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리는 너와의 하루
소율아, 목욕하러 갈까?
소율과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시간은 저녁 7시였다. 마지막 낮잠 후 따뜻한 물로 목욕하고 나서 가볍게 베이비 마사지를 해주는 시간. 소율은 목욕물 안에 있을 땐 신나했고, 끝나고 몸을 닦고 나면 약간 노곤해진 채로 기분좋게 엄마와의 스킨십을 즐겼다. 나는 이 시간에 아기 피부가 건조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보습크림을 몸 구석구석 발라주었고, 살이 접혀 짓무른 곳이 있으면 약도 발라 주었다. 하루 동안 쌓인 콧물과 코딱지도 빼 주는 것도, 귀지를 닦아 주는 것도, 이틀만 지나도 금세 날카로워지는 손톱을 다듬어 주는 것도 이 시간이다. 소율의 손가락도 발가락도 하나하나 만지고 허벅지 주름 사이사이도 펴 주면서 꽁냥꽁냥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깨끗하게 모든 걸 끝내고 보송한 새 옷을 입혀주고 나면 마치 내가 개운해지는 양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넘겼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게 된 시간은 오후 네 시였다. 오전에 빨래나 설겆이 등의 집안일을 마치고 아기와 어느정도 놀아주기도 마친 후, 아직 따사함이 남아있는 해가 마지막 노란 빛을 창문으로 길게 비춰주는 시간. 이 때가 되면 나는 보통 하루 중 처음으로 소파에 앉는다. 이 소파는 신혼집을 꾸미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가구이지만 아마 앞으로 우리 3인 가족에겐 많이 작아질 것 같다. 여기에 앉으면 왠지 남편과 둘이 오붓하게 보냈던 저녁이나 주말 오후의 시간이 생각나곤 한다. 하루 중 커피라도 한 잔 마실 수도 있는 유일한 시간이 바로 이 때이고, 이렇게 몇 자 끄적거릴 수 있는 지금 시각도 오후 네시 반이다. 거기다 아기가 잠들기까지 하면 금상첨화. 출산 후 사라진 나만의 시간이 이 때 만큼은 아주 잠깐 돌아오는 것 같다. 얼마 되지 않는 이 시간을 최대한 즐겨 보고자, '더 적극적으로 아무 것도 안 하기'를 하다 보면 아기가 깨거나 칭얼대거나 택배가 오거나 해서 여유는 곧 끝나 버린다.
항상 부족한 잠 때문에 아침 컨디션은 항상 저조했었는데, 소율이 통잠 자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오전 9시가 좋아졌다. 밤잠을 잘 자고 난 소율이 깨어나 한참을 방긋방긋 웃고 난 후 첫 수유를 하는 시간. 밤새 홀쭉해진 배를 채우느라 소율은 꿀꺽꿀꺽 잘도 먹는다. 내내 같은 방에서 잤지만 어쩐지 아침이 되면 오랫동안 못 본 느낌에 무척이나 반갑다. 젖을 먹고 있는 아기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나 오물거리는 볼따구, 다소곳한 어깨가 참을 수 없이 귀여워, 나는 계속 이곳저곳 만지작거린다. 아기를 내려다보며 소곤소곤 말을 걸어본다. "소율아, 맛있니? 오늘은 무슨 맛이야?" 수유가 끝나면 하루 중 처음으로 거실로 나가 햇님과도 인사하고 간밤에 못 본 코끼리와 임팔라를 비롯한 동물 친구들과도 인사를 한다. 아기와 보내는 하루는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일과이지만, 그래도 무엇을 하며 놀지, 산책은 어디로 얼마나 할지 등 그날그날의 사소한 계획들을 세우곤 한다. 오후에 손님이 오는 날이면 뭘 대접하지를 생각하기도 하고, 하품하는 소율의 고소한 입냄새도 맡아 보는 아침 시간의 작은 설렘이 좋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게 된 시간은 밤 열시이다. 이 시간은 아기의 생활 리듬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좋아하게 되었다. 아기가 안정적으로 밤잠에 들어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홉시는 아직 아기가 잠들지 않았거나 혹은 깊게 잠들지 않았을 시간이라 금방 깨 버릴까봐 긴장이 되고, 열한시는 곧 나도 자야 할 것 같아 너무 조급하다. 그러므로 밤 10시는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하루의 마지막을 즐길 수 있는 완벽한 시간이다. 내가 마지막 유축을 해 놓으면, 남편은 차를 우려 주거나 위스키 언더락 등을 만들어 주었다. 가끔 소파에 함께 앉아 넷플릭스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시는 날은 어찌나 신이 나는지. 아기가 잠든 뒤 찾아오는 부부의 시간은 참 달콤하고, 여유롭고, 그만큼 빨리도 지나간다. 잠깐 앉아있었던 것 같은데 금세 열두시가 넘어 있곤 하는 거짓말같은 시간.
아기가 태어난 지 백일이 조금 넘은 지금, 나의 하루는 온통 좋아하는 것 투성이가 되었다. 분명 모든 게 무섭고 힘들기만 했었는데, 어느새 소율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도, 토를 닦아 주는 것도, 수유하는 것도, 놀아주는 것도, 목욕시켜주는 것도 모두 너무 좋아져 버렸다. 졸릴 때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칭얼대는 것이 사랑스럽고, 하품하거나 트림할 때 입을 벌리면 나는 젖내가 향긋하고, 안아주면 목 뒤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의 내음은 어찌나 포근한지. 요즘처럼 일상을 사랑하며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그저 익숙해져서라기엔 내 안의 더 중요한 무언가가 변한 것 같다. 소율과의 애착이 나를 이렇게나 바꾸어 놓은 걸까. 육아휴직 쓴 걸 후회하며 하루빨리 출근하고 싶다 징징대던 두 달 전의 나는, 어느새 아직 일 년 남은 복직이 벌써부터 두렵고 아쉬운 엄마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