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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Feb 26. 2023

사랑으로 고장 난 마음 고치기

창밖은 겨울(When Winter Comes, 2020)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래된 MP3처럼
고장 난 마음도 고칠 수 있을까요?


실연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어디 그리 고치기 쉬운가. 안 맞는 사람과는 재빨리 손절하고 환승이별하는 시대라고 해도 쓰린 속이 빨리 아물 수 있을까.


내 마음 깊은 곳에 들어왔던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떠나겠다면, 빈 공간을 청소하고 새로운 사람을 맞이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 공석우 버스기사도 마찬가지이다.



몽상가 청년의
느린 하루


어느 지방 버스터미널. 겨울 햇살은 꾀죄죄한 대합실 바닥 얼룩을 환하게 내리쬔다. 승객도 거의 없는 한적한 종점.


청년 공 기사는 운행을 마치고 다른 동료들과 식당에서 한 끼를 해결한다. 근무가 끝나도 지방 도시엔 놀 게 없다. 동료들이 휴게실에서 탁구 시합을 할 때 점수를 셈해 주고 식당에서 같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면 하루가 끝난다. 그런데 누가 대합실에 떨구고 간 MP3 플레이어가 그의 일상을 바꾸어버린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터미널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영애 씨. 예쁘장한 미모 때문에 웬만한 기사님들이 다들 구애를 해 봤나 보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우리 영애 씨. 그녀는 이제 곧 없어질 유실물 보관소 담당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 기사는 그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그런진 몰라도 그의 관심사는 MP3 뿐. 영애 씨는 이런 공 기사가 신기하다. 왜 고장 난 MP3를 굳이 가지려 하나?  비싸고 좋은 물건도 찾아가는 주인이 없는데.


뭐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잃어버린 척하려는 게 아닐까요?


알쏭달쏭한 공 기사의 말. 그는 영애 씨와는 다른 종족임이 틀림없다. 그나저나 공 기사의 동료인 최 기사는 겨울밤 길가에서 영애 씨에게 고백을 한다. 이 와중에 공 기사는 슬쩍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그 옆을 지나가기까지. 손바닥 만한 도시 길바닥에서 이런 일을 저지르니 동네방네 소문나는 건 시간문제다.


영애 씨를 향한 마음이 두더지처럼
불뚝불뚝 튀어 오르는 거를
어떻게 숨길 수 있겠씁니꺼?
숨기셔도 되는데예.


사랑 고백이 시골 된장만큼 구수하다. 송창식 노래 담배가게 아가씨가사에 나오는 총각처럼. 여자 앞에선 돌덩어리처럼 입이 굳어버리는 최기사를 보기 좋게 차버리고 영애는 공석우 기사에게 같이 MP3를 수리할 곳을 찾아보자고 한다.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수리법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MP3 플레이어 수리가 가능한 곳은 구글링 따위로는 찾을 수 없다. 영애 씨 어머니를 통해 물어물어 찾아간 어떤 수리점. 이 둘에겐 요술 가게나 다름없다.


말도 행동도 굼뜬 공 기사가 답답하니 이제부턴 영애 씨가 본격적으로 팔을 걷고 썸 타기 작업 시작! 거들떠보지도 않던 유실물이었지만 그녀는 폐기될 물건들을 자기 집까지 갖고 온다. 한 짐 가득 유실물을 손에 든 그녀를 집 앞까지 논스톱 버스 운전으로 바래다주는 공석우 기사. 마치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신기한 고양이 버스처럼. 영애 씨는 그의 유일한 VIP 승객이다.



겨울나기 하는 곰처럼

기다리다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취미는 탁구. 알고 보니 영애 씨는 중학교 시절 탁구선수까지 했고 공 기사도 탁구를 썩 잘한다. 연습시합을 해보니 둘이 제법 손발이 맞는다. 함께 지역 탁구대회까지 출전할 만큼 공기사도 서서히 영애에게 마음을 열지만... 하필이면 왜 이때 옛 여인이 이 남자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지.


겨울나기 하는 곰처럼, 실연으로 얼어붙은 마음이 녹으려면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에 진지한 사람은 말도 행동도 장난이 아니니까. 영애 씨를 향한 마음도 숙성할수록 맛깔난 발효음식처럼 무르익으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너의 나의 연결고리,
유선 이어폰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영애는 공석우 기사를 알게 된 후 조금 느리게 변했다. 그가 옛 연인에게 선물로 주었던 MP3는 고장 난 채 유실물로 되돌아왔지만 영애는 이걸 수리처에서 찾아온다. 겨울밤 그가 운전하는 버스에 다시 올라탄 영애 씨. 그녀 덕에 다시 살아난 MP3 플레이어. 한 귀에 한 짝씩, 유선 이어폰으로 같이 듣는 노래는 무엇일까?


어쩌면 또 다른 겨울이 찾아올 때쯤 지나간 추억이 불쑥 그의 마음을 후벼 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그가 그리 걱정되진 않는다. 언젠가 과거를 과거로 떠나보낼 수 있을 때쯤 겨울잠은 끝나리라.


영화를 보는 내내 ❬8월의 크리스마스❭가 생각났다.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겨울이면 꺼내봄 직한 오래된 물건처럼 가끔씩 생각날 것 같다. 이 영화, 왜 이리 따뜻한가. 감독님 신작을 기대해 본다.






*  글은 뉴스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3.06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fOdqlQRMzYFAsJ5hJN8H7Q==?uid=743e351dfb3f41898a3018d22148c7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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