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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Sep 19. 2023

갑질 횡포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분노를 관찰하다

미디어관심 - 초등학교 교사 사망 사건 보도를 접하며.

서이초 및 대전 초등학교 교사 사건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는 분노가 들끓고 있다. 이 사건들에 대해 사람들이 분노하는 모습은 마치 용암이 폭발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미처 분출하지 못한 마그마가 지면 아래에서 들끓다가 용암이 되어 분출하는 모습처럼 오랫동안 쌓인 분노가 거대한 폭발을 시작했다.


교권 침해와 관련한 교사 사망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며 우리는 시시각각 속보 형태로 관련 소식을 접하고 있다. 이런 뉴스들을 접하다 보면 일부 새로운 정보를 흩뿌리기 식으로 노출시켜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기도 한다. 그런 말초적인 낚시 보도 외에 사람들이 이 비극적 사태에 분노하는 이유는 좀 더 근본적인 데서 찾아봐야 한다.



'갑질'이란 단어에 한국 사회가 공분하다


원본 이미지 출처: Unsplash의 sean Kong


초등 교사들의 비보가 뉴스로 전해지며 많은 사람들은 일부 몰지각한 학부모들이 교사들에게 소위 갑질을 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현재 이런 정황은 아직 상세한 사실 관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이 추정된다는 뉴스 자체로 분노에 휩싸였다. 교육계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화'라는 감정에 이입이 되며 일선 교사들의 입장에서 공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건을 설명할 때는 '갑질'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사회에서 소위 자신이 '을'이라고 여기는 힘없는 사람들은 이 단어에 특히 민감했다. 이미 오늘날 교사는 일종의 서비스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런데 이 사회에 사는 서비스직이 비단 교사뿐인가?


오늘날 고도로 산업화된 한국 사회에서 제조업이나 농업 등 육체노동을 하는 일부 생산직, 혹은 미성년자 및 학생 등을 제외하고 대다수 직장인들은 서비스직에 종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센터 근로자처럼 감정 노동을 하지 않더라도 많은 직업인들은 결국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유/무형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화이트&블루 칼라 직종을 가릴 것도 없다. 이런 서비스직 입장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클 때는 바로 그 누군가가 권력을 행사하며 소위 갑질을 할 때이다.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는 업종은 넓은 의미로 서비스업이다.


2014년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 2017년 콜센터 현장실습생 사망 사건 등 힘없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이 갑질 횡포를 당한 일들도 뉴스 보도가 되며 사회적 울림이 컸다. 최근 연이은 초등학교 교사 사망 사건 또한 한국 사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자식이 없더라도, 교육계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힘없는 자, '을'로서 '갑'에게 느낄 만한 설움에 동화되었다. 그리고 이 분노의 불길은 당분간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서비스직으로 전락한 교사


이미지 출처: unsplash.com


오늘날 학교란 더 이상 삶을 사는 철학과 인격을 다듬는 터전이 아니다. 초등학교부터 공교육 현장은 학생이 입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학업 경쟁력을 키우는 곳으로 바뀐 지 오래다. 입시 경쟁이 과열될수록 학교라는 곳은 공부 기술을 가르치고 성적을 높이는 훈련소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교사의 정체성도 변화했다. 이제 학생과 학부모는 학교 교사에 대해 '스승'이 아닌 일종의 '학습 기술자', 혹은 '학교생활 감독자'처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학생들은 사설 학원 강사와 학교 교사의 역량을 비교하며 교사를 무시하는 풍조가 완연하다. 일부 몰지각한 학부모들은 교사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을 쓸 뿐, 거침없이 도를 넘어선 요구를 하는 게 자연스럽다.


서비스 직종은 고객을 만족시켜야 한다. 교사들은 정기적으로 수업만족도와 학부모만족도조사 대상이 된다. 물론 이런 조사를 하는 취지는 교사들이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런 설문은 일부 학생이나 학부모들에겐 교사에게 평점 테러를 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 이런 부작용을 방지하면서 교사가 존중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상처받은 '을'이 느끼는 두 번째 감정, '분노'


분노는 우리가 2차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즉, 우리는 뭔가에 화를 내기 전 다른 기분을 먼저 느낀다. 이 기분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너무 순식간에 내 마음속을 스치고, 또한 우리가 심적으로 연약할 때 느끼기 쉬워서이다.


보통 분노로 무장하기 전 우리는 수치심, 당혹스러움, 모멸감 등 불편한 기분을 먼저 느낀다. 이 기분은 내 자존감이 상처를 받았음을 일깨워주는 알람 신호와도 같다. 그다음 우리는 상처 입지 않기 위해 분노로 무장한다. 지금 교사들이 느끼는 분노와 슬픔에 이 땅에서 스스로 '을'이라고 여기는 수많은 약자들은 연대의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 갑으로만 산다고 여기는 이가 몇이나 될까. 현재 초등 교사들이 악성 민원에 대해 느끼는 이 고통은 시민들에게 점점 보편성을 얻고 있다. 어쩌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을'들이 직종을 막론하고 지금 함께 이 사회 속 암묵적인 '갑'에게 분노하는 건 아닐까.




충격 사건에 대한 생중계 보도의 부작용


인터넷 기사 열람 전 화면 캡처


현재 이 사건에 대한 뉴스 보도 태도는 너무나 말초적이다.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으로 사람들의 화를 자극하기 쉽다. 특히 위와 같은 기사는 자살 또는 자해를 다룬 내용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에 저런 안내 화면까지 거쳐야 한다. 실제로 클릭해 보면 저 기사를 쓴 기자가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런 사건과 관련하여 지역 온라인 맘카페에 올라온 내용을 그저 받아쓰기식으로 옮겨 적었을 뿐이다. 실제 기사를 보기 전 저런 화면을 거쳐야 하지만 사람들은 호기심을 멈추기 어렵다. 궁금한 사람들은 기어코 클릭을 하고야 만다.


사람들은 어느 누가 잘못을 했는지 샅샅이 알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답답한 마음에 속도전 식으로 약간이라도 해당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짐작되는 사람이나 회사에 대해서는 뉴스뿐 아니라 SNS로 정보를 공유하려 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정보를 접해야 하기에 제대로 내용을 읽고 소화시킬 시간도 없다. 이번 사건처럼 너무나 사회적 파장이 큰 충격적 상황에서는 연이어 쏟아지는 자극적인 기사에 계속 압도되어 분노의 불씨가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기 쉽다.


물론 사건과 관련된 사람이나 기관들은 철저히 조사를 받고 책임 소재를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면밀히 조사가 이루어지려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사건 전개 상황에 대해 간단한 받아쓰기식 뉴스 보도가 이어질 경우 사람들이 느끼는 화는 더더욱 커진다. 불난 데 불쏘시개를 더하듯 자극적인 보도를 접하며 시민들은 더더욱 분노를 조절하기 어렵다.




강력해지는 마녀사냥식 복수욕


원본 이미지 출처: unsplash.com(Devi Puspita Amartha Yahya)


화를 참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반드시 분출구를 찾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 사건에 대해 약간이라도 책임을 따져야 한다고 짐작되는 대상에게는 저격식 공격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다만 현재 사건 조사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분노를 분출하는 정도가 광기 어린 실천으로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번져나가는 점이 걱정된다. 예를 들어 가해자가 점주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프랜차이즈 외식 업체는 가맹점을 모집할 때 점주의 정신 감정까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프랜차이즈 본사까지 저격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기획 기사가 아닌 이상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 구조적 원인에 대해 풍부한 담론을 담긴 어렵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심리적 충격을 받은 사건(트라우마, Trauma) 대해 SNS에서 언급했거나, 혹은 인터넷 카페에서 이야기가 오갔거나 하는 내용 그대로를 날것 그대로 퍼다 나르는  낚시 보도는 충격 사건을 재경험할 우려가 있는 이들에겐 매우 위험하다. 실제로 일선 현장에서 고통받으며 정신적으로 힘든 다른 교사들이 이런 기사들을 접하며 극단적 행동에 대한 충동을 느끼는  2차적 충격을 받진 않을까 걱정이다.


SNS 등 인터넷상에 돌아다니는 정보들이 뉴스가 감당하지 못하는 가치 있는 소식을 공유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건에 대해 사실 관계를 따져보아야 하는 '카더라' 식 사연들이 빠른 속도로 퍼질 수 있다는 위험 또한 크다. 언론이 하는 일은 바로 이런 민낯의 사실들을 팩트 체크하여 시민들이 올바른 상황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할은 오늘날 언론에게 기대하기 힘들다.




이 사건에 대해 학교 고위직, 혹은 일부 학부모 등 개인 차원으로 책임 소재를 밝힌다고 근본적 문제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련의 비보들을 이어 들으며 한국 교육계에 자리 잡은 고질적 병폐와 해결안에 대해 담론이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고인 및 가족 분들께 애도를 표하며.


 



https://m.oheadline.com/articles/OACL01ThgtRnx8L4bvN3TA==?uid=743e351dfb3f41898a3018d22148c7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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