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로움에 멋 부리기

by 신잔디

우리는 날마다 으스대는 사람들 숲에서 말끔한 모습을 유지 하려고 얼마나 많고 다양한 수고를 하고 있나, 우리는 애초에 배려 없이 짜여진 맹목적 관계 속에서 적절한 도리를 다하려고 또 얼마나 많고 다양한 수고를 하고 있나,


고독감이 밀려오는 기분이 들어서, 곰팡슨 옛 일기장을 벅벅 닦고, 비주류 영화 목록을 찾아보고, 선율이 허전한 음악을 선곡한다. 한껏 무드 좀 잡아볼까 유난하는 와중에, 이것도 저것도 귀찮고 다만 가만히 있는 나를 누군가 귀찮게나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치자, 나는 찬 바닥에 벌렁 누워버린다. 천장 벽지 패턴은 보는 축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떠다니는 먼지 소리를 듣다가 삐딱히 누워 지난 문자메시지 함을 뒤져본다. 그리곤 내 맘대로 상대방의 인격을 정의하면서, '조금 망가진 나를 받아줄 사람이야 많겠지만, 아직 이름이 없는 이 기분을 씻겨 줄 사람은 아마도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딘가 명확하게 설명 할 수 없는 나, 시간은 유난히 느리게 가고 이런 날은 반드시 주머니도 가볍다. 누워있다 서 있다, 창밖을 한번 보다가 거하게 한 숨 한 번을 크게 쉬고 나서야, 나는 고독감이 아닌 외로움을 느낀다.



우리는 날마다 으스대는
사람들 숲에서 말끔한 모습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많고 다양한
수고를 하고 있나,



지치지 않고 우리를 내리쬐는 시선, 앞 다투어 옆구리를 찔러오는 경쟁의 강요, 큰 진심에 외면되는 작은 진심들의 틈새에서 자유란, 힘껏 찾아내야 간신히 발견되는 숨은그림찾기의 상품처럼 되어가고 있다.
나의 꿈은 여유 있는 사람이다. 모든 편안함을 사랑하고 애착한다. 나는 여유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선은 자연스러운 사람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했다. 유년시절 나는 무척 자연스럽지 못한 학생, 딸, 어린이였다. 언제나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지점에 머물러 있었고, 적당히 튀기를 좋아했지만 감정 기복이 심한 탓에 엉뚱한 방향으로 적당히 튀었다. 꿈에 나온 이야기를 실제로 착각하여 친구들에게 연극을 시키고, 이상한 춤을 추면서 걸어 다니기를 자주했다. 친구들은 나를 불편해 했다.

'KINFOLK' magazine vol.13 , 34page 발췌

어느 심심한 날, 나는 나처럼 신나는 사람이 오늘은 도무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인지 고민했다. 밤새 내리던 비는 그쳤고, 주방에는 두꺼운 계란말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맹렬하게 두꺼워지는 나의 우울함과 맞닥뜨렸고, 뻗어나는 가지가지의 뿌리는 대부분 후회, 창피함, 열등감, 욕심 등이었다. 화를 느꼈고, 누군가에게 '사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천장으로 두고 떠다니는 먼지 소리를 듣다가, 빈종이 위로 나에 관하여 하염없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 내가 한 거짓말, 가장 심하게 들은 욕과 칭찬 같은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힐 경지의 엉뚱함 이지만) 그것들을 적어서 어디론가 편지처럼 보낼 작정이었다. 그 상대가 HOT 토니였는지, 미국에 사는 이모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어쨌든 목적을 가지고 섬세하게 적었다. 그리고는 신기한 기분전환을 경험하였는데 바로 혼자 있는 시간의 재미,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상태에 관한 만족감이었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우울한 기분을 멋지게 즐기는 수단으로 종종 와인이 소재한다. 얼굴만 한 글라스를 찰랑 휘저어 흐르는 윤기를 확인하는 그 순간, 외로운 기분 정도는 절차 격일 '차가운 도시 여자'가 된 기분이 들겠지? 하지만 대본이 없는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나만의 외로움을 위해 품질 좋은 와인을 준비하기란 뜻밖에 쉽지가 않은데, 간단하게 와인은 혼자 즐기기에 양이 너무나 많고, 가격도 만만찮다. (그리고 나에겐 더 중요한 말이 남아있다)
바로 차가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의 외로움을 위한 우아한 맥주를 소개하고 싶다. 나의 외로움에 엣지를 부여해줄 오늘의 맥주는, '듀벨(Duvel)'. 맥주 강국 벨기에 출신 스트롱 골든 에일, 말그대로 '쌘 황금빛 에일' 맥주이다. 처음 이 맥주가 만들어졌을 당시 그 훌륭한 맛에 매료되어, '악마의 맥주'라고 일컬어졌다 하여 '듀벨'이란 이름이 붙었다.

'Duvel' Instagram 발췌
듀벨(Duvel, 벨지안)의 특징 으로는,
1) 알콜도수가 높고 (8.5%)
2) 향긋한 과일향이 풍부하며
3) 아름다운 거품이 오래도록 지속된다.

에일(상면발효 방식)맥주는 그 생산과정에서 긴 발효/숙성 과정을 거치며 특유의 효모향을 가진다. 그런데 아주 차가운 상태에서 마시게 되면 그러한 에일 특유의 발효향과 양조자가 의도한 다채로운 캐릭터의 향들을 재대로 즐기기가 어렵기 때문에, 듀벨을 가장 맛있게 마시는 팁으로서, 너무 차가운 상태이기 보다는 11도 정도의 약간 서늘한 온도에서 즐기는 것을 추천한다. (일반적으로 냉장고에서 꺼내어 상온에서 10-15분 정도) 또한 그 향이 고르게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와인잔과 같이 속이 봉긋한 U자 형태의 잔에 마셨을 때 가장 풍부한 향을 즐길 수 있다.

듀벨과 초콜릿은 아주 잘 어울린다.
맥주는 초콜릿과 아주 잘 어울린다. 특히 벨지안 맥주들은 알콜도수가 높고 풍미가 진한 타입의 맥주가 많기 때문에 와인 처럼 천천히 즐기기에 좋은데, 이때 치즈나 초콜릿은 더없이 훌륭한 안주가 된다.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알게 되면서 나는 많이 변화했다. 나는 유년시절 내가 보인 이상한 부류의 행동 양상이 바로 나와의 소통의 결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차츰 발견했다. 나는 나에게 외면받아 외로왔고, 외로움이 파낸 자리를 채울 줄을 몰라 '관심병 종자'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부질없는 말과 시를 쓰기 시작했다. 길모퉁이에 버려진 씨네21 잡지를 발견한 뒤로 독특한 영화를 찾을 줄 알게 되었고, 팝송을 좋아하던 친오빠에게 늘어지기 직전의 테이프들을 물려들으며 점차 '자세한' 취향이 생겼다. 나는 계속해서 쓰고, 보고, 듣는데에 시간을 들이면서 꾸준히 나와 대화했다. 나의 외로움에 멋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사람들 숲에서 자연스럽게 지내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타인 보다 나 자신에게 멋져보이기를 우선하면서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수순의 멀쩡함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여유 있는 사람이 되자는 꿈을 꾼다. 그리고 혼자 맥주를 마시는 시간만큼은 늘 솔직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쓰기로 했다.



우리는 애초에 배려 없이 짜여진
맹목적 관계 속에서 적절한 도리를 다 하려고 또 얼마나 많고 다양한
수고를 하고 있나,



이따금 지나친 수고에 반드시 보답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정기적 이지만, 불규칙 할 줄 아는 이러한 보답의 시간은 반드시 혼자일 필요도 있다. 가족과 연인, 친구나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시간 말고 오롯이 나와 마주하는 시간. 바로 그 시간을 위로하고 응원한다.




글 사진 . 신잔디
그림. AM327 (insta:am.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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