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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Jul 13. 2018

나와 호찌민과 나의 오빠


열기와 물기, 나무와 오토바이가 폭폭 넘쳐나는 곳, 사람 냄새 짙은 것이 꼭 아무개 고향 같은 곳. 푹푹 삶아지는 와중에도 본연의 수다스러움이 도시 전체로 떠다니는 곳. 그곳에 나의 가장 첫 번째 친구가 있다.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목이 탁 메이는 나의 완전한 내 편. 나는 사지에 몰릴 때만 그에게로 도피를 한다.



 유별난 나의 <오빠사랑>에 친구들과 구슬을 치고 딱지를 치고 좀 자라서는 당구를 칠 때까지도 오빠는 내 눈치를 살펴야 했다. 나는 오빠가 하는 건 뭐든지 따라서 하고 싶었다. 오빠가 안경을 끼면 나도 안경을 끼고 싶고 오빠가 허리가 아프니 이젠 나도 허리가 아프고 싶어 질 지경이었다.



나와 호찌민과 나의 오빠



 이 도시는 땅으로 쏟아부어진 열기를 두 가지 방패로 감싸고 있다. 나무와 오토바이. 호찌민 곳곳에는 나무만큼 오토바이가 많고, 오토바이만큼 나무가 많다. 나는 길가에 있는 뒷 좌석을 부엌으로 개조한 놀랄 만큼 귀여운 <쌀국수 바이크> 그리고 손수레(일명 리어카)에다 오이, 땅콩, 덜 익은 망고, 깨 들은 고춧가루와 쌀로 만든 쥐포 같은 것을 싣고 손님이 주문하면 채 칼로 착착착 썰어 맛스럽게 비벼주는 이름은 모르는 음식을 파는 그분들이 참 좋았다. 점심때가 되면 사람들은 가로수 그늘 아래로 모여 쌀국수며 덮밥, 반미 샌드위치 등을 손에 들고,  “엊 저녁엔 뭘 했어 그래?” “뭐 별거가 없어서 심심하게 눠 잤지 뭐, 오늘 저 짝에서 아무개네 잔치 벌인다는 가본데.”처럼 들리는 정감이 넘실대는 수다를 나누시는데, 그 모르는 말소리도 나는 괜히 좋았다. 나도 가로수 그늘에 앉아서 밥을 먹어보고 싶었지만 오 분만에 발사되는 땀줄기에 한 번 웃기만 하고 포기했다. 대신에 내가 길가에서 자주 즐겨먹은 스낵은 생 코코넛. 눈을 크게 뜨고 “코코넛 플리즈”라고 말하면 코코넛 아저씨는 해적처럼 멋지게 칼을 휘둘러 크고 새파란 코코넛을 팍팍 까서 빨대 구멍만 딱 내준다. 좀 더 신 식으로는 플라스틱 컵에 과육까지 박박 긁어 담아 주시는 분도 있다. 맛은 꿀맛, 사는 맛, 햇볕 맛이다.

해적처럼 멋지게 칼을 휘둘러서 쌩 코코넛 쥬스를 만들어주시는 중인 코코넛 아저씨




 오빠는 ‘다음에 내가 크면 미국에 갈 거야. 나는 이 곳에 살기엔 꿈과 마음이 너무 크다’ 하고 말했다. 나는 그런 오빠가 너무나 멋져서 매일 밤마다 오빠를 따라서 미국에 가는 꿈을 꾸었다. 오빠는 미국으로 갈 만큼 크기 딱 직전에 허리가 아팠다. 이것저것의 시도에도 별반의 차도는 없고 통증이 심해지니 오빠는 결국 고등학교를 1년 휴학하고 서울에 유명하다는 병원에서 정기적인 입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언젠가 엄마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오빠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하고 잠에 들어가 있었는데, 나는 유리창에 비춘 오빠 얼굴 위로 그가 꾸는 꿈을 길게 그려보았다. 오빠는 그대로 꿈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내가 누워 아프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꿈이 없으니까, 오빠 대신에 내가 아프면 더 좋을 텐데.




 운 좋게도 나는 현지인의 고향집에도 놀러 가게 되었다. 호찌민에서 차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이름은 모르는 곳. 지나가면 먼지와 발자국이 찐하게 남는 황토색 비 포장도로가 길로 있는 곳. 도시보다는 온갖 느낌이 넘치는 곳! 3-40평짜리 땅바닥에 수박을 빽빽이 풀어놓고 좋은 놈을 골라내는 엄청 큰 수박 가게. 철물점처럼 보이는 허술한 가게는 가까이 가보니 최신형 핸드폰 가게였다. (그 친숙함 속에 아이폰이 진열되어있는 광경이란!) 맛난 코코넛을 파는 문이 없는 가게. 문 대신 사탕수수 엑기스를 짜내는 무시무시한 기구가 서 있는. 호찌민 보다 열 배로 나무는 많고 오토바이는 없는 곳. 그냥 그대로 오래오래 있고 싶은 곳.

문 없는 카페와 카페 안 쪽의 멋진 인테리어


빨대 구멍만 남겨놓고 팍팍 까주신 코코넛 / 핸드폰 가게 가판
무시무시하게 마시가 있는 두리안 / 그 곳의 길


쓰고 귀한 맛을 내는 여주 차와 그 날의 맥주 (맥주 옆에 놓인 소고기 스튜는 정말 황금의 맛이었다!)



 나는 심지어 20대가 되어서도 오빠를 쫓아다니고 싶었다. 나에게 오빠는 늘 나보다 크고 나보다 사랑받고 나보다 성격 좋은 사람, 용서를 좋아하고 사람에게 잘 못하지를 못하는 사람. 과감하고 용감하고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 늘 내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오빠와 있었던 단 둘의 일은 거의 모두 기억한다. 오빠가 나를 때어 놓고 주승이 오빠를 만나려고 살금살금 하다가 한 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의 표정, 내가 부모님 지갑에 손을 댔을 때 눈빛으로 던진 얼음장 같은 무언의 꾸중, 아무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나를 위해 흘려준 눈물을 기억한다. 기억은 그 한 개 한 개가 내게 사랑으로 사무쳐, 이따금은 잠을 못 이루게 사무쳐져 있다.

그리고 또 사무친 것은 바로 이 기가 막혀버리는 맛의 바베큐




 호찌민에서는 신호등보다 제 손을 더 의지해야만 한다. 차 길을 건널 때 파랑 불이던 빨강 불이던 오토바이는 정차하지를 않는다. 손을 높이 쳐들고 ‘나를 치면 슬퍼할 거야’ 하는 눈빛으로 살금살금 가는 것이 그곳의 신호이다. 첨에는 통 용기가 안 나서 오 분이나 길을 못 건너고 서 있으니 뒤 편에 가판대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쯧쯧쯧..'하며 손을 잡고 길을 건너 주셨다. (칠 일이 지나니 용감 해져서 이제는 빨강 불이던 무단횡단이던 척척 잘 하는 사람으로 되었다) 어쨌든 이 곳은 좀 독특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느낌이다. 모든 것을 느낌으로 척척 해야 하는 곳. 그것도 이 곳에 매력인 거다. 오빠가 정말로 호찌민으로 가버린다고 말했을 때는. 넘치는 서운함에 마음이 좀 삐뚤어졌다. 나는 오빠도 아니면서 오빠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아닐지 고민했다. 내가 그러든 말든 오빠는 곧 가 버렸다. 나는 오빠가 쓰던 비워진 방에 이것저것을 빼고 더해 나만의 근사한 작업실로 꾸몄다. 밤이 늦어도 오빠는 돌아오지는 않는 방에서 나는 뒤숭숭하게 뒤척이다가 잠을 못 이루고 안 방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렇게 오빠는 내게서, 오빠 방에서 진짜로 가버렸다. 십 년만에 얻은 내 방, 돈 안내는 이쁜 작업실, 한쪽으로 오빠 겨울 옷이 내 허전한 기분만큼 접히고 쌓여있는 그 방에서 나는 떠난 오빠를 가끔씩만 미워했다.  

느낌으로 건너야 하는 호치민 시내의 건널목, 내 옆으로 바로 횡단보도가 있지만 이 곳에선 도로에 그려진 흰 그림 따위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호찌민에 가기 전까지는 정말로 그랬다. 그 예쁜 무더위를 겪기 전까지는. 이 천 원어치의 수북한 게 다리 껍질을 뿌셔 보기 전 까지는. 아기 강아지 ‘사랑이’를 만나기 전 까지는. 최고로 맛있는 연유 우유를 마셔보기 전 까지는. 밤과 낮 활력으로 가득 찬 오빠의 눈빛을 보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하게 오빠를 가끔씩만 미워하면서 호찌민의 가득히 차 오르던 열기와 물기를 떠올린다. 사랑이를 떠올린다. 그러고도 넘치게 남는. 사무치게 ‘위하는’ 마음을 쓰다듬는다. 나에게 오빠는 처음의 친구, 비밀의 그늘막. 그리고 나의 오빠이니까.

연유가 믿지못하게 적당히만 함유된 베트남 우유 / 오빠와 동거중인 아기 강아지 '사랑이'가 졸고있다.






'나와 호찌민과 나의 오빠'

글  신잔디

사진  신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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