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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Mar 08. 2023

살인보다 잔인한 전쟁 공포 게임, 러시안룰렛

디어 헌터(The Deer Hunter, 1978)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포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저주다.


호모 사피엔스, 총이라는 도구 사용법을 아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은 목숨이 위험해지면  다가올 고통을 상한다. 이런 예측력은 전쟁터에서 포로로 내던져진 군인에지옥을 선사한다.


이미지 출처: IMDb.com


죽일 때까지 죽일 듯 위협하다 다시 살려주기 곱하기 무한대. 이 게임에서 살인보다 잔인한 고문은 한 방에 살인을 끝내는 게 아니라 살려두고 공포를 주는 거다. 이 거대한 고문 방식이 전쟁의 실체가 아닐까?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저 유명한 러시안룰렛 장면을 기억한다. 리볼버 권총에 총알 한 개를 장전하고 목숨을 거는 게임. 어느 쪽에서 터질지, 누가 이길지 모른다. 모든 걸 운에 맡겨야 하는 미친 짓이다. 



품위 있는
사냥꾼이란


이미지 출처: IMDb.com


베트남전 참전을 앞둔 청년 마이클(로버트 드 니로 역). 그는 습관처럼 친구들과 사냥을 간다. 어느 날 퇴근길에 마이클은 하늘에 무리 해(mock sun)가 나타난 걸 보고 위대한 늑대가 사냥꾼에게 축복을 주는 신호라는 인디언 풍습을 떠올리며 사슴 사냥을 가야 한다고 외친다.


사냥은 일종의 전쟁이다. 특히 약자인 동물에겐 그렇다. 인간은 절대 죽지 않게끔 무기를 지닌 강자라서 이게 전쟁이란 걸 실감 못할 뿐이다. 사냥꾼에게 동물은 적이면서 친구다. 이런 역설(irony)을 마이클은 안다. 사슴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기기에. '너나 나나 살기 위해 전쟁터에서 마주한 친구일 뿐이야.'


품위 있는 사냥꾼은 생명을 존중한다. 그러기에 고통을 최소화해서 약자를 살생하려 한다. 내가 살기 위한 목적으로 상대를 죽여야 하고, 살생할 땐 한 방(one shot)에 보내주자. 이게 사냥꾼이 전쟁터에서 만난 동물에게 갖춰야 할 태도다. 내게 고기와 가죽을 주는 적이자 친구에게.


난 산에서 내 삶이 끝난다고 해도
괜찮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전 마지막 사냥에서 마이클은 목숨을 걸고 사슴과 만난다. 그러나 그는 운 나쁘게도 사슴을 한 방에 죽이지 못한다. 자연에서 한 때 그의 친구였던 사슴은 죽기 전 고개를 돌려 마이클을 바라본다.



공포 게임,

러시안룰렛


이미지 출처: IMDb.com


전쟁이란 인간이 느끼는 불안, 아니 불안을 넘어선 공포가 극대화되는 시간이다. 앞으로 벌어질 최악의 상황에 압도되면 누구든 미치광이가 되는 극한의 게임. 이 영화에서 러시안룰렛은 살인 도구가 된다. 베트남 군인들이 서양인 포로를 데리고 하는 생명 놀이인 셈이다.


다만 마이클은 이 공포 게임에서도 사슴을 본받고자 한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손에 총을 든 채 부들부들 떠는 친구에게 마이클은 외친다. 배짱을 보여주라고!


사냥을 다니며 정신이 단단해진 걸까. 마이클은 사슴이란 동물에게 자신이 닮고 싶은 모습을 본 듯하다. 위기가 닥쳐도 담대한 모습. 사나이로서 품위를 갖춘 자태. 이게 마이클이 원하는 자아상(self-image)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슴은 결국 동물이다. 총이란 도구가 뭔지 모른다. 저 쇳덩이가 위험한 줄 모르니 총을 봐도 동요하지 않을 뿐이다. 현실 전쟁에서 마이클처럼 공포를 견디는 용기 있는 인간이 대체 몇이나 될까.



악(惡)이란

공포를 무시하는 것



인류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살아왔다. 반대 세력 간에 부딪히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전쟁은 계속 있을 것이다.


다만 잔인한 역사로 꼽히는 전쟁에서는 인간성을 상실한 행위가 비일비재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731 부대에서 자행한 생체 실험, 꽃다운 처녀들을 위안부라는 성노리개로 착취한 행위, 유대인 수백 만 명을 인종 청소랍시고 말살한 기록. 모두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동물임을 망각하고 저지른 만행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상당수 전쟁은 예고 없이 일어난다. 대규모 살상 현장, 아비규환에 내몰리는 건 언제나 약자이다. 누가 알겠는가. 저 멀리서 지금 전쟁에 내몰린 우크라니아와 러시아 청년들이 불과 한 두 해 전에는  K-POP에 열광하며 미래를 꿈꾸던 학생이었을지. 어쩌면 전쟁을 외치는 자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제일 거리가 먼 위치에 있을지도 모른다. 베트남 전쟁 피해자는 두 나라 모두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다시,
사슴과 만나다


생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마이클에겐 동네가 익숙하고도 낯설다. 하늘로 향하는 두껍고 검붉은 불길. 철강공장은 계속 돌아간다. 사랑했던 여인 린다는 예전처럼 동네 마트에서 일하고 있다. 변한 건 자신뿐이다.


이미지 출처: IMDb.com


다시 떠난 사냥. 사슴과 마주했다. 사슴은 정면으로 마이클을 바라본다. 이건 죽음을 앞둔 걸 알았을 때 보이는 눈빛이 아니다. 그저 현재를 보는 눈, 죽기 전까지는 죽음이 뭔지 모르는 눈이다. 마이클도 사슴처럼 오직 현재를 사는 사나이로서 품위를 지키고 싶었을까.


마이클은 사슴이 아닌 허공에 총알을 한 발 날린다. 사슴은 도망치지 않고 천천히 자기가 갈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가 사슴에게 건네는 말.


괜찮아(OK).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서 유달리 호전적인 사람들이 있다. 무능한 지도층이 권력욕에 휩싸이면 자신들에게 향한 대중의 분노를 외부로 돌리려고 정치적 시도를 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형제국 적은 우리의 적이다" 란 외교적 실언을 내뱉어 갑자기 이란이 한국에게 적이 되어버린 일은 바로 얼마 전 우리에게 일어났던 현실이다. 


이런 이들은 상대가 자기 말을 듣지 않을 때 아주 쉽게 힘의 논리를 외친다. 그러나 대개 리더는 전쟁에서 지휘만 할 뿐 실제로 전장에 내몰리는 건 결국 약자이다. 


자꾸 적을 외치는 자, 전쟁이 뭔지는 알고 있는가?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6.25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uaELvTBu_YLvC7wFtTDh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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