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라고만 정해놓고는 가서 영어도 배우고 여행을 하는 것을 꿈꿨다. 퇴근 후에는 영어학원을 2개월 다니며 갈 준비를 했다. 왕초보 영어반에서 배운 건 내 소개와 나이, 한국에서 왔다만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학원엔 나처럼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가려는 또래들이 많았다. 수업시간에는 영어로만 말해야 했다. 대부분 옆에 있는 사람과 질문하고 대답하는 문장을 반복했고 수업이 끝나면 한국말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당일 대화 짝이었던 사람과 지하철역까지 가면서 잠깐 나눈 대화는 나의 비행기 노선을 바꿔놓게 되었다.
당신은 어느 나라로 가고 싶나요라고 한국어로 물으니 런던으로 배낭여행을 가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유럽을 여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지도를 펼쳐 런던을 찾아봤다. 런던 옆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스페인등 들어본 나라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뭐야 땅이 붙어있네.'
내 노선은 아메리카 드림에서 유러피안드림으로 바로 갈아탔다. '유럽여행'이라는 멋진 단어에 끌려 나도 런던을 가야겠다며 목적지를 바꿨다.
유학박람회 부스에는 런던에서 유학경험이 있는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유학원이 있었다. 난 책상 앞에서 그들이 수집한 런던과 유럽여행의 아기자기한 사진과 티켓, 지도, 소품사진이 담긴 포트폴리오를 보고는 감동을 받아 바로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본인이 다녔다는 어학원과 홈스테이 등. 픽업까지 모두 섭외를 대행해 주었기에 난 비행기에 짐과 몸을 실어 떠나기만 하는 과정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방세 보증금을 빼고 통장의 돈을 모두 여행자수표와 영국돈으로 바꾸고 가방 하나에 짐을 쌌다.
남대문에 가서 3단 지퍼가 달린 이민 가방을 샀고 옷과 전기장판, 책을 담고 이민가방을 도르르 굴리며 인천공항으로 갔다. 남자친구가 배웅을 해주었다. 잘 다녀오라며 애틋하고도 슬플 표정을 지었지만, 난 무척 긴장한 상태여서 어서 출국장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난생처음 가는 해외여행에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으로 무척 설레었다. 난 입구의 문이 열리고 들어가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는 한국에 오고 싶지 않았다.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오자 런던의 공기에서 바닐라 향기가 났다.
유학원에서 섭외한 한국분이 나와있었다. 김지아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 앞에 내가 다가가자 서로 인사를 나누고 홈스테이 집까지 자동차로 데려다주었다.
난 외국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벙어리가 되어 영어든 한국어든 입을 열지 못했다. 한국분은 어학원 근처의 홈스테이 집에 나를 내려주고 런던지도책을 선물로 주면서 행운을 빈다고 말하고 떠났다.
난 영국인 가족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5살, 3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거실에 놀고 있었고 패션잡지에서나 보던 인형처럼 생긴 아이들에게 나는 '하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너희들이나 나나 영어말을 배우는 시기인듯해 아이들도 나에게 긴 문장으로 말을 걸지 않았다. 부스스한 차림의 아주머니는 나를 맞아주고 바로 방을 안내했다. 줄이긴 전화기를 내 방에 놓아주고는 런던에 도착했다고 한국과 통화를 하라고 제스처로 알려줬다.
내일 어학원에 가면 안내를 받고 전화기 개통등 모두 한 밤을 자야만 가능한 일이어서 오늘은 이 작은방에서 꼬박 있어야 한다. 시차적응 증상인지오늘이 며칠인지 한국은 몇 시 인지도 모르는 멍한 상태는였으며 영어도 안 되는 낯선 나라에 내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잘 도착했다고 했다. 엄마는 나에게 아침은 먹었냐고 물어 여긴 저녁이라고 했다. 남자친구는 나의 전화를 기다리느라 꼬박 밤을 새웠다는 말에, 난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온 한국이었건만, 굳은 마음은 남자친구의 목소리에 무너지고 말았다. 전화기를 써야 하는 주인이 문 앞에 기다리고 있어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방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잠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전화 통화를 하는 주인집의 시끄러운 영어 말소리가 들렸다. 입도 안트였으니 귀가 들릴 리가 없으나, 멀리서 들리는 언어의 감정은 알아챌 수 있었다. 언성이 높았다 낮았다 화냈다. 전화를 여기저기 돌리기도 하는 분주한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다음날 주인아주머니는 나에게 뭐라고 뭐라고 해대는데 나는 알아들을 수 없어 다시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옆에는 파란 눈의 곱슬머리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 아이들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패닉상태가 되었다.
'언어가 안된다는 것은 내가 없어지는 거구나. '
난 쏘리만 여러 번 반복하다가 주인아주머니는 답답하다는 듯, 나의 짐과 나를 태우고 어학원 앞에 내려주었다.
고풍스러운 건물 앞엔 어학원 간판이 건물 벽에 붙어있었다. 앞글자인 H가 엔틱 하게 레터링 되어 있어 사진에서 보던 어학원 이름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금발머리 여인이 안내테스크에서 나를 맞이했다. 당신이 지아킴이냐고 묻더니 나에게 뭐라 뭐라 말한다.
난 다시 한번 알아들을 수 없어 미치고 환장하는 노릇이었다. 낯선 땅에 내려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바보가 되는 기분이구나. 내 나라에서는 할 말 못 할 말 다하고 당당하게 살다가 남에 나라에 와서 한마디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가 그렇게 초라할 수 없었다.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난 이민가방을 끌고 갈곳 없이 덩그러니 서있었다. 그때 안내데스크 직원이 지나가는 학생을 불러 세웠다. 뭐라 뭐라 하더니 학생이 나에게 한국말로 “홈스테이 하던 집에 일이 생겨서 다른 홈스테이 집으로 가야 한데요.” 그녀는 자연스러운 영어로 직원과 대화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난 한국인을 만난 것만으로도 구세주를 만난 듯했다. 모르는 학생을 붙잡고 못다 한 한국말을 퍼부어대며 하소연을 늘어놨다. 그녀는 “가끔 그런 일이 있어요. 괜찮아요 다시 안내해 줄 거예요.” 하며 미소 짓고 홀연히 떠났다.
'아.. 영어를 말한다는 것은 바로 저런 여유구나. '
이틀 동안 말을 못 했는데, 내 나라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내쉬며 안내해 준 집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어제의 집과 생김새는 비슷한 영국인 할머니 혼자 사시는 홈스테이였다. 그 집은 오래된 영국의 가정집 분위기가 배어있었다. 말로만 듣던 영국의 정원이 뒤뜰에 가꾸어져 있었고 빈티지한 찻잔과 그릇이 담긴 가구와 벽난로. 벽에 걸린 가족들의 사진.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흔적의 소파와 커튼이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큰 화병에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1층은 할머니가 쓰는 곳이고 2층엔 3개의 방이 있었는데 남은 빈방으로 안내되었다. 난 바비인형의 집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유럽의 정취가 묻어있는 마호가니색 나무가구와 내 짧은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는 높은 침대. 잔잔한 꽃무늬 이불. 옅은 하늘색 줄무늬와 페이즐리 문양이 섞인 벽지와 투명한 커튼이 하늘거리고, 백열등이 달린 조명으로 아늑했다. 마루에 깔린 카펫은 올라가면 날아오를듯한 알라딘의 양탄자 같았고 걸을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바닥 때문에 걸음조차 조심스러웠다. 창문밖 작은 정원엔 할머니가 가꾼 꽃들이 피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