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녹색광선 Jul 20. 2023

예쁜 여자 인형이 세상에서 처음 느끼는 조울증

바비(Barbie, 2023)


12세 관람가인데도 이 영화는 꽤 철학적인 냄새가 풍긴다. 휘황찬란하게 예쁜 화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며 눈호강을 시키는데도 영화가 풍기는 메시지는 꽤 묵직하다.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질문하는 영화, 인간 실존을 다루면서도 가족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밝고 쉽게 만들려고 한 영화. 그래서 신기하다.


여자 아이가 있었던 이후로
언제나 인형이 있었죠.



이 세상에 아름다운 걸 싫어하는 여자는 없는 법. 고만고만한 인형을 갖고 놀던 여자 아이들이 바비를 발견하자 갖고 놀던 인형을 내팽개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스탠리 큐브릭 감독)❭를 재미있게 패러디한 장면이 이어진다. 유인원 뼈다귀 취급을 받는 기존 인형들이 점점 진화해서 드디어 세상 최고로 예쁜 첨단 인형, 바비가 탄생했다..!


(아래부터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바비가 사는 천국,
바비랜드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모든 게 온통 예쁘기만 하다. 집도, 사람도, 차도, 물건도 예쁜 것 투성이다. 예쁘지 않은 건 이곳에 낄 자리가 없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매일매일이 즐겁다. 오직 행복한 사람들만이 사는 곳.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이 영원히 행복할 거라 믿는 곳, 여긴 바로 '바비랜드(Barbie Land)'이다.


안녕, 바비
(Hi, Barbie).

안녕, 켄
(Hi, Ken).


여기엔 수많은 바비와 남자친구 켄이 모여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들은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곧바로 즐겁게 논다. 낮에는 해변에서 서핑을, 밤에는 흥겨운 댄스와 파자마 파티를. 이들은 마음이 붕~ 들뜬 채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웃고 떠들며 논다. 바비와 켄이 현실에 산다면 조증 진단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온통 행복 투성이인 이곳에서 갑자기 바비에게 문제가 생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행복해야 할 바비 마음속에 죽음이란 단어가 스며들면서부터다.


죽음 생각은 다시는 안 해!


바비는 당황한다. 몸에는 셀룰라이트가 갑자기 생겼다. 예쁜 하이힐 만을 신도록 발뒤꿈치는 항상 높게 들려 있어야 하는데 어느 날 발바닥이 평평하게 땅에 닿아 버렸다. 항상 예쁜 모습으로 꾸미고 즐거워야 할 바비 일상에 위기가 닥친다.



바비 마음이
오작동하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행복한 채 영원불멸히 사는 것. 이건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다. 이 영화는 쉽고 영리하게 이런 실존적 고뇌를 동화로 풀어놓는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만큼 죽음이 생각보다 내 곁에 가까이 있음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치 티끌만큼도 불행이 없었으면 하는 바비처럼.


그런데 바비는 자기 몸에서 노화의 징조, 셀룰라이트를 보았다. 죽음이 내 몸에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를 확인했기에 바비는 어떻게든 다시 행복해져야만 했다. 원인을 살펴보니 원래 인형 바비를 갖고 놀았던 현실 속 여자 아이가 우울의 늪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동화를 벗어나
현실에 뛰어들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바비는 자신을 갖고 놀았던 여자 아이를 찾기 위해 현실로 나선다. 그런데 바비는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바비는 항상 누구에게나 환영받았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반겨줄 거라 믿었던 이 여학생은 바비를 외모지상주의를 대표하는 파시스트라고 매섭게 비판한다.


바비는 좌절이라는 걸 처음 맛본다. 현실에 오니 인간관계에서 갈등이라는 것도 처음 경험해 보았다. 자신을 갖고 놀았을 법한 여학생에게 정면으로 지적을 받으니 바비는 눈물을 흘리며 우울해진다. 천국 같은 바비랜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바비가 이런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는 과정은 마치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우리가 해오던 역할 놀이를 떠올려보자. 내가 무슨 주인공을 맡던 놀이 결말은 "그래서 결국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였다. 하지만 성인이 되며 우리는 세상살이가 이런 놀이와는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바비가 처음 느낀
실존적 우울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며 동화와 현실은 다르다는 걸 아는 순간. 우리는 우울을 느낀다. 항상 내 뜻대로 세상이 굴러가지는 않기에 우리는 나이가 들 수록 좌절을 맛본다. 내가 원하는 만큼 예뻐질 수는 없고, 내 뜻대로 날씬해지기도 어렵고, 사회생활 중 누구에게 하고픈 말을 다 하기도 어렵고, 실컷 돈을 쓰고 싶지만 가끔은 쪼들리며 살아야 한다. 커갈수록 우리는 우울을 피할 수 없다.


바비도 이런 실존적 우울을 느낀다.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를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생기며 현실에선 항상 행복하고 예쁜 모습으로만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바비는 혼란스럽다. 행복하지 않은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 모습은 하나가 아니야,
만화경처럼 다양해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어쩌면 우린 계속 현실에서 동화를 꿈꾸며 사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 난 몸과 마음이 오작동하는 바비 상태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행복하지 않은 내 모습을 바라보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매일 기쁨만 느꼈으면 좋겠는데 슬픔처럼 어두운 감정도 알게 된 바비에게 현실 속 친구는 진실한 조언을 해준다. 우린 모두 완벽하지 않다고.


우린 바비와는 다르게 몸도 마음도 오작동하는 모순덩어리다. 영화 속 바비는 좌절과 쓰디쓴 감정들을 경험하면서 인형에서 인간으로 거듭난다. 자기 마음속에 만화경처럼 다양한 모습이 있음을 현실에서 깨달아 버린 것이다.


바비는 항상 미소만을 짓는 역할 놀이 인형으로 남는 대신 자기 마음속에 만화경처럼 다양한 모습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작)❭ 제목을 인용한 영화 속 대사처럼 바비는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았다. 행복하지 않았던 순간을 외면하기보단 자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곤 말한다.


맞아,
난 우울하고, 이상하고, 미쳤어!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완벽한 인형이 아니어도 된다. 우린 어차피 희로애락을 다 느끼며 비효율적으로 사는 존재이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도 우린 여전히 소중하다.






감독 : 그레타 거윅

주연 : 마고 로비(바비 역), 라이언 고슬링(켄 역).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영화관심_Kino Psycho] 2023.07.20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https://m.oheadline.com/articles/luL9dZj0NuF5APmMdPiZwA==


매거진의 이전글 카우보이 영웅, 일생의 모험을 마무리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