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함이 말해 주는 것들
결혼 과정은 마치 지뢰찾기 내지는 장애물 넘기 게임 같았다. 이곳 저곳 장애물들이 산재해 있어, 때로는 요리 조리 피해가기도 하고 때로는 힘겹게 넘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단계 잘 넘겼구나 싶다가도, 하도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얽혀 있다 보니 그들이 원하는 바를 잘 추론하고 추측해서 맞춰가지 않으면 어느새 지뢰를 터뜨리게 되는 것이었다.
지뢰가 터진다는 건 누군가 서운해한다는 뜻이다. 나와 남자친구, 그리고 가족들 모두 조금씩 다른 것을 원하는 상황에서 나는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려 애를 썼다. 그런데 이보다 더 완벽히 조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꼭 누군가가 서운해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무도 서운해하지 않으면 내가 서운했다.
어머님,
부디 제가 원하는 걸 받게 해주세요.
결혼은 내가 하는데 뭔가 주변 사람들이 더 분주한 느낌이었다. 특히 우리 어머님은 자꾸 뭔가를 주시려고 했다. 그 마음엔 진심으로 감사했지만, 문제는 어머님이 주시고자 하는 게 나에게 그다지 필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선 나는 결혼하면서 굳이 비싼 악세서리들을 세트로 받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 악세서리를 많이 하지 않고, 한 가지 디자인에 쉽게 질려하는 편인데다, 길거리에서 파는 물건에도 알러지 한 번 없이 잘 하고 다니는 탓에 중저가 브랜드나 보세로도 많이 갖고 있는 편인데, 괜히 '결혼예물'로 포장되었다는 이유로 그보다 딱히 더 예쁘지도 않은 걸 몇십, 몇백 배 비싼 값에 사고 싶지 않았다. '예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촌스럽게 느껴지는 건 나 뿐이었을까. 결혼반지 이외의 것.. 목걸이 귀걸이 팔찌 시계 등등은 정말 무슨 의미인지도 불분명했다. 어머님은 '결혼하고 나면 이런 거 맘대로 사기 힘들다'며 잘 갖춰진 예물 세트를 해주시고자 하셨지만, 나는 그 말에는 더욱 공감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사고 싶은 걸 사면서 살았듯이, 결혼과 무관하게 내가 원하면 그게 무엇이든 얼마이든 살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살림하다 보면 사고싶은 가방도 악세서리도 못 사는 삶을 미리 가정하는 것은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당신이 주신다는 예물들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어머님은 무척 서운해하셨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안 받겠다는데 왜 서운해하실까. 내가 다이아를 안 받으면 그 돈으로 다른 필요한 걸 (아주 많이) 살 수 있어 좋을 텐데. 차라리 대출금에 보태주시면 정말 행복할텐데.
내게 필요 없는 것이
누군가는 꿈꿔오던 것일 수 있다
내가 간과한 것은 어머님의 로망이었다. 받는 로망 뿐 아니라 주는 로망이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어머님 세계에서 당신이 예비며느리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는 본인의 경제적/사회적인 건재함을 알리는 척도일 수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더 이상 내 고집만 피울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어머님이 원하시는 것들을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어차피 남자친구에게 받아야 하는 것들(프로포즈링, 생일선물 등..)과 결혼예물을 최대한 겹치게 하는 것으로 절충점을 찾았다. 사실 선물하는 입장에서 당사자를 고려하지 않고 본인이 주고싶은 것만 생각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그러나 마치 내가 프로포즈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님도 한 여자로서, 누군가의 엄마로서 특정 로망이 있는 것을 비난하긴 어려웠다. 내가 '나 받고싶은 것'만 생각하는 것 또한, 합리적일진 모르겠으나 이기적이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결혼은, 내가 꿈꾸던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로망이 실현되는 장이었다.
신경써서 둘러보니 어머님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가족들이 우리 결혼식에서 제각각 뭔가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아버님은 꼭 직접 노래를 해주고 싶어하셨고, 친정 아빠는 뭔가 강연같은 덕담을 하고 싶어하셨고, 엄마는 특정 선물을 주고싶어 하기도 했다. 처음엔 내 결혼식을 기획하는 입장에서 부모님들이 뭘 하실건지 꼼꼼히 여쭤보며 챙겼는데, 그런 태도가 뭔가 야박하게 느껴진다며 서운해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다.(ㅠㅠ..내 결혼식인데 조심스럽다) 그래서 나중엔 맘을 거의 비우고 하고싶으신 거 알아서 하시게 해드렸던 것 같다. 신기한 건 내가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돌아간다는 거. 이 결혼식에 대한 가족들 각각의 로망들이 무엇인지를 초반에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서운함 거리가 절반은 줄어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나고 보니 그래도 우리 가족들의 로망은 대체로 본인들이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는 것 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친구 생일선물 하나 살 때도 뭐가 적당한지 참 고민이 되는데, 결혼이 피곤하고 신경쓰이는 건 무언가를 주고 받는 과정이 엄청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어차피 받게 될 거라면 굳이 버티지 말고 그냥 감사하게 받고 잘 표현하는 법을 익혀야겠다. 괜한 겸손과 사양이 누군가를 서운하게 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