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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May 03. 2023

스파이라도 숨길 수 없는 양조위의 식욕 변화

무명(Hidden Blade, 無名, 2023)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얼마 전 개봉한 이 영화, 아직 한 주도 안 지났건만 상영관이 급격히 줄어드는 듯해서 급하게 글을 쓴다. 눈빛 만으로도 소리 없이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배우, 자그마치 양조위가 출연하는 영화다. 그것도 정장 차림의 멋진 스파이로. 그래서 일단 눈호강이 된다. 그리고 꽤 재미있다.


〈무명〉은 중일전쟁 중 친일 국민당 정부와 중국 공산당 간 대립이 치열했던 시점, 1940년대 초부터 일본이 멸망하기까지를 다룬다. 참고로 양조위가 출연했던 또 다른 시대물 〈색:계〉 배경과 같다. 우리처럼 일제 만행을 경험한 민족이라면 친숙한 역사물이기에 공감대도 컸지만 스파이역 양조위가 먹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주요 배역들은 스파이다. 겉과 속을 달리하며 정체를 숨겨야 하는 직업. 스파이가 직업 활동을 하는 모습은 근본적으로 '연기'다. 하지만 먹는 습관도 철저한 연기가 가능할까? 식욕이란 본능은 세련되게 재단하기 어려운 법. 이 영화에선 음식을 먹을 때 뜬금없이 인물 간 긴장감이 팽팽해진다. 내가 양조위 팬이기에 그가 인상 깊었던 몇 장면만 끄적여본다.



음식을 씹듯
여유 있는 물 마시기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허 주임(양조위 역), 그는 일본에 대항하는 비밀 스파이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고 상하이를 점령하며 이 땅에선 비밀 결사 조직이 생겨난다. 허 주임은 정체를 감춘 채 일본 조직 내 침투한 요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첩보 작전 중 누군가를 기다린다. 모처에서 긴장에 압도된 어떤 남자를 만나 심문을 시작할 때, 그는 말 수를 줄이고 천천히 물을 마신다. 시간 여유를 충분히 가지고 입을 쩍 벌려 마치 음식을 씹어먹듯 컵에 담긴 물을 꿀꺽 들이켜는 모습. 보다 보면 참 물을 맛나게도 먹는다 싶다. 물컵을 든 손이 벌벌 떨리는 상대와는 달리 파워 게임(power game)에서 여유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식욕이
마비되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허 주임은 일본인 와타나베 경관(히로유키 모리 역) 밑에서 친일파인척 자신을 속이는데 유능하다.

전쟁 시국을 논의하며 식사 도중 와타나베는 갑자기 허를 찌르는 질문으로 허 주임의 폐부를 찌른다.


평소에 이렇게나 조금만 먹나?


식욕은 노련하게 감추기 어려운 사람의 속내를 보여준다. 와타나베와 허 주임 사이에 흐르는 정적. 와타나베는 허 주임의 식성이 현실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낌새다. 긴장감이 높아지면 식욕은 마비된다. 뭔가에 초집중할 때, 하등 먹을 이유가 없을 땐 식욕은 목표 달성에 방해만 될 뿐이다. 허 주임은 호흡을 고르며 생각해 본 대답을 내놓는다.

잘 모르는 음식이라서요.


눈앞에 놓인 맛깔난 일식 정찬을 가린다는 건가. 일식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인가, 일본을 잘 모르겠다는 말인가. 와타나베는 의심의 눈초리를 잠시 더 고정하다 너털웃음을 곁들인 농담으로 이 상황을 마무리한다. 허 주임이 좀 더 다양한 요리들을 접해야겠다고.



디저트로
알리바이 만들기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이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음식은 긴장을 유발하는 장치로 쓰인다. 서양 디저트를 파는 양과점. 일본군을 몰아내려는 상하이 비밀 조직 스파이들은 이곳을 접점으로 삼는다. 누구와 함께 먹는다는 건 그 사람에게 내 사적인 습관, 성격을 노출하는 행위다. 허 주임은 능수능란하게 같은 민족을 심문하는 등 친일 역할을 잘 해내지만 와타나베는 그를 쉽게 신임하지 않는다. 행적을 알기 어려운 순간을 포착하자 또 한 번 허 주임을 코너로 몰아간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음식을 쉽게 구하기 어려워서요.


허 주임에겐 또다시 유연하게 대답할 만한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잠시 후 그는 답한다. 아는 가게에서 디저트를 사 왔다고. 와타나베가 그게 어디 있냐고 따져 묻는 순간, 정체가 탄로 날 듯한 공포를 느끼는 건 관객 몫이다.


중요한 일을 하는 와중에 디저트라니. 디저트란 잉여로 즐기는 음식이다.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만 비로소 즐기는 음식. 과연 허 주임은 케이크를 단골 가게에서 찾아 먹을 정도로 식도락가였던가. 모르는 음식은 멀리한다면서. 와타나베는 허 주임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다.




고향 음식 앞에
나를 노출하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어떤 음식을 누구와 어디에서 먹는가는 한 사람에 대해 많은 걸 알려 준다. 친일파로 와타나베에 충성하는 예 선생(왕이보 역). 사실 그는 공산당 재건을 지지했던 이중 스파이였다. 그는 2차 대전 후 일본이 멸망하며 홍콩으로 넘어온다. 이후 홍콩 유민들에 섞인 채 그림자처럼 살아가던 중 어느 날 고향 음식을 팔던 어떤 식당에서 맛깔나게 식사를 한다.


그걸 보고 본토 출신인 식당 여주인은  선생에게 어디 출신인지, 어떤 지방 누구를  아는지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질문을 건넨다. 의도치 않은 현장 심문 비스무리한 장면이다. 이런 순간마다 관객은 심장 쫄깃한 긴장을 늦추기 힘들다.


대체불가 배우 양조위가 아니라면, 그리고 떠오르는 중화권 스타 왕이보가 아니라면 그냥 평이한 첩보물 누아르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시간 순서를 뒤죽박죽 만들어 놓은 전개 때문에 역사적 배경을 모른다면 줄거리를 따라가는 게 살짝 버거울 지도 모른다. 후반부 에필로그 식으로 덧붙여진 서사들은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생각지도 못하게 음식과 연관된 상황들이 만들어내는 긴장을 즐기는 게 쫄깃한 재미를 준다. 또한 양조위가 환갑 나이에도 온몸을 던지며 찍은 격투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즐길 거리다.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5.03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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