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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Dec 12. 2016

나의 네모 탈출기

나는 고작 캔 맥주를 사러 나가는 길에 매미소리를 듣고 울었다. 마음에 두른 단단한 껍질이 유연해지는 순간의 뭉클함 같은 것이었다. 코끝에서 퍼지는 뜨거움으로부터, 볼을 타고 흐르는 물기의 스침으로부터 나는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때는 누구에게 그 무엇도 의존할 수 없는 상태를 자유롭다고 부르고 싶었다. 나는 자유로웠기 때문에 나의 20대를 스스로 책임져야만 했다. 고졸 학력으로 택할 수 있는 직종의 나열은 불안하게 떨리는 두 다리만큼 정처 없이 다양했다. 나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사진을 고르고 편집하여 홈페이지를 꾸며주는 이미지 회사에 취직했다. 네모난 자리에 앉아 네모난 누군가의 순간을 자르고 이어 붙이기를 반복 하다 보면 하루는 각이 진 채로 끝이났다. 억지 자유를 외치던 나는 별 수 없이 성실하고도 상냥하게 네모난 사회 속 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때의 나는 열정이 없어 청춘이 못 되었다. 타들어가는 호떡의 단면 처럼, 나는 무언가 나를 좀 뒤집어주기를 바랬다. 내게는 아직 덜익은 부분 투성이라고.


 내가 하루를 사는지 하루가 나를 사는지 모를 피동적인 2년이 지나던 차에 불현듯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십 만원, 이십 만원씩 줄어가던 월급은 야금야금 축소되다 그나마도 하루 이틀, 보름씩 미뤄지기 시작했다. 순수를 자처하던 사장님은 어째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다음달에 당장 300%로 갚아주겠노라'며 꼿꼿한 고집을 피웠다. 그렇게 4개월, 플러스 300%가 아니라 마이너스 300%를 찍고서야 나는 늘어진 썰물처럼 회사를 떠밀려 나왔다. 사장은 난파된 회사 속에서 묘연하게 사라졌다. 나는 네모난 내 자리를 잃어 상심했다. 내 이름 뒤로 덧붙여질 무언가가 없다는 이 간단한 사실은 네모난 세상의 외곽선이 되어 맴맴 돌다가 기회를 틈타 나의 어깨를 조였다. 나는 사회에서 친절함을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에게는 참 무례한 인사였다.




나의 네모 탈출기..



 유치원(정확히 하자면 피카소미술학원 유아부)시절부터 나는 종이를 좋아했다. 흔하고 얇팍한 색종이 보다는 화려한 문양의 학종이나, '색지'라고 불리우던 두꺼운 종이를 더 좋아했다. 이따금 장난감 대신에 한지를 사다가 만지작거리곤 했는데, 그러다보면 갑자기 홍시가 먹고싶어졌다. 어쨋든간에, 종이를 매만지는것과 쓸데없는 공상을 하기를 매우 좋아하였던 나는 자연스럽게 내 손으로 직접 양장 제본하여 나의 책을 만들어 보고자하는 원대한 소원을 가졌다. (나의 유별난 종이사랑은 다음 기회에 더 상세히 말하고자한다)


 나는 '쫒겨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좀 써먹을 수 있는 근사한 기술이나 몇가지 연마해두어야겠다' 는 심산의 일환으로 이듬해 책을 만드는 인쇄소에 취직했다. 이번엔 누군가의 이야기를 자르고 붙이며 하루를 보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곳이 과연 '네모나지 않았다' 는 것이다. 우선에 내 자리는 네모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에겐 딱히 내 자리란 것이 없었는데, 그것은 동시에 모든 자리가 내 자리인 것 과 같았다. 시간이 쌓일수록 내가 차지하는 공간은 늘어났다. 나는 여러 자리를 휘젓고 다니는것이 좋았다. 업무는 주로 원본의 낡은 부분을 잘 다듬어 정돈한 뒤 복사본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는데, 제단기와 제본기를 다루는 일은 생각보다 강렬한 긴장감과 동시에 쾌감이 드는, 말 그대로 입체적인 감정이 쓰이는 업무였다. 무엇이던 코 앞에 놓이기만 하면 빤듯하게 잘라내는 제단기 앞에서 나는 걱정의 꼬리를 숭덩 잘라내는 상상을 했다. 깨끗하게 고안된 책 표지를 감싸입힐때면 꼭 다려진 옷을 착 털어 걸치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이 일들은 그저 네모난 일들이 아니었다.


 다음은 둥근 나의 두번째 사장님. 야생 곰처럼 배가 소복이 나온 사장님은 보기와 다르게 매우 부지런하셨는데, 특히나 이른 아침 시간을 꼬박 아껴쓰는 분이셨다. 그는 종이냄새를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그 점은 자신의 일을 깊이 애착할 때에 풍겨낼 수 있는 에너지에 대하여 나에게 좋은 견해를 만들어주었다. 매일 점심에는 허리춤 오는 재단대를 식탁 삼아 옹기종기 모여서 선 채로 사모님의 도시락을 먹었다. 식사 땐 꼭 라디오를 틀었다. 작고, 아늑하고, 먼지가 넘치는 공간은 늘 분주하고, 예민하고, 시끄러웠지만, 재미가 있었다. 기우는 노을 볕을 타고 부유하는 먼지들과 재생지 더미의 포근한 냄새. 그 냄새들이 좋아서 나는 자주 감상에 젖어들었다. 이따금 감정의 파도라도 심할적에는 널어진 이면지에 짤막하고 두서없는 말들을 적거나, 가끔은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 즘에야 나는 미래가 아닌 행복에 관하여 초상하기 시작했다. 불안한 바람이 쉭쉭 드나들던 마음 안의 구멍을 더듬어 느꼈다. 우선 나는 좀 헝클어진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싶었고, 다른 방법으로 말할 줄 알고싶었다. 누군가에겐 작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수 많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더 본격적으로 주목하고 싶었다.


 마침내 내가 온전히 나만을 위한 길을 가 보기로 결단했을 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변화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오로지 나만을 위한 독단적인 선택을 했고, 그런 나를 책임질 용기가 있었다. 모서리처럼 도사리는 '타인의 평가' 가 아닌, '스스로를 위하여 갖는 책임감'을 몸소 느끼니, 그제야 나는 비로소 청춘이었다. 우리는 과연 내일의 나도 알 수가 없고 다만 오늘의 나를 알 뿐이다. 나를 앎에 있어서 지쳐서는 안되었다. 공허한 마음을 부등켜 한참을 더듬어야만 포상처럼 다가오는것이 용기 였다.

 인쇄소를 그만두면서 나는 사장님께 베짱이로 살고 싶다는 고백을 담아 짧은 노래를 선물했다. 사장님은 호방하게 웃으며 매 점심시간에 라디오 대신 네 노래를 반찬삼아 밥을 먹겠노라 약속하셨다. 나는 과하게 웃으며 걸어 나오다 길에 서서 조금 울었다. 마음에 두른 단단한 껍질이 유연해지는 순간의 뭉클함 같은 것 이었다. 그 날 나는 어떤 네모에서 탈출했다. 그리하여 또다시 황량하도록 자유로와진 나는 형체가 없는 나, 어디로 갈지 모르는 나, 말하자면 청춘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옆엔 늘 한결같이 속 시원한 나의 친구, 맥주 한잔이 있다.





글. 사진 신잔디
그림. AM327 (insta:am.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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