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ading Lady May 14. 2019

외모지상주의에 사는 아기

18개월 아기가 받는 외모 지적

어제 아기랑 소아과에 갔는데 왠일로 한산했다. 한주 간 앓던 감기가 많이 나았다고 해서 기분좋게 나오려고 하는데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대뜸 묻는다.

“어머니, 혹시 영화 '작은아씨들' 봤어요?”
“네...? 아~ 네 봤어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조로 나오는.”
“거기 보면 여자애들이 자기전에 빨래집게로 코를 찝고 자요. 높아지라고. 내가 어렸을 때 납작코였는데 그걸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서양 애들조차도 코를 높이기 위해 저렇게 노력하는구나 하고. 그래서 그날부터 틈만나면 코를 집게로 집었어. (소율이를 가리키며) 애기도 좀 크면 그렇게 많이 찝어 줘요.”
“.... 아.... 네...

그럼그럼요, 우리 소율이 크면서 코만 높아지면 아이돌감이져 하하하”

(선생님 침묵)


외모도 엄마의 관리 영역인가요?

사람들이 18개월 아기에게 벌써 외모 걱정(을 빙자한 지적일지도 모르는)을 심심찮게 해 준다. 심지어 어떤 이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요즘 눈이랑 코 (성형) 정도야 일도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도 위로의 의미일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뭐 대단히 기분이 나쁘진 않다. 살면서 외모가 경쟁력이 될 수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니, 나도 맞장구치며 얘기하기도 한다. 다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조금 혼란스런 부분은, 일단 나는 소율이가 그렇게까지 못난 얼굴인 것 같지 않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건 본인 팔자인 것이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외모가 출중하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그것 또한 아이의 재능이나 성적처럼 엄마가 책임지고 관리해주어야 하는 것인 마냥 이야기를 한다. (물론 성적을 엄마가 관리해야 한다는 것에도 온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넌 예뻐, 진짜, 매우, 충분히, 넘치도록,

지금 내가 듣는 것이 이 정도인데 소율이가 앞으로 얼마나 이런 지적을 들으며 자라게 될까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갑갑하다. 외모는 그저 겉모습일 뿐이라고, 내면이 아름답고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 정말 멋지고 어려운 일이라고, 내가 아무리 지속적으로 말해 준들 크게 소용이 있을런지. 어쩌면 괜히 구시대적 엄마 취급이나 받으며 본전도 못 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소율이, 진짜진짜 예쁘다. 크진 않아도 동그랗고 초롱초롱한 눈, 오물대는 작은 입, 그 아래 장난스런 표정을 지을 때만 들어가는 옴폭한 보조개, 동그랗고 귀여운 코, 톡 튀어나온 깔끔한 이마.. 이 건강하고 티 없는 얼굴에 칼집을 내고 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어 지금 내가 보는 아기의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이 된다는 상상을 하면 어찌나 끔찍한지 모르겠다. 내 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 물론 나 역시 소율이가 자라면서 코가 좀더 올라오길 바란다. 그리고 진짜 가끔은 우리나라의 우수한 성형 인프라 덕에 문득 안심이 되기도 한다. 만약 소율이가 자기의 외모 때문에 자존감이 현저히 떨어지고 사회 생활에 지장이 있게 된다면 발달한 의학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그러나, 부디 그럴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나의 예쁜 딸아. 너의 자존감은 획일된 기준에 맞추어진 외모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를. 누군가에게 예쁘다고 추앙받지 않아도 드러나는 너의 매력을 찾아 가기를. 인형처럼 예쁜 첫인상이 아니라도 왠지 오래도록 대화하고 싶도록 하는 사람이기를. 그리고 그를 도와줄 좋은 친구들을 사귀어 가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단다.


사실은 나 역시 누구보다 예뻐 보이려 노력하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출산 후의 살찐 몸과 쳐지는 피부는 나의 자신감을 갉아먹는 주요 원인이고, 당시에는 만족하지 않았던 5년 전쯤의 외모로만 돌아가도 소원이 없겠다는 마음이 매일 든다.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지금 내가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나 스스로에게도 평생 해주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너는 지금 넘치도록 예쁘다고, 만약 스스로가 마음에 안 들 때면 꼭 기억하라고, 네 엄마에게 너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아름다운 보물이라는 걸. 네 하얀 볼에 때가 묻을까봐 뽀뽀 한번도 아껴 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걸.


널 성형시킬 돈을 모으고 싶진 않지만, 이 웃음을 오래오래 지켜주기 위해서는 억만금도 주겠다.


.

.

아, 물론 나중에 코는 좀 찝고 자 보던지...
밑져야 본전 아니겠니.

매거진의 이전글 무뎌지는 행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