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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 Oct 15. 2024

삼만 원과 유로 동전뿐

쌍문동 옥탑방

런던에서 노동하지 않으며 소비만 하는 1년을 보냈으니, 난 거지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지갑에 남은 거라곤 영국 동전들과 유럽여행하며 남은 1유로, 한국돈 3만 원이 전재산 전부였다.      

런던에서는 쓸 일 없었던 한국돈이 한국에 돌아오니 다시 쓸모가 있게 되었고, 영국에서 동전하나라도 챙겨 슈퍼에서 계산하던 귀한 동전이 한국에 오니 쓸모없게 되었다.

게다가, 배운 영어도 쓸 일이 없었다.


환전할 수도 없는 동전들은 한꺼번에 기념품으로 전락했다. 여행에 돌아와 짐들을 정리하니 런던에서 자주 쓰던 것들을 보며 추억하는 일뿐이었다. 손때 묻은 유럽여행책, 필수품이던 전자사전, 여행지 풍경엽서, 뮤지컬, 콘서트, 미술관 티켓들, 런던지도, 외국 친구들의 이메일 주소와 여행기록을 남긴 다이어리, 그리고 가오리와 내가 찍힌 사진 한 장이었다. 런던에는 사진을 찍으러 왔다는 태국친구가 헤어질 때 선물로 현상해 준 사진이었다.

   

한국에 오니 정신이 번쩍 들며 추억은 아무 힘이 없었고, 당장 먹고사는 일이 우선인 생계형 노동자로 돌입했다. 다시 한국에 와서 처음 한 일은, 당연히 각종 아르바이트였다. 방을 구하기 전에 친구네 집에 머물면서 이력서를 쓰고 취직자리를 알아봤다. 하늘아래 손 벌릴 때라곤 부모밖에 없으니, 난 엄마에게 보증금만 마련해 달라고 했다. 엄마는 대책도 없이 산다며 잔소리 한 바가지 퍼부었지만, 모두 맞는 말이었다. 

다행히 런던을 가기 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의 소개로 직장을 얻게 되었다.   

  

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결혼한 고등학교 친구 H의 신혼집이 쌍문동이었다.

친구가 일찍 결혼한 이유는 딱 하나. 집이 없어서였다. H는 학교선배와 살고 있었고 직장에 다니며 집을 구할 목돈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직장에서 H의 열 손가락에 붙은 통통한 살들까지 좋다는 남자를 만났다. 사회복지사인 H는 어렵고 가녀리고 안쓰러운 것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타고난 측은지심의 심성을 지닌 사람이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미소년 같은 남자에게 모성애가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집도 없는데 결혼이나 할까 싶어 구애하는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H는 빈털터리에 갈 곳 없는 나를 불쌍하게 보더니, 자신의 동네 방세가 싸니깐 오라고 했다. 난 서울생활에 지칠 때로 지쳤고, 어디든 기댈 곳이 필요한 시기였다. 난 더 이상 반지하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하니 H는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강남 물난리 때 나의 지하방에 와서 그릇으로 물을 같이 퍼내준 한 사람으로서 수해현장을 목격한 친구였다.

걱정 말라고 이번에는 하늘이 보인다고 했다. 그런 집이 어디 있냐고 하니, 자기 집 근처 빌라에 옥탑방이 있다고 했다. 나는 언제쯤 층수가 있는 지상에 살 수 있냐고 H에게 물으니, 너의 형편으로는 서울에서는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알고 있지 않냐며 되래 물었다.


층수가 있는 방에서 살려면 자기처럼 결혼을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이제 20대 끄트머리에서 30대를 향해 갈 무렵, 나의 주변인들의 결혼소식이 들려오고 친구들도 하나둘 남자친구가 생겼다. 모이면 주제가 결혼으로 자연스럽게 이동되었고, 불나방처럼 철없이 놀고 돌아다닐 때도 모두 한때라며 이젠 강남의 네온사인은 정신이 없다고 했다.


쌍문동은 오래된 다가구 주택이 많고 옥상에는 옥탑방들이 하나씩 있었다. 주인집들이 월세를 벌기 위해 하나씩 증축한 방들이었다. 내가 본 옥탑방에는 두 채가 있었다. 지하만 아니면 되니, 아주 마음에 들었다. 친구말대로 옥상에 앉아 하늘도 보고 빨래도 바로 해서 빨랫줄에 말릴 수 있었다. 내 옆집엔  여자 두 명이 같이 살고 있었고 4층까지 오르고 밖으로 난 옥상의 계단을 올라가면 옥탑이었다.  


쌍문동의 일요일은 평화로웠다. 문을 열고 나가면 옥상 평상에 누워 햇빛을 쬐고 이불을 널어 말렸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키우는 텃밭에는 대롱대롱 매달린 고추와 가지, 상추들이 자라고 있었다. 저녁이면 친구네 집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가까운 곳에 친구부부가 산다니 든든했다.

     

옆집 여자들은 도통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어느 날 그녀들이 내 집 문을 두드렸다.

“혹시 오늘 도둑이 들지 않았나요? ”   

  

너무 놀래 밖으로 나가니 경찰과 집주인 아주머니가 있었다. 한낮에 도둑이 문을 따고 방을 다 뒤집어 놓고 갔다고 했다. 저희 집은 괜찮다고 말을 하고 가만 생각해 보니, 왜 옆집만 도둑이 침입했는지 이상했다.

차이점은 내 동생이었다. 얼마 전에 남동생이 며칠 있다가 갔다. 경찰은 아마도 남자가 있는 집보다는 여자들만 있는 집을 터는 게 만만해 보였을 거라고 했다. 도둑들은 대부분 주변을 먼저 탐색한다고 했다.


동생이 아니었다면 내방도 도둑이 다녀갔을 거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빈집털이들은 도대체 옥탑방의 가난한 청년들 집에 들어가 가져갈게 뭐란 말인가. 그때 내방엔 이불과 얻어온 작은 TV와 행거가 전부였다.

TV도 올려놓을 때가 없어 슈퍼에서 버린 나무 사과박스를 주워다가 그 위에 올려놓았으니 도둑이 들어왔더래도 안쓰러워했을 살림살이였다. 혼자 사는 여자들이 왜 현관에 남자신발을 놓아두는지, 베란다에 남자옷을 걸어놓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문열쇠를 바꿔주고 창문에 방범창도 달아주기로 했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 둘은 무섭다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이제 괜찮다며 손을 잡아주고 등을 쓸어주었다.

그날 이후로, 욕실에 난 작은 창문도 걸어 잠그고 문도 다시 확인하며 외출하는 습관이 생겼다. 샤워를 하다가도 누가 보는가 싶어 창문을 여러 번 보며 불안해했다.

지하는 물난리, 옥탑방은 도둑. 서울에서 도대체 안전한 곳은 어디인지.

왜 불안과 불행은 없는 사람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것일까.

     

옥상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본다. 보이지 않는 서울에 내 집처럼, 보이지 않는 서울의 별을 찾으려 애썼다.

혼자 꿋꿋하게 지내온 시간들이 조금씩 힘겹기 시작했다. 외로웠다.

서울에서 집을 찾아 이리저리 이사 다니는 유목민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도시의 수많은 불빛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내 방의 불이 켜지는 날이 올까.  


그래도 앞으로 희망이 올 거라며 오늘도 나를 위한 밥을 차리고 먼지 묻은 방을 걸레로 닦아낸다. 다시 아침이면 젖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지하철로 서둘러 달려간다.  

매번 서울에게 당하면서도 나는, 아직은 도시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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