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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Aug 03. 2018

백 년 만의 여름의 일지

1. 가내수공업의 시작. 모든 것을 혼자서 하고 있다. (국가에서 공짜로 받아먹은 지원금은 내가 만든 돈이 아니라 '모든 것'의 범주에 끼워넣기 좀 그렇지만, 그건 그렇다고 쳐버리고 어쨌든이라는 말로 정리해 버린다. 어쨌든,) 싼 오디오 프리와 싼 마이크를 사놓고 악기에는 요즘 제일 평가가 좋다는 최고로 비싼 줄을 걸었지. 악기상이 내게 "이게 역사는 없지만 성능은 끝내줍니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줄을 걸면 내 악기에도 역사가 없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 들어서 '그냥 역사가 길고 익숙한 줄로 하고 싶은데요..'라고 말하진 못하고 호기심 충만한 청소년처럼 "그럼 해볼게요!" 하고는 집에 돌아와 역사 없이 끝내주게 반짝거리는 줄을 한동안 쳐다봤다. 어쨌든, 나는 더듬거리며 만든 내 음악을 좀 더 혼자의 것으로 다듬고 붙이고 갈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아닌 나를 만족시키는 곡으로 나의 곡은 두 번째 삶을 맞이하는 중이라. 고되고 맥이 축 빠지는 순간은 무엇도 하기 전이라는 것을 나는 조금 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고되지도 않고 맥이 가득 찬 여름을 보내고 있다. 남동생이 떠나고 오빠가 떠나고 그리하여 내가 남은 방에 나는 비싼 줄을 건 나의 악기들과 싼 장비를 가득 진열해놓고 내 멋대로 편곡과 녹음을 반복하며 지낸다. 다음 주엔 양재동에 근사한 작업실에서 본격적인 녹음이 시작된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나는 내 노래를 다시 쓰다듬는다. 누구보다 나에게로 찬란할 가을을 기다리면서.


2. 아침의 일과. 아침 공복에는 청주에서 받은 귀한 구절초 조청을 작은 숟갈로 한 움큼 떠서 빨아먹는다. 그러면 쓰린 속이 진정되면서 금방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것을 느끼면서 물을 조금만 마시고 양치질을 하고 다시 누워서 골라지는 책 몇 페이지를 읽는다. 요즘은 김연수의 신간 <언젠가, 아마도>를 두 화 씩 두 번 읽고 있다. 그러면 엄마가 복숭아를 갈아서 준다. 장호원에서 올라온 이 햇사레 복숭아는 정품은 아니지만 사탕보다 더 달다. 박남옥 아줌마가 직접 챙겨가지고 올라오신 것이라 감사함이 단맛으로 두배 더 쳐져있지. 박남옥 아줌마는 우리가 장호원에 살 때부터 늘 철따라 복숭아를 챙겨맥여주셨다. 잊을 수 없는 복숭아 일화로는 바구니에 대여섯 개를 담아둔 복숭아를 뚜비가 감쪽같이 먹어치우곤 까맣게 주름진 씨를 하루에 한 알씩 토해내던 일, 집에 아무도 없자 문고리에 걸려있던 누가 줬는지 모르는 까만 봉지에 사탕 같은 복숭아 몇 알이 들어있던 일. 그런 일을 떠올리면서 갈아진 복숭아를 신나게 마시고 오빠가 베트남에서 보내준 엄지손가락 만한 로얄제리와 피시 오일 캡슐을 한 알 씩 삼키고 잠깐만 가만히 서 있는 아침.


3. 그리고 여름의 시작. 그러면 정말의 여름이 시작된다. 나는 하도 답답하거나 매트로놈 소리에서 벗어나야 할 때만 잠깐 산책을 하는데, 호찌민에 다녀와서 호찌민이 너무 더워서 아주 힘들었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된 이 곳의 완연한 더위에 늘 참 할 말이가 없다. 나는 아! 덥다. 더워서 죽겠다. 고 말하면서 죽지 않기 위해 얼른 집으로 돌아온다. 안방 침대에 누우면 창문으로 하늘을 볼 수가 있는데 믿지 못하게 아름다운 여름의 하늘에 감탄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올여름에는 내게 여름의 상징과도 같았던 맥주가 좀처럼 없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만 무언가에 전력적으로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과 멀어진 여름으로 보내고 있다. 이 여름은 백 년 만에 왔다고 하던데, 백년만에의 여름에 이러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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