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이재민이 된 우린 보증금과 한 달 방세정도 되는 지원금을 들고 다른 곳에 방을 찾아다녔다.
빌라 집주인 할아버지는 정부에서 준 수해지원금을 세입자들에게 주지 않았다. 웬만한 일엔 그냥 손해 보고 살았더니 손해 보는 게 신조가 되어버린 나와 S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건 남자친구였다. 왜 받아야 할 돈을 못 받냐며 자신이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남자친구가 참으로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빌라 꼭대기에 있는 주인집은 넓고 비싸 보이는 고가구들과 안마의자가 채워져 있었다. 허리에 지지대를 두른 할아버지는 돈을 주지 안겠다며 버티고 있었다. 소파 주변엔 많은 약봉지와 약통들이 쌓여있었다.
있는 것들이 더하다는 말이 스쳐갔다. 지하방에서 물난리를 겪은 가난한 우리의 돈을 떼먹어가며 살고 싶을까. 저 약들은 돈 욕심이 많아서 생긴 병일 거라는 예상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자식들이 의사이며 대기업에 다니며 자신은 어떤 일을 했는지 등을 나열했다. 우린 당신의 자식직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어서 돈을 달라고 했다. 하소연이 한 소절 더 이어지려 할 때 남자친구가 고발을 한다고 협박을 했고 할아버지는 결국 자기 자랑 2절을 하지 못한 채 돈을 주었다.
지방에 살다 온 우린 어른들에게 함부로 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언제나 공경해야 한다고 배웠고 동네 어른들도 모두 너그럽고 온화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어른은 우리가 어리고 모른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무시했다. 못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는 나는 앞으로 당하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렵게 얻어낸 수해지원금을 들고 방을 찾아 나섰다.
나와 친구는 지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높은 곳으로 가기로 했다. 이수역 근처에 살던 친구는 이수역과 남성역 사이에는 지대가 높은 곳에 집들이 많다고 소개해주었다. 강남에서 살겠다고 허세만 가득했던 우린 무조건 높은 지대를 찾아가기로 했다. 언덕에는 빈틈없이 촘촘히 지어진 집들로 빼곡했다. 우린 골목을 지나 더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언덕에 빌라들은 반포동과는 다르게 아이들 웃음소리도 들리고 어르신들도 나무아래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는 정겨운 동네분위기였다. 골목골목엔 포도나무를 그늘막 삼아 장식한 집도 있었고, 화분에 고추와 토마토를 심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땅 틈새엔 봉숭아도 자라고 있는 소박한 풍경들이었다. 중간중간 작은 공원과 놀이터도 지어져 있고 큰 골목엔 마트도 자리하고 있었다.
우린 부동산 사장님에게 이재민이 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사연을 구구절절 말하며 물이 안 들어오고 햇볕이 드는 곳이면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사장님은 딸 같은 아이들이 안쓰럽다며 주머니 사정도 알아맞힌 것처럼 방을 안내했다.
1층에서 계단을 몇 개만 내려가면 되는 반지하라고 했다. 문을 열자마자 큰 창문으로 햇빛이 비추고 방이 2개였는데 큰방 1개와 주방옆에 있는 미닫이 방 하나를 쓸 수 있었다. 계단을 5개밖에 내려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밝다니. 창문 쪽은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고 옆집과는 벽으로 분리되어 있어 방 창문으로 남들이 들여다보는 일도 없었다. 우린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하며 '이거야'하는 텔레파시를 보냈다.
드디어 빛을 볼 수 있다니 기뻤다.
우린 배수구부터 확인했다. 비가 오면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비가 와서 잠긴 경험은 있는지 등을 꼼꼼히 물었다. 부동산 중개인이 빌라 꼭대기에 사는 주인을 불러 다시 한번 우리의 사정을 서로 이야기했다. 주인은 반포 욕심쟁이 할아버지와는 다른 성품 좋으신 분이셨다.
방세도 1층보다는 싸고 햇빛도 들어왔다. 바닥과 창문사이에도 높이가 있어 비가 들어올 일은 없어 보였다.
우린 이젠 방을 구하는 방법의 요령을 조금씩 익혀가고 있었다. 모든 배움에는 실패와 좌절이 있기 마련이라더니, 서울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삶의 체험이 더 절실했다.
우린 바로 빈집으로 들어갔다.
깨끗했고 무엇보다 바퀴벌레가 없었다. 난 친구에게 큰방을 쓰라고 하고 난 작은방을 썼다.
아침햇살에 눈을 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며 무척 만족했다. 지하철역까지 20분 정도 걷는 수고 따위는 서울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미 받아들였다. 게다가 우린 각자의 방이 생겼다.
친구들은 사당동 집을 와보고는 박장대소를 했다. 물난리를 피해 가장 낮은 곳에 살다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왔다며, 그 후로 언덕까지 올라오기 힘들다며 자주 오지 않았다. 집 잃고 갈 곳 없는 혹독한 여름을 보낸 우린, 비가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의 안심이 되었다.
퇴근길에는 지하철역 앞에 있는 김밥집에 들러 김밥 한 줄을 까만 봉지에 담고 언덕 쪽으로 올라가는 길엔 과일가게도 있어 바구니에 담긴 귤도 사들고 간다. 언덕 중간쯤에 이르면 마트에 들러 맥주와 천하장사 소시지를 사들고 집으로 간다. 친구는 아직 퇴근전이고 나는 TV를 보며 김밥을 먹고 맥주를 마신다. 소시지는 안주삼아 먹고 디저트로 귤을 까먹는다. 이게 얼마 만에 갖는 혼자만의 방이던가.
첫눈이 내리고 겨울이 더 깊어갔다.
아무 일 없이 지낼 줄 알았던 사당동에서 또 하나의 고초를 겪은 건 빙판길이었다. 겨울이면 언덕에 올라오는 길이 미끄럽고 바닥이 얼면 한걸음 한걸음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지하철역까지 20분 걸리는 길이 눈이 오는 날은 두 배가 걸렸다. 그래서 다음날 눈이 오는지 안 오는지를 뉴스로 확인해야 했다. 눈이 온날은 어김없이 빙판길이 되어 비탈길을 내려가느라 애먹을게 뻔했다.
이 동네는 익숙한 듯 비탈길 계단 옆에는 잡고 가라고 밧줄도 설치되어 있는데, 출근길에는 사람들이 조심조심 내려가느라 마치 등산을 하는 듯 한 줄로 서서 한 걸음씩 발을 디뎠다. 앞에서 내 또래 여자가 미끄러졌다. 창피한 건 둘째치고 지각할 것이 더 두려운 것처럼 후다닥 일어나려 했지만 다시 발이 미끄러졌다. 결국 보다 못한 주변 사람들이 잡아주며 일으켜 세워주니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 아침 풍경이다. 상습 미끄럼 지역답게 눈이 오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엔 발 빠르게 모래가 뿌려져 있었다. 친구들은 눈 오는 날 언덕을 올라온 후 발길을 끊을 때쯤, 우리의 밤문화는 서서히 식어갔으며 서울생활에 공허함이 찾아왔다.
한파가 몰아쳐 빙판길은 오랫동안 얼어있고, 추운 겨울이 지나갈 때쯤 S와 나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난 계획대로 3년 일을 하고 돈을 모아 외국에 가기로 했기에 다음 해에 S에게 말했다. 내가 런던에 가기로 해서, 방을 빼야 한다고 전했다. 친구는 많은 걸 묻지 않은 채 알았다고 했다.
강남지하방에서 언덕방까지 나와 어려운 서울살이를 내내 함께 지낸 친구였는데.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난 짐을 모두 정리하고 런던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