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주제 중 하나는 '바둑은 스포츠인가, 예술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그간 여러 사정으로 예술과 스포츠 사이를 오가던 바둑계의 입장과 지향점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다름 아닌 강력한 바둑 AI의 등장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 프로기사라도 AI를 이길 수는 없으니, 바둑이 예술이라면 인간은 AI보다 더 예술적일 수 없다. 바둑계에 종사하는 모두가 결국 승부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러한 혼란은 어찌 보면 사진기의 등장 이후 화가들이 맞닥뜨린 위기, 축음기의 등장 이후 연주자와 가수들이 겪었던 혼란과 닮아 있다. 그러나 화가들은 추상미술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인간의 시각을 재창조하고 예술의 관점을 비틀어내며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바둑이라고 그렇게 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바둑과 문학, 회화, 음악 같은 기존 예술 간의 차이가 드러난다. 바둑은 결론이 정해져 있다. 흑 또는 백이 이겨야 하고, 이 프로기사 혹은 저 프로기사가 이겨야 끝난다. 바둑의 본질은 승부를 가리는 데 있으니 이를 뒤집을 수 없다. 가령 승부에서는 졌지만 예술적으로는 이겼다는 바둑에 가치를 부여하고 상금을 주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지 생각해보면, 바둑이 예술로 분류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반대로 기존 예술이 직면한 위기는 조금 다르다. 예술 분야의 문제는 인간과 AI의 승부에서 AI가 단순히 우위에 서는 데 있지 않다. 인간과 AI의 생산 속도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변화의 속도를 생산자로서도 소비자로서도 인간이 따라잡지 못해 위기가 발생한다. 수십 년 주기로 등장하던 미술 사조의 변화와 명작의 출현 같은 리듬은, AI가 개입하는 순간 전혀 다른 속도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회화나 음악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유희를 돕는 문화 콘텐츠는 수요가 생산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량이 소비 속도를 규정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30년 전 우리가 1년 동안 즐길 수 있었던 콘텐츠 양은 지금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다. 예전 같으면 1년간 볼 분량의 영화를 이제는 길어야 일주일이면 모두 소비한다. 일반적인 소비 속도로도 빠르지만, 요약 영상 같은 압축 콘텐츠를 이용하면 그 속도는 더 가속된다.
과잉 공급된 콘텐츠는 인간 사회에 과잉 공급된 식량과 비슷한 영향을 미친다. 그 자체의 희소성과 의미가 빠르게 절하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 미술사 100년을 AI가 단 10일 만에 지나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우일까 당연한 귀결일까? 1년에 10번 전시회를 찾아가도 충분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우리에게, 1년에 100번 전시회를 다녀와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품이 쏟아진다면, 그 하나하나의 가치와 주목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책에서 언급된 '강(强)AI'에 대한 두려움도 바로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사람이 100년, 1,000년, 10,000년에 걸쳐 성취할 수 있는 것을 AI는 연산력 보충만으로 1년, 한 달, 심지어 일주일 만에 끝낼 수 있다. 만약 모든 종이 결국 멸종을 향해 나아간다면, AI는 인간의 멸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AI로 인해 직업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 수 있다.
AI의 영향으로 산업 지형이 바뀔 수 있다.
AI로 인해 사람이 투입되는 전쟁이 사라질 수 있다.
AI로 인해 인간의 질병이 극복될 수 있다.
AI로 인해 우리는 지금껏 상상하지 못한 창작과 탐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AI 때문에 인류는 원래 그러해야 할 멸종까지의 시간을 극단적으로 단축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단순히 법과 윤리적 규제를 마련하거나, 민간 기업 매출에 세금을 부과해 기본소득을 배분하는 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제안하고 싶다. 바로 'AI의 학습 속도 제한'과 '연산 소비 제한'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류가 조금이라도 더 인간답게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