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A Oct 10. 2024

아임 프롬 코리아

런던 다락방

그때 문을 두드리는 '똑똑' 소리가 들렸다.

광대뼈가 환히 올라가고 쌍꺼풀 없이 옆으로 가느다란 눈을 가진 여자가 밝은 미소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런던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나를 환하게 환영해 주는 건 일본인이었다.


“Hi. nice to meet you. I am kaori. I’m from japan.

welcome to london. it’s dinner time.”   

  

드디어 영어학원에서 배운 문장을 써먹을 때가 왔구나 싶어. “nice to meet you too. I am jia. i’m from korea.” 로 화답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친절한 일본인에게 지푸라기를 잡은 심정으로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엔 남성한명이 앉아있었고 할머니는 오븐장갑을 끼고 연어를 꺼내고 있었다. 연어스테이크가 그날의 저녁이었다. 난 최대한 들어올릴수 있는 미소의 언어로 인사를 나누고 처음 먹는 연어를 먹기 위해 돈가스를 썰던 폼으로 양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잡고 연어를 쓸어 한입 먹었다.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길래, 애써 미소와 함께 umm. good! 하며 맛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자기들끼리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키가 크고 갈색머리의 남성은 독일인이라고 소개를 하고 가오리와 계속 이야길 주고받았다. 영국 할머니는 옆에서 느린 몸짓으로 우리가 필요한 게 뭐 없는지 살피며 소금과 후추를 가져다주고 정원으로 나가는 문옆 의자에 앉아 천천히 말을 했다. 할머니와 가오리는 손녀사이인 것처럼 친근해 보였다. 할머니는 한국에서 온 애가 있으니 가오리에게 나를 데려오라고 했다고 한다.


난 바닷가 출신이지만 생선을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 먹어본 적도 없으며, 연어도 처음 먹어보는 난감한 맛으로 반쯤 남긴 채 다 먹었다며 포크를 내려놓자 할머니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할머니는 꽃무늬가 가득한 빈티지 찻잔세트에 홍차와 생강쿠키를 준비해 주며 앉아서 떠들라고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들리지 않는 영어를 듣고 있는 것도 이렇게 힘들 줄이야.’

한국어로 말하면 나도 저 대화에 낄 수 있는 충분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데, 영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져가만 갔다. 붙임성 좋은 가오리는 답답할 만도 한데 먼저 말을 걸어주고 나의 서툰 영어와 전자사전을 찾는 시간까지 기다려주는 친절하고도 다정한 사람였다.

그렇게 가오리는 낯선 나라에서 만난 나의 수호천사이자 친구가 되었다.  

    

둘은 동갑이었고 직장을 다니다가 오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좋아하는 취향도 비슷했다. 음악. 미술, 커피, 벼룩시장을 좋아했다. 내가 런던생활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건 가오리를 만난 순간부터였다. 가오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지냈을까. 황량한 사막에서 가오리를 만난 건 신의 한 수였다.

런던에 도착해 흘렸던 서러운 눈물은 온데간데없고 매일 신나는 일들이 열려있었다. 가오리랑 런던의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고 밤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매일아침 가오리랑 같이 어학원까지 걸어갔다. 영어 수준이 달라 반은 다르지만. 점심시간엔 만나 얼굴을 보고 하교하면서 둘이 종일 붙어 다녔다.

어학원에 오니 왕초보반에는 나처럼 자기소개만 할 줄 아는 아시아인들. 게다가 몇 한국사람들까지 즐비했다. 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적응하기 위한 정보들은 쉬는 시간마다 한국말로 빠르게 나누었다. 한국말을 할 때는 모두 한국에서의 수려한 경력을 자랑했으나 수업시간만 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됐으며,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버벅거렸다.


영어 할 때의 새로운 나, 한국말 할 때의 원래 나. 이렇게 두 페르소나를 오고 갔다.      


나는 갑작스럽게 하루 만에 홈스테이가 바뀌게 되었고 영국 할머니는 한국인은 받지 않는데 어학원의 부탁으로 나를 받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 들어갔으니 나도 영국인에게 억지로 웃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일본인 가오리에게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나에게는 냉담했다. 한국인에 대한 어떤 편견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 한국을 모르는 유럽인들이 많았고 일본보다는 덜 알려진 작은 나라였기에,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가 생활 속에서도 드러났다.

     

나라는 한 사람이 국적을 대신하는 이미지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밖으로 나오니 체감이 되었다. 어느 나라의 여권을 들고 있냐에 따라 대우도 대접도 달라졌다. 인종차별과 편견에 부당해도 나의 국적이 어떤 이미지이며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났다. 외국에서는 나 한 사람이 한국의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더 친절할 필요를 느꼈다.

여권의 앞면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무 지장 없게 통행할 수 있게 해 주고 필요한 모든 편의와 보호를 베풀어 달라는 국가의 요청이 적혀있다. 나라가 나를 대변하고 보호하고 있다는 든든함을 처음으로 느낀 나라밖에서의 생활이었다.     


난 가오리처럼 웃음이 많지도, 친절한 편도 아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런던에 있는 내내 미소가 발달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 말을 알아듣기 위해 집중을 기울여야 하고 상대방의 표정, 몸짓등을 유심히 관찰해 의사소통에 애써야 했다. 덕분에 난 웬만하면 미소 지어 대답하려 애썼다. 한국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할 일이 자주 없지만, 영어는 시도 때도 없이 excuse me와 sorry를 남발했다.    

  

우리의 ‘미안’과는 다르게 영어는 양해를 구하는 말로 더 자주 쓰였다. 당신의 영어를 못 알아 들었을 때도 sorry 하나면 친절하게 다시 말해주곤 했으니 sorry는 아주 유용하고도 정중하며 품격 있는 언어였다. sorry를 말하는 나의 표정엔 미안함이 묻어있었고, 난 좀 예의 있어 보였다. 내가 낮아 보이는 것보다 배려하는 양해가 배어있었다.      


금요일 저녁엔 근처 펍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매주 어학원 사람들이 바뀌여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이 유럽인이었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악센트의 영어발음에 나는 점점 아시아인들과 어울리는 게 편하게 되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친구들은 왕초보 영어인 내가 전자사전을 찾으려 하면 이미 다른 친구에게 ‘획‘가버렸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저 싸가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기도 했지만, 다시 미소로 화답하는 것만이 내가 런던에서 살아갈 방법이었다.     


그 당시 배낭여행과 어학연수는 대학생들의 필수코스 분위기였다. 런던에 와서 한국 토익문제집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학생들은 부모님이 어렵게 보내준 어학연수이다 보니 어울려 노는 데에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주말이면 서둘러 주변관광 여행지를 점찍듯 다녀오는 모범적인 일상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넉살 좋은 유럽인들 중에는 그런 한국학생들의 토익문제집을 과감히 덮어버리며 놀러 가자고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come on. just enjoy your travel. come on. come on."

주말엔 친구들 집 거실에서 파티가 열렸다. 각자 가져온 음식과 술. 음료를 마시며 춤을 추거나 시끄럽게 떠들어대다가, 각 나라의 이야길 하며 둘러앉아 열띤 토론을 하는 분위기 또한 흥미로웠다.  

    

가오리와 내가 자주 시간을 보내던 곳은 미술관이었다. 이층 빨간 버스를 타고 테이트 갤러리등을 가고 템즈 강가에서 커피를 마셨다. 노팅힐 마켓에 가서 수공예품을 구경하고 옷이나 액세서리를 하나씩 사들고 오기도 했다. 주말이면 콘서트, 뮤지컬을 보고 다시는 런던에 안 올 것처럼 런던의 구석구석을 매일 즐겼다.  

    

가오리와 나는 홈스테이를 나와서 방세를 내고 공동주방을 쓰는 flat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하숙을 하다가 자취생활을 하기로 한 거다.

내가 외국의 집에 대한 동경은 어릴 적 읽었던 빨간 머리 앤과 소공녀들이 살던 집이었다. 드넓은 초원에 세모로 지어진 집에 계단을 올라가면 가장 꼭대기는 다락방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앤은 아침에 양쪽 손으로 창문의 손잡이를 밀어서 열어젖히고 떡을 괴고는 창밖의 꽃잎 날리는 풍경을 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flat의 2층의 계단을 올라가고 다시 3층으로 올랐을 때 작은방 하나가 있었다. 문을 열자 정원 쪽으로 창문이 있고 벽면엔 싱글침대. 책상과 의자, 옷장이 있었고, 창문아래에는 라디에이터, 협탁엔 전자시계 겸 라디오가 있었다. 침대 앞 서랍장 위에 작은 TV가 놓여있어 필요한 것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천장이 보통방보다 조금 낮았지만 내 키로는 충분히 했다. 아담한 사이즈에 반해 난 보자마자 작은방으로 정하고 가오리는 2층의 조금 큰방으로 정했다.  

    

나의 방이 더욱 동화스러운 것은 문에 달린 열쇠였다. 동화책에 보면 열쇠구멍으로 방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지 않은가. 방문은 기다란 손잡이가 있는 엔틱한 구리색 열쇠를 구멍에 넣으면 ‘칵’ 큰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이었다. 남들이 보면 열쇠모양 키홀더를 장식으로 가지고 다니는구나 싶겠지만, 진짜 방 열쇠였다. 열쇠구멍이 커서 구멍에 눈을 들이대면 작은 내방이 모두 보일정도였다.

난 다락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침이면 빨간 머리 앤처럼 양손으로 창문을 열어서, 숨을 크게 쉬며 아침공기를 들이마시고 보나 마나 한 흐린 날씨의 런던 하늘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비가 내리지 않는 회색하늘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flat  : 영국에서 flat은 아파트(apartment), 연립주택, 다세대주택을 뜻한다.



이전 17화 한국이 싫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