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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Sep 22. 2023

우리 모두에겐 '눈치 제로' 백치미가 있었다

힙하게(2023, JTBC)

 작품  인물들은 다들 '백치미' 있다. 누가 보면 "살짝 맹한 사람", "어딘가 모자란 사람"이라고 말하기  좋다. 심리검사 결과로 치자면 "사회적 지능(Social Intelligence) 부족하군요."라고 평가할 만하다. , 내가 처한 상황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중인지 전후 맥락을 파악하고 교양 있게 대처하는 능력이 살짝 부족해 보인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현실이라면 소위 눈치 없다고 손가락질 받을 만한 병맛스러운 언행에 거침이 없다. 그런데 이런 막무가내 추진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인다. 내 마음 가는 대로 생기 있게 사는 모습. 이게 바로 이들의 매력이다.


삶의 현장에서 이렇게 백치미를 발휘했다간 나잇값 못한다고, 머리가 돌았다는 말을 듣기 딱 좋다. 우리가 실제로 이렇게 살기란 불가능하니 상상 만이라도 이들에 빙의한 채 킥킥대며 매 회를 지켜볼 뿐이다.



욕망 뿜뿜,
직진 히어로들!


수의사 봉예분 (이미지 출처: JTBC 홈페이지)


무진마을 주민들. 그중 주인공인 수의사 봉예분(한지민 역)은 호기심 만땅인 씩씩한 가장이다. 그녀는 돈냄새를 잘 맡는 이모 등쌀에 밀려 시골 농장으로 그토록 무서워하는 소 왕진을 나갔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맞는다.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소 뒷걸음친 격으로 예분은 ‘사이코메트리'라는 초능력을 얻는다.


그 후로 이 호기심 많은 처녀는 동네방네 만나는 동물이든 사람이든 무슨 노트북 터치패드 매만지듯 손으로 궁뎅이를 쓸어만지려고 한다. 어쩌다 얻게 된 희한한 능력 덕분에 동네 경찰인 문장열 형사에게 찍혀 ‘변태'란 별명을 얻지만 결국 그와 합심해서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역할을 해낸다.



무진마을 주민들 (이미지 출처: JTBC 홈페이지)


이 청년 형사는 또 어떠한가. 젊어서부터 출세욕에 눈이 멀었다. 서울에서 근무하다 시골 촌구석에 좌천되자 어떻게든 지역 정치인 등 잘 나가는 사람에게 줄 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주인공 봉예분과 단짝 친구로 자란 슈퍼집 딸 배옥희도 만만치 않은 자뻑 유전자와 약간의 폭력성을 타고났다. 평소엔 거친 언행을 서슴지 않다가도 남자에게 반하면 청순가련형 처녀를 연기한다. 상대가 출몰하는 지역에 터를 잡고 아코디언을 켜며 플러팅을 해대니 동네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숨기긴 글렀다.


그 외 조연들도 가끔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기꺼이 남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 하지만 지력이 모자란 탓에 이런 의도를 세련되게 감추질 못해 결국 들통나기 일쑤다. 신기라곤 없어 보이는 무당 맥아더장군님은 봉예분을 속여서 굿값을 받아내려다 덜미를 잡히고, 50만 구독자가 생계 수단인 BJ가 라이브 방송을 켜니 지역 정치인이나 경찰관들이 모두 관종이 되어 선한 미소로 돌변한 채 비디오에 얼굴을 들이민다.


공직자든 일반인이든 남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땐 언행이 거칠다가도 출세나 연애를 위해선 180도 바뀌는 모습, 이런 유치한 변신을 지켜보는 게 이 작품을 보는 재미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깔깔 웃다가도 왠지 씁쓸해지기도 한다. 사회에선 이런 위선자들을 매번 봐도 제대로 한 소리 하기 어려운 게 현실 아닌가.



'눈치 더듬이'를 키우니

어른이 되었다


이미지 출처: JTBC 홈페이지


줄 서기를 잘해서 보란 듯이 성공하고픈 출세욕, 좋아하는 이성에게 추앙받고 싶은 애정욕, 돈 냄새를 맡으면 놓치지 않고 쓸어 담고 싶은 재물욕. 너무나 유치한 욕망이 내 안에도 사실 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걸 티 내려면 체면이 구겨진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이런 행동을 감추지 않고 티 내던 시절이 있었다. 옛날 옛적이지만 나도 눈치 제로인 아이일 땐 이런 '백치미'가 있었단 말이다. 누가 나보고 귀엽고 예쁘다고 말해주면 대놓고 배시시 웃고, 또래에 비해 상식이 없어도 그게 뭔데? 하며 무식(無識)을 부끄러워하지 않던 때가, 이래도 사랑이란 걸 받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원하는 데로 뭔가가 안 풀리면 뗑깡 부리며 울던 그 나이엔 내게 버거운 일을 단순 무식하게 해결해도 큰 문제는 안되었다. 오히려 사회적 관습이나 예절이란 걸 모르고 실수를 연발하는 게 백치미가 아닌 순수한 아이 그대로의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내 안의 백치미 히어로는

누구였나요?


애석하게도 이런 백치미 매력은 아이일 때만 유효하다. 학교라는 데를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얼굴에 통통했던 젖살이 빠질 나이쯤 정규 교육을 받으며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익힌다. 이런 훈련을 통해 우리는 내 뜻대로 행동하려는 똘끼를 서서히 잠재우는 데 익숙해진다. 한 마디로 체면을 차리는 어른이 된 것이다. 이때부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건 귀엽게 봐줄 만한 언행이 아니다.


하지만 내 역할과 책임이란 무게감을 느끼며 사회적 가면을 쓴 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피곤한가. 타인과 내 입장을 조율하려면 협상 능력이니 대화법이니 하는 복잡한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눈치'라는 걸 점점 인격으로 수용하며 우리는 어른이 된다.



사회적 지능,

가끔은 피곤한 능력


이미지 출처: JTBC 홈페이지


대책 없이 살아도 되는 이 동네 사람들은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면 아주 단순한 머리로 대책 없이 돌진한다. 심사숙고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법을 그냥 밀어붙여도 괜찮다. 주인공 예분은 초능력을 이용하여 독심술 하듯 신통방통 동물 마음을 읽는 명의로 이름을 날린다. 한편 불의를 못 참을 땐 껌을 떼준다는 핑계로 누군가의 궁둥이를 붙잡으며 사연 있는 이들의 뒷얘기를 염탐하는데 거침이 없다. 또래 친구 옥희도 직진 모드로 사는 건 예분과 닮은꼴이다. 추적이나 복수가 필요할 땐 동네 뜨내기 똘마니들을 소집하여 귀여운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예분이 이모도 참 대책 없는 순정파 노처녀이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조카를 속여서 장어 양식장이나 장기 고객인 시골 농장에 노예 팔이식 왕진을 가뿐하게 보내버린다. 이런 소동 때문에 자기 조카가 경찰서를 들락날락해도 이모에겐 더더욱 땡큐다. 동년배 중년인 무진 경찰서장에게 한껏 꾸미고 얼굴을 들이댈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남자를 남편감으로 낚으려 들이대지만 그는 꿈쩍도 않는다. 하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예분 이모는 "좌절 금지"가 삶의 신조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녀처럼 무한 긍정 유전자가 있었을 텐데 이건 언제 어디로 사라졌을까.



유치한 체면 차리기,
"괜찮아유~"


이미지 출처: JTBC 방송화면 캡처


이 마을 젊은이들은 그렇다 치고, 나이 든 어르신들도 뻔히 속 보이는 체면 차리기가 몸에 배었다. 무진 마을 어르신들이 억지로 성인군자 흉내를 내며 부아가 치미는 걸 참는 속내가 뻔히 보인다. 누군가에게 불만이 있으면 거침없이 한 마디 해주는 대신 괜찮다고 비꼬는 충청도식 반어법 사투리, "괜찮아유~"를 남발할 때다.


이런 개그는 90년대 초 코미디언 최양락과 김학래 등이 출연해서 인기를 모았던 콩트인 "괜찮아유~"를 패러디한 장면들이다. 가족, 주민 등 가까운 이들이 서로 속을 긁는 소리를 해대도 괜찮다고만 대꾸하는 모습은 훗날 MBC 무한도전에서도 오마주 하며 체면을 억지로 차리려는 우리네 모습을 풍자했다.




가끔은 사회적 가면을 벗고,
휴식을.


똘끼로 무장한 채 누가 뭐라든 병맛스러운 모습 그대로 살고픈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잠자고 있진 않을까? 내 안에도 눈치 같은 건 개나 던져주고픈 백치미 히어로가 숨 쉬고 있진 않을까..?


세상살이가 너무 복잡해서 골치가 아플 때, 여기저기 눈치 보느라 피곤할 때, 가끔은 사회적 가면을 쓴 나를 잃어버리고 싶을 때, 그럴 땐 쉬어야 한다. 내 진짜 모습을 아는 누군가와 일상을 함께 해도 좋다. 숨 돌릴 시간을 갖는 것, 바쁘디 바쁜 생활 속에서 체면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시공간에 누군가와 함께 머무는 것. 이게 진정한 휴식이 아닐까. 가면만 쓰고 살다가 나중에 진짜 내 모습을 잃지 않으려면.





* 이 글은 뉴스 앱 '헤드라잇' [미디어관심] 2023.09.18 콘텐츠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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