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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May 21. 2023

내 얼굴에 새겨진 자본주의 주름은?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 2022)

미간에 자리 잡은 가로선, 그 아래 콧등이 시작되는 움푹한 지점을 마음속으로 이어보자. 삼각형 모양이 된다. 바로 세월이 만든 주름이다. 미간을 좁히며 찌푸리면 이마 가운데 아래 자리잡은 이 주름을 아주 쉽게 느낄 수 있다. 힘겹게 살아온 누군가에겐 이 삼각형 모양 협곡이 깊게 파일 것이다. '슬픔의 삼각형'이라는 주름 모양이 미용 업계에서 쓰는 말이란 걸 이제 알았다.


주름 이름이자 이 영화 제목이기도 한 <슬픔의 삼각형>. 202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작품을 보다 보면 저절로 서양판 <기생충(봉준호 감독)>이란 홍보 문구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얼굴이라는
산맥


이미지 출처: IMDb.com


얼굴엔 생각보다 힘이 꽤 들어가 있다. 나도 모르게 난 매 순간 얼굴 근육 긴장을 바꾼다. 세련된 미소를 지을 때 입가엔 얕은 골짜기가 파이다가도 짜증이 나면 순식간에 얼굴 위 살점은 새로운 주름을 만든다. 이 주름은 점점 짙고 깊어지며 골짜기가 되고, 산맥이 된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 고생길이었다면 비명과 찡그림은 얼굴에 고통이란 주름을 새길 것이다. 반대로 운 좋게 금수저로 태어나거나 떼돈을 버는 횡재를 했다면 여유 있는 미소가 만들어진다. 요즘 세상을 살면서 참 얄궂은 기분이 드는 건 이런 산맥 모양을 좌우하는 게 돈이라서다. '슬픔의 삼각형'이란 골짜기도 돈만 있다면 성형 시술로 밀어버릴 수 있다.



♡ '좋아요' 병에
걸린 연인


이미지 출처: IMDb.com


모델 겸 인플루언서 커플인 칼과 야야. 칼은 모델답게 오디션 때 고객이 원하는 미소를 지어야 한다. 미모를 자랑하는 야야는 일상 속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짭짤한 이득을 얻는다. 다양한 협찬을 공짜로 받을 수 있으니 사진 찍는 건 결국 돈벌이다. 그러니 이런 SNS 놀이에 점점 중독될 수 밖엔 없다. 이 둘은 레스토랑에서 음식값을 누가 내느냐로 조용히 다투는 찌질한 면도 있지만 결국 서로 죽이 잘 맞는다. 야야를 예쁘게 찍는 사진사이자, 육체적 매력을 발산하는 남자친구 칼. 칼보다 더 돈벌이가 좋은 야야. 둘은 서로에게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공생 관계이다.




얼굴에 새겨진
자본주의 미소


이미지 출처: IMDb.com


둘은 이번엔 호화 크루즈 여행을 무료로 협찬받는다. 그런데 탑승해 보니 거기엔 평소 만나보기도 힘든 거부들 뿐이다. 어느 정도냐면 사진을 한 장 찍어주니 감사 표시로 술 한 잔 대신 명품 시계를 남발하는 수준이다. 칼과 야야뿐만 아니라 모든 크루즈 직원들이 고객들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여주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직원들은 실제 얼굴 주름을 잠시 펴고 항상 미소를 유지하도록, 고객 말에 'No'란 없음을 교육받는다.


네, 손님!
(Yes, Sir!  Yes, Ma'am!)


크루즈에 탑승한 고객들은 또 어떤가. 모두 윤택한 삶에 만족하는 이들뿐이다. 그들 얼굴에 베인 주름이 만드는 밝은 미소. 그저 여유가 느껴질 뿐이다. 유흥을 즐길 때 활짝 웃을 때면 이들 얼굴에 새겨진 주름들은 탄력을 받아 탱탱한 미소가 된다.

   


허례허식 끝판왕,
선장 만찬


이미지 출처: IMDb.com



척 봐도 알코올 중독자로 보이는 선장(우디 헤럴슨 역)은 술김에 악천후가 예상되는 날 선장 만찬을 감행한다. 비싼 옷과 장신구로 멋을 낸 손님들은 흔들리는 배 안에서 억지로 미소를 치장한 채 멀미를 참는 중이다. 하지만 폭풍우는 심해진다. 그리곤 결국 손님들은 염치불구하고 화려한 식탁 앞에서 구토를 시작한다.


승객들이 입에 화염방사기를 단 듯 발사하는 오물들. 화장실이 급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 이들에게 체면이라곤 없다. 낯선 동반객 앞에서 예의를 차리던 손님들이 뿜어대는 오물들을 씻어내는 건 결국 직원들 몫이다. 화장실 똥물도 넘쳐흐르며 우리 웃음도 폭발하지만 동시에 서러워진다. 이 화장실 개그가 현실이라면 난 어디에 속할까.


사회주의자이자 떡이 되도록 만취한 선장과 '돼지' 같은 러시아 부호는 술이 술을 부르는 명언 게임을 하며 돈이 깡패인 이 세상을 비웃는다. 그런데 이 부분이 참 작위적이다. 영화가 담은 주제를 직접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감독 의도가 좀 유치하게 느껴진다. 이미 영화를 즐기며 관객들은 다 알 수 있어서다. 돈이 우리를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진 자는 못 가진자를 가축처럼 부려먹는다는 사실을. 두 사람 입에서 끝없이 튀어나온 명언 중 그럴싸하게 공감되었던 문구는 공산주의자 칼 마르크스가 했던 말이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세상이 이 말처럼 되어야 공평하지 않을까? 가진 자들이 무한정 지배하는 세상을 저주하며 혁명을 꿈꾸었던 이상주의자, 칼 마르크스가 이렇게 다르게 보이다니.




외딴섬에서
뒤집어진 계급


이미지 출처: IMDb.com


결국 크루즈는 폭풍우 속 해적단을 만나 표류한다. 살아남은 승객들과 종업원들은 이제 집단형 로빈슨 크루소 식 생존을 시작한다. 배에선 가장 밑바닥 직종이었던 화장실 담당 에비게일. 그녀는 문어도 잡고 불을 피울 수도 있으니 이젠 당당히 자기가 리더임을 주장한다. 배 위에선 직원들에게 갑이었던 갑부들은 을로, 자본주의 피라미드에서 제일 밑바닥이자 을이었던 에버게일은 갑으로.


뒤집어진 계급 구조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칼과 야야는 저절로 갈라진다. 칼은 에버게일에게 19금 서비스를 제공하며 안락한 공간을 확보하고, 야야는 칼에게 핀잔을 주며 이 둘은 아주 쉽게 헤어진다.


그런데  계급 서열에 다시 반전이 일어난다. 무인도라고 여겼던  섬이 사실은 거대한 리조트 공간이었던 것이다. 문명사회를 벗어났다고 믿었던 이들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짝퉁 명품을 팔러 다니던 잡상인을 만나, 에버게일과 야야가 섬을 탐험하던  엘리베이터를 발견하며 이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가려 한다. 에버게일만 빼고.


결말은 또다시 <기생충>이 떠오르는 방식으로 치닫는다. 그녀가 손에 쥔 권력을 뺏기지 않으려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극장에서 만끽해도 좋다. 결말을 보며 저절로 내 얼굴엔 복잡한 미소가 생길지도 모른다. 쓴웃음과 함께 다가오는 이 씁쓸한 기분은 뭘까. 어느새 내 얼굴에 옅은 주름이 또 하나 생길지도 모르겠다. 돈이 우리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현실에서 냉소 섞인 미소 주름이.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5.21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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