼선 슬리퍼에 맨발. 술동무였던 친구가 그 발을 보며 소희를 걱정한다. 잠시 후 혼자가 된 그녀. 눈앞에 저수지가 보인다.


다음 소희는
없어야 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누구 하나 내 탓이라는 사람이 없어


이 영화는 2017년 LG U+ 전주고객센터 'LB휴넷'에서 일하던 현장실습생이 자살한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당시 전주 콜센터 여고생의 죽음 이후 '감정노동보호법'이 만들어졌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몇 년 전에도 같은 회사에서 한 남자 직원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실도 밝혀졌다.


배두나는 소희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형사로서 그녀는 소희를 막다른 길로 몰아간 이가 누구인지 추적한다. 그러나 특성화고 선생은 취업률을 채워야 한다고 고충을 호소하고, 지방 교육청 직원은 자신도 중앙 부서에서 실적을 강요당하는 처지라고 하소연한다. 회사 측에서는 자신들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항변한다.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해.
아무도 신경 안 써



조직에서 실적을 채워야 하는 부속품으로 대우받는 이가 비단 블루 컬러(blue color) 노동자만일까. 자본주의는 겉으론 자유를 허용한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 그러나 돈이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자유. 자본주의 속 일상에서 우리는 갑과 을이 누구인지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소중하다. 스크린을 쳐다보기 괴로울 정도로 슬픔을 느끼지만, 사회가 바뀌려면 이 정도의 충격 요법은 필요하다. 생각 같아선 몇 백만 명은 보았으면 싶은 영화. 지금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3.07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fOdqlQRMzYFAsJ5hJN8H7Q==?uid=743e351dfb3f41898a3018d22148c7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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