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채로 묻어둔 마음무덤을 발동으로 톡톡 두드려본다. 봄 가을, 낭만의 태풍이 이는 기분에도 잠잠히 지낼지. 별난 날, 우연의 지진에 흔들려 튀어나오진 않을지, 아니 어쩌면 뿌리째 뽑아낼 방법이라도 있을지 고민하면서, 어설프게 웃으며 앞을 내다본다.
어차피 잘 안 될 것 같은 일에 눈치 없이 마음이 꽁꽁 묶여버렸던 적. 뼛속까지 쿨하게 살고 싶은 내 목덜미를 움켜쥐는 '기대하는 마음'. 최신 유행 드라마에서 '엄마가 있는데 뭐이 외롭냐고' 다그치는 엄마에게 '나 너무 심심해' 라고 콕 집어 대답하는 여주인공의 심심함의 깊이를 나는 안다.
문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것은
설레임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태평양 파도처럼 넘실대는 기대감에
멀미하듯 토해져 나오는 용기이다.
언젠가 한창 떠들썩했던 <마녀사냥>이라는 연애상담 프로그램에서 성시경은 '그러지 말고, 맥주 한잔하자고 자연스럽게 말해봐요' 라고 식은 죽을 원샷하듯이 이야기했지만 (그 멘트가 비단 프로그램 대본일 뿐이었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진지하게 원망했다. 프랑스 공포 영화 보다도, 우황청심원 없는 번지점프 보다도 더 큰 담력을 요하는 일이 바로 그 '맥주 한잔해요' 라고 말하는 일이고, 다이어트 혹은 금연만큼이나 험난한 시도를 요하는 일이 바로 '마음에 드는 이 앞에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는 일'이라는 것을, 성시경은 모르는 것이다.
오랜만에 내 마음에 꼭 들었던 사람은 수염이 북실하고 피부가 검게 탄 아저씨 스타일의 건장한 남자로, 이따금씩 알이 작고 길쭉한 옛날식 안경을 끼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힐긋거리면 몇 초 지나 뒤따라 힐긋거리는 예의를 부리는 사람. 잠깐 고민해서는 결정할 수 없는 색상의 추리닝 바지와 목주변이 아슬하게 바래진 티셔츠는 그만의 세상에만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어떤 여유로움을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단 한쪽 입꼬리만 올리면서도 부끄럽게 웃을 줄 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는 어느 곳에 서 있어도 그곳 벽 색깔이 되는 어딘가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약 두 달, 아마도 육십일, 분명하기론 한 계절을 통째로 손톱만 물어뜯다가, 사지로 내몰린 범인처럼 말했다.
'맥주 한잔할까요?'
하지만 다이어트에도 젬병이고 금연은 시도조차 해본 적 없는 나는, 결국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는 일에는 실패했다.
나는 바다에서 꽤 오래 자랐지만, 홍합이나 굴을 못 먹는 촌스러운 인사였다. 처음 가는 음식점에서 예상이 가능찮은 메뉴를 주문해 볼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지인이 기계적으로 메뉴 판을 드밀면서 무조건 IPA 맥주를 주문하라 강요하기 전까지 나는 이름만 들었던 IPA 맥주를 고르는 시도를 감행하는 사람이 못 되었다. 처음 IPA 맥주를 먹어봤을 때, 나는 꼬꼬마 적 처음 피망을 씹고서 증오하는 표정으로 피망을 째려봤을 때와 같은 심정을 느꼈다. 내가 빡빡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맥주는 나의 언짢음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점점 더 맹렬하게 써졌다. 한동안 IPA를 멀리 피해 다니던 나는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쓴 맥주의 인기가 점점 들끓어지는지 반드시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맥주를 좋아하는, 북실한 수염을 가진 잘 모르는 한 남자에게 IPA에 관해 물었다.
I.P.A(India Pale Ale)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India)'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위한 '밝은색(Pale)'의 '맥주(Ale)'로서, 효모를 그대로 살리는 방식으로 제조되는 에일 맥주가 인도까지의 먼 거리를 이동 중 부식해 버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홉'이라는 열매식물을 재료로 첨가하여 방부작용을 하게 한 맥주를 뜻한다.
런던에 소재한 민타임(Meantime)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민타임IPA는 부드럽고 고소한 베이스에 신선한 자몽이 가지는 정도의 상큼하고 화사한 홉 향이 가미되어있다. 덕분에 IPA맥주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도 전혀 부담이 없다.
국내 대부분의 펍에서 서브되는 IPA는 맵고, 쓴 맛이 도드라진 미국식 IPA맥주가 더 많기 때문에 자칫 'IPA는 쓴맛이 강하다'고 인식하기가 쉽지만, 사실상 영국식(정통) IPA가 지니는 적당한 홉의 향긋함과 에일맥주 본연에 고소함의 조화는 정말로 고급스럽다. 따라서 요즘 열풍인, IPA 맥주를 시도해보고 싶다면 반드시 영국식 IPA도 함께 시도해보기를 권한다. 용기를 갖고 시도해도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수염 난 남자는 나의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볼 빨개진 말투에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곧 어색한 이 상황을 타개하리라는 듯이 똑바르게 하, 하, 하 하고 웃었다. 남자는 짧은 뜸을 들인뒤 내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울트라 메가톤급 뉴스를 전했는데, 바로 다음 주에 먼 나라로, 이웃 나라도 아닌 아주 먼~ 어느 나라로 떠날 것이라는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계획으로, 떠나기 직전에 연인 같은 관계를 만드는 일은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잠시동안 하늘에서 떨어질 감이라도 기다리는냥 입을 헉 벌리고 있자니, 남자는 감 대신 '좋은 친구로서 라면 언제나 환영'이라는 불친절한 멘트를 친절하게 추가했다. 나는 예고편도 없이 개봉한 영화같은 거절에 때려맞아 나의 자존감이 처절하게 녹아내리는 광경을 목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혹은 불행히도) 남자의 말은 무려 사실이었다.
그는 정말로 다음주에 먼 나라로 떠나갔다. 남자는 지중해를 유영하는 관광 요트를 운항하는 선장이었다. 그의 온라인 사진첩은 '다음주'를 기점으로한 푸르딩딩한 이민 인증샷이 겹겹이 올라오며, 형체없이 흐물어진 나의 자존심에 심심한 위로를 건냈다.
아쉬운 채로 묻어둔 마음무덤을
발동으로 톡톡 두드려본다.
봄 가을, 낭만의 태풍이 이는
기분에도 잠잠히 지낼지.
별난 날, 우연의 지진에 흔들려
튀어나오진 않을지, 아니 어쩌면
뿌리째 뽑아낼 방법이라도 있을지 고민하면서,
어설프게 웃으며 앞을 내다본다.
어째서 내가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가 초연하게 본인의 뿌리를 정리하러 온 동안 알게 된 꽤 용기 있는 안경 낀 여자였고, 나는 억지로 그 사실에 만족해야 했다. 나는 그 사람과 친구가 되지 않았다. 그와 내가 좀 어색한 기억을 나눈 좀 어설픈 친구쯤 되는게 싫어서였다. 그보단 차라리 어느 심심한 날 한번쯤 '상황이 허락했더라면?' 하는 낭만의 여지로 묻어둔 마음무덤을 두들겨주는, 그런 창피한 방망이 같은 존재이기를 골랐다. 복실한 수염을 가진 그 사람은 지금쯤 빛나는 바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물빛과 같은 자연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아쉬움을 이렇게 예쁘게 포장해 보면서 그날의 맥주를 마신다. 용기내어 선택한 쓴맛과 그 뒤를 길쭉하게 남아주는 고소한 여운을 찾아 느끼며, 나는 나의 돌아온 심심함을 쉬 달랜다.
글. 신잔디
그림. AM327 (insta:am.3.27)
사진. goog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