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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Mar 23. 2018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중

최선을 다 하여 살아가고 있는데도 주위를 돌아보면 어쩐지 한 곳에 고여있는 기분이 든다. 봄은 그런 나의 억울함을 외면하고 달콤하게 분다. 미뤄오던 일들은 처참하게 미뤄진 채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노려본다.  

“내일 알 길이 없으니까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철철 가싯길도 밟아야만 단단해지는 것 이 아니겠어요. 좀 웃어요. 따듯해질 때까지.”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억지로 무언가 해 내는 방법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행히 엄마의 부지런한 천성을 이어받은 나는, 한 없이 게을러지는 정신의 휴가를 다소 쓸데없는 일들로 바쁘게 쓴다. 모르는 번호의 버스를 타고, 주머니 영혼을 털어 맥주를 사 먹고, 도서관에 가 책은 빌리지 않고 떡라면만 시켜서 먹는 다던지,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해 질 녘까지 버틴다던지. 그렇게 제 멋에 취해 한바탕 시간을 탕진하다가 보면 그제야 제 자리로 좀 돌아올 줄 알았지만. 어쩐지 자꾸만 제 길을 잃어버린다.


 뭘 해도 먹고는 살겠지. 했던 굳건한 믿음이 점점 말랑->물렁->흐물흐물 해 져 가더니, 급기야 국물처럼 흘러 떨어질 것 만 같았던 그런 시기에 나는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집에서 도보 15분 거리의 작고 좀 작고 너무 작지만 온전히 나만을 위했던 작업실을 얻은 직 후였다. 그곳은 내 밤의 안식처이고, 감정의 생성이며, 도약을 위한 첫 단추로 간주될 참이었다. 하지만 나는 (작업실 운영비와는 별개로) 갑자기 돈을 좀 많이 벌어야 했다. 하여 천성의 부지런함을 굳게 믿고 두 마리 살찐 토끼를 잡아보자 는 격으로 6개월간 전시간 직장에 출근했다. 이른 아침 두 끼의 도시락을 챙겼고, 퇴근 후에는 작업실에 도착 해 식은 지 한참 되어 딱딱하게 토라진 도시락과 뜨거운 정수물을 먹었다. 그 무얼 하기에도 낙낙했던 나의 멋진 작업실은 유독 식은 도시락을 까먹을 때에만 아주 작았다.


 물론, 그 생활은 얼마 가지 않았다. 간간한 신장염과 한 ‘탕’의 돌발성 난청을 겪고 나서 나는 겸허하게 나의 일정을 축소했다. 축소당한 쪽은 작업실에 나가는 일이었다. 스스로에게 만족할만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데 대한 죄책감은 잠자리표 지우개처럼 내 사는 정성을 석석 지워나갔다. 돈벌이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택한 삶의 뒷면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선택한 삶이 통째로 내게 당도하였을 때, 나는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먼 곳을 보고서도 도저히 가까운 곳이 보이지 않는 그런 시점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좀 과감할 필요가 있었다. 고심 끝에 좀 무리를 해서라도 독단적인 시공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낯선 세상을 표류하며 이야기를 만들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엮은 이야기를 부르고, 말하고, 나누고 그 안에서 수집과 충족이 거듭 될 어떤 날들. 오늘 꺾어 마신 술들, 마주친 사람들의 다양한 얼굴과 끌어낸 말들, 오늘 내가 뱉은 말, 주워 담은 생각들을 씨앗으로 무성하게 자라날 상상의 가지, 감정의 열매.. 그런 환상적인 여건에 한 번쯤 나를 떨어뜨려주고 싶었다. 그 속에서 내가 무엇을 만들고, 부르고, 기록할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헌책방에서 10꼬룬 (520원)에 구매한 베토밴 체코필하모닉 연주회 실황 음반. 이걸 사고 콩콩 뛰다 넘어질 뻔 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저자 보후밀 흐라발이 자주 다녀갔다는 펍. 그의 얼굴이 걸려있다 / 새로 산 귀여운 양말, 이 양말을 신고 자면 미셀 공드리풍의 꿈을 꿀 것만 같아 샀다

 지금에 와서 좀 드는 생각은 이따금 나의 '최선'이 애초 계획과는 좀 먼 쪽으로 기울어지는 와 중에도 그 또한 결국 내 귀중한 삶의 한 덩어리라는 것이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꿔보려 노력하기보다는 사는 속 속을 꾸며보자는 생각을 했다. 이 봄 지나가면 나는 또 어디선가 최선을 다 해서 돈을 벌고, 불평불만이 가득한 음악을 만들고, 마신 술에 관해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그것뿐인 삶임이 여전하겠지만 고 것대로를 아름답게 여기는 일, 내 식구로 받아들이는 일 이야말로 하나의 도약이 아닐까. 그 안에 오로지 나로서, 나만이 내는 수수한 개성을 찾아내어 만족하고 싶다. 삶에 쓸려도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어저께 펍에서 우연하게 만난 친구 줄리앙의 취중 명언을 읊어본다.

 “I’m not just surviving, I’m living."



글. 신잔디

사진. 신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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