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줄 알았지만, 사실은 더해지는 것들

by 신잔디

잃어버린 줄 알았지만, 사실은 더해지는 것들. 여름 동안 재빠르게 피었다가 타버린 장난 같은 연애에 마음이 체해서, 큰 실망을 겪고 난 후였다. 계절에 관한 의욕도 없어질 즘, 나는 미워지는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주고자 머리를 짧게 잘렀다. 내 생일은 가을인데, 엄마는 그래서 내게 어딘가 서늘한 구석이 있으니, 따듯한 사람을 곁에 많이 두어라고 이르셨다. 낌새도 없이 서늘해진 이번 생일은 전해 생일날과는 사뭇 달렀다. 누구에게나 얌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날이 나에게는 그랬다. 나는 친구들의 전자인사에 뿌듯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외로운 척하고 싶었고, 때마침 집에서는 '생일이면 어쩔건데?' 하는 무심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사 남매나 되는 대가족으로서, 어릴 적부터 서로의 생일을 유난히 챙기지 않는 무심함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얌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날이 나에게는 그랬다.
나는 친구들의 전자인사에
뿌듯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외로운 척하고 싶었고,
때마침 집에서는
'생일이면 어쩔건데?' 하는
무심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조용히 지나치고 싶던 하루가 느리게 중간을 지날 때 즘, 시간의 정적을 깨고 난데없이 남동생이 낮술을 마시러 나가자며 졸라왔다. 원래대로 라면 벌써 포기가 빠를 녀석인데, 이날은 어쩐지 힘껏 눈썹을 구긴들 소용이 없었다. 털털대며 집을 나서니 그제야 가을 냄새가 났다. 파란 바람이 시원해진 뒷목을 타고 넘어갔다. 우리는 집 앞에서 언젠가 익숙했던 406번 버스를 타고서, 근년 동안 찾지 않았던 경리단길로 향했다.




내가 수제 맥주를 즐기게 된 건, 사 년 즘 지난 어느 날에 클래식 악기를 제작하는 제작가 지인의 흥분 어린 추천이 시작이었다. 당시 나의 맥주 취향은 마치 삼각 김밥을 주로 먹다가 이따금 거하게 브랜드 도시락쯤을 택하는 격으로, 마트 장을 볼 때 엄마(혹은 당일의 결제권자) 몰래 수입 맥주 몇 병을 골라 넣는 정도였다. 지인이 소개한 펍은 경리단길에 위치한 '크래프트웍스(Craft Works)'라는 펍으로, 자체 생산한 수제 맥주를 파는 캐주얼한 미국식 펍이었다. 펍을 소개한 지인은 분명히 내가 무척 좋아할 것이노라 확언하면서, 그집 맥주의 독특한 이름과 맛과 직원들의 매너와 안주의 가격과 기념품 종류까지 시간을 들여 정성껏 설명했다. 결국 근시일내에 지인 몇 명과 그 펍을 찾게 되었고, 그 길을 시작으로 나는 크래프트비어, 더 맛있는 맥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경리단길에 꼭 먹어봐야 할 최신유행 맥주가 있다고 어깨를 치켜뜨며 '맥파이'로 향했다. 자체 양조장을 가지고 6-7가지 맥주를 만들어 파는 맥파이(Magpie)는, 페퍼로니 피자로도 유명한 핏자펍 이다. 나는 추천을 받아 베스트셀러인 맥파이 '포터'를 마셨다. (사실상 이날 나는 경리단길이라는 추억에 먼저 취해서 맥주도 피자도 고르는 둥 마는 둥 했다) '포터'는 1700년대 런던 템스 강 주변에서 짐을 나르던 일꾼들에게 인기가 많아 '짐꾼(porter)'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영국식 흑맥주로서, 초콜릿과 커피 향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맥파이에서 가장 인기가 좋다는 맥파이 포터는 톡 쏘지 않는 정도의 부드러운 탄산과 묵직한 밀도를 뽐낸다. 면밀히 음미하면 다크 초콜릿향과 훈제향이 도는데, 잔이 다 비워질 때까지 향이 잘 유지된다. 거품은 지속력이 짧고 가벼운 편이고, 알코올도수는 보편적인 5%대로, 여러잔 마셔도 좋을 편안하고 맛있는 맥주였다. 잘 만든 흑맥주의 특징으로, 안주가 없이도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싶다. 가볍고 탄산이 샌 필스너나 라거에 비해서 조금만 마셔도 풍부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흑맥주의 큰 매력 중 하나.


맥파이 베스트셀러 포터(Porter)와 맥파이 브루잉 로고인 까치가 그려진 코스터.
맥파이 포터(Porter)는 톡 쏘지 않는 정도의 적당한 탄산 감과 묵직한 밀도가 특징적인 흑맥주로서, 찬찬히 음미하면 다크 초콜릿향과 훈제향이 도는데, 잔이 다 비워질 때까지 향이 잘 유지된다.


(왼) 입구에 붙은 까치모양 로고 (오) 나와 남동생이 앉았던 자리에 외국인 손님들이 앉아있다 (밑) 소스가 같은 피자를 반씩 주문할 수 있다. 페퍼로니와 하와이언 피자





20대의 마지막 생일날이었다. 생일이 대수냐며 볼멘채로 방바닥에 붙어있던 나는 맛있는 맥주 한잔으로 넋이 풀어졌고, 가을을 부르는 화창한 한낮의 펍에는 직원들의 활기가 풀어졌다. 한국어가 조금 서툴러 보이는 스타일 멋지신 직원분께 오늘이 생일이라 스스로 일렀더니, 특별한 날이 아니냐며 명랑한 표정으로 맥주를 한잔 사주셨다. 그렇게 나는 처음 만나는 얼굴에게서 명랑한 표정과 맛있는 맥주를 선물 받은 것이다. 이 기억은 나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어떤 것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이곳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 날을 기점으로 나는 한동안 수시로 이곳을 드나들며, 때로는 아펐던 경리단길의 기억을 명랑한 색깔로 조심 조심 다시 칠했다.



잃어버린 줄 알았지만,
사실은 더해지는 것들.



나는 몇 해 전에 바로 이곳에서 아직 남아도는 마음을 갈라내는 아픔을 알았다. 곧게 선 마음의 날이 겨우 무뎌질 즘엔 따끔한 열병도 앓았다. 크고 작은 이별은 나의 건강한 부분만을 챙겨서 저 멀리 도망가버리는 얄미운 도둑 같았다. 가을바람은 나에게 무엇을 일러주고 지나갔을까. 내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어떤' 것 들은 혈육의 애틋한 시선, 허전한 뒷목을 쓸어주는 계절, 모르는 사람의 명랑한 웃음과 참 맛있는 맥주 같은 사소함으로 쉽게 채워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렇게 매워지는 마음의 구멍을 토양으로 나에겐 많은 것이 자라나고 있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더 멋있어 보이게 하는, 조금 더 따듯할 줄 알게 하는,

여유로운 것들.





글 사진. 신잔디
그림. AM327 (insta:am.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