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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ading Lady Feb 08. 2018

아기 보기; 없어진 나만의 시간

지루함과 두려움, 그리고 행복

정중동. 고요함 속의 움직임. 소율 출생 78일째인 오늘 왠지 그 말을 떠올렸다. 오늘도 나는 소율과 둘이 우리 집에 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고, 모레도 그럴 것이다. 이곳에서는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어른 한명과 아기 한명이 있을 뿐. 이따금씩 들리는 아기의 잠투정 섞인 울음소리를 빼면 너무나 평온한 집. 그리고 나는 때때로 이 시공간이 너무나 지겨워서 미쳐버릴 것 같을 때가 있다. 주변에서 다들 육아가 힘들다고 하여 굉장히 다이나믹할 줄 알았는데, 실상은 엄청난 반복을 견디는 일이었다. '먹이고 트림시킨 후 놀아주다가 재우기'를 하루 4번씩 반복하면 그것을 또 반복해야 하는 내일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매일 같은 일상, 매일이 다른 너

이 똑같은 일상 속에서, 아기의 뇌는 그 어떤 것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그저께는 흑백 모빌에만 반응했었는데 어제부터는 갑자기 컬러 모빌을 보며 웃는다. 어제까지는 마치 소리지르는 것처럼 '액액'거리기만 했는데 오늘은 '오와에에', '으갸~' 같은 제대로 된 옹알이를 한다. 오늘 아침에는 모빌을 보며 휘적거리기만 했는데 오후가 되니 고리로 된 모빌을 손으로 잡는다. 내가 마치 어제를 복사한 것 같은 오늘을 보내는 사이 아기는 시시각각 엄청난 진보를 이뤄 낸다. 어쩌면 똑같은 하루를 보낸 것이 내겐 진보인지도 모른다며 마음을 달래 본다. 적어도 내 인내심이 진보한 건 확실하다.


아기가 하나하나 할 줄 아는 게 더해지는 걸 보는 것이 삶의 커다란 낙이다. 계속 무표정하고 울상만 하던 소율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던 날, 나도 처음으로 '아 그래도 육아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소율이 나를 보면서 오와오와 무슨 말을 하려고 노력하면서 꺄륵 웃었을 때는, 내가 오늘도 계속되는 챗바퀴 속에 있어 이 예쁜 표정을 놓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이 힘듦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머지않아 고단함보다 기쁨이 훨씬 커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도 생각한다. 요즈음 나의 즐거움도 서러움도 모두 소율 때문이다. 내가 원래 좋아했던 것이 뭐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좋아하던 카페에서 차를 마셔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도 머릿속엔 온통 아기 생각 뿐이다. 이건 사랑에 빠진 것 이상이다. 머릿속 구조가 아예 바뀌어 버린 것 같다.

하루가 다른 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없어진 나만의 시간

이렇게 나는 24시간 내내 소율과 붙어 있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와도 조력자가 생기는 것이지 내가 소율과 붙어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기가 잠들었거나 혼자 잘 놀고 있을 때, 설겆이나 집안일도 다 끝내고 나면 나는 그제서야 편안히 누워 영화를 보거나 웹툰을 보거나 잠을 자는 것이 아닌, 아기 수면이나 기저귀 발진 혹은 땀띠 등에 대한 검색을 했다.. 언젠가부터 샤워하는 시간만이 유일한 도피처가 되었다. 그때만큼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그저 따뜻한 물에 몸을 적시며 소율의 존재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잠시나마 출산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엊그제, 남편이 퇴근하고 오면 샤워를 하려고 했는데 그가 야근하는 바람에 샤워하기가 힘들어지자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을 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에겐 지금 나만의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는 걸. 오히려 아기 돌보기에 점점 익숙해질수록 더욱 그렇다는 걸.


그립다. 그 흔하던 카페들이.


잃고 싶지 않아, 나의 이름

내가 요즘 아기만 보고 있긴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처음 '소율 어미'라고 칭했을 때 나는 무척 어색했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두려웠다. 이러다가 내가 없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나날히 늘어가는 소율의 웃음에 점점 더 행복해질수록 그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다. 언젠가 내가 할 줄 아는 게 '아기 보기' 밖에 없어지는 게 아닌지 진지하게 걱정이 된다. 나는 소율이 아닌 무언가를 또 좋아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여태껏 같은 여성임에도 아기를 낳고 일을 그만두는 사람들을 보며 내심 약간은 실망스럽게 생각했던가. 그것은 결코 커리어에 대한 욕심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던 것을. 새삼 워킹맘의 존재가 비현실적일만치 대단하게 느껴진다. 다들 대체 어떻게 회사에 복귀해서 다시 일할 수 있는건지 모르겠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 이렇게 나의 다른 것들을 뒤로 제쳐놓아도 될 만큼 크고 중요하게 느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서 보았을 때 '엄마'는 내 삶의 많은 역할 중 하나일 뿐이다. 평생 해야 할 역할이라 이것이 마치 내 인생처럼 느껴질 뿐, 그리고 현재는 이 역할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이기에 다른 걸 할 수 없을 뿐, 아직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의 역할과 가능성을 엄마 하나에만 고정해 놓기엔 난 아직 너무 젊은 것을. 어쩌면 엄마 역할은 이제부터 살아갈 인생의 1단원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앞으로 난 '엄마'를 절대 때려칠 수 없고 이 위에 다른 역할들이 더해질텐데, 이걸 제대로 못한다면 다른 역할까지 추가로 해내기는 어려우리라는 거. 언젠가 육아의 역할이 지금보다 가벼워지고 여유로워졌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자부심을 위해, 지금은 그저 엄마로서의 오늘을 열심히 살고 싶다.



엄마의 하루는
조용하고 반복적이지만 무척 행복하고 충만하다.
내가 엄마로서 얼마나 행복한지와는 별개로,
심지어 내가 워킹맘이 아니라 전업맘이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의 이름으로 더 불리우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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