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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Feb 23. 2019

그리움에 나는 그만 빈 사람이 된다.

 원해도 원해도 도저히 만날 수는 없는 게 많이 모이면 나는 이렇게 희고 흰 것으로 꽉 찬 공의 공간처럼 빈 사람이 된다. 그러면 나는 잠을 많이 자면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 나를 세세하게 느낀다. 정처 없기를 정처로 하는 여행가처럼 나는 아주 작은 것부터의 실체 또는 미지를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그립다, 또 그립다. 삶의 여러 면은 자주 그리움에 방해가 된다.


그때에 나는 내가 못 보던 세상을 끙끙 앓도록 그리워했다. 그리고 텅 비어있었다.





나는 비었고 떠났다.

 고대하던 그곳에 막상 도착했을 때는. 사실은 집에 있는 가족들이 그토록 얼른 보고 싶을 줄은 몰랐다. 프라하의 2월은 어느 파워 블로거의 <프라하, 매일의 날씨>대로 칼처럼 바람날이 매우 잘 갈려있었다. 할아버지에 할아버지 형님만큼 오래 살았다는 돌바닥은 또 얼음보다 차가워서 조금만 걸어도 발이 쟁쟁쟁 아렸다. 그래도 모든 게 낯설어서 정말 낯설 때만 느낄 수 있는, 칼바람과 언바닥도 관통해버리는 막대한 설렘이 가능은 했다. 공항 셔틀버스를 타고 첫 숙소로 향하는 길은 귀여운 오름이 즐비한 풍경에 제주도가 떠올랐다. 옆에 앉은 엄청 꾸민 중동 계 남자 둘 여자 둘 짝짝이 여행자는 나를 자꾸만 쳐다보면서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것이 뻔한데 굳이 내 얘기를 할 때만 쏙닥쏙닥거렸다. (그래도 내 설렘에는 단단한 여유치가 있었다) 나는 길을 잃지 않고 한 방에 숙소로 도착했다. 백 년은 돼 보이는, 건물이기보단 건축물에 가까운 아파트 4층에 있는 첫 숙소는 영화에서나 보던 중간은 뻥 뚫려있고 층계가 위로 똘똘 뻗어 올라있는 전형적인 유럽식 아파트였다. 나는 몇 번이나 계단 가장자리에 그냥 앉아 “창이 참 이뻐... 이뻐...” 하면서 빛 차는 모습을 오래도록 애무했다. 아침엔 아침만큼 오후엔 오후만큼 아름다웠던 창은 유전처럼, 어떤 족보만큼 긴 추억처럼 오래된 빛을 냈다.



우편함에 준비된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쬐끄만 벽난로 오른편으로 침대가 길게 누워있고 왼편으로는 쬐끄만 부엌과 더 쬐끄만 욕실이 달린 원룸이었다. 이부자리 옆으로 큰 창이 벽처럼 있는 아름다운 집. 나는 문을 열자마자 잠깐 문 앞에 서서 방을 보고나서 라디에이터를 틀었다. 창문을 열어 몇 분 도시 냄새를 맡았다. 창밖으로 즐비한 아파트 옥상 위로 가끔 연기가 뽐뽐 나는 걸 보니 아직도 벽난로를 피우는 집이 꽤 있어 보였다. 나는 인터넷에 자랑된 오렌지색 지붕 밭의 프라하보다 이 풍경이 몇 배로 좋았다. 가끔 들리는 개울음소리와 못 알아듣는 주민들에 말소리는 오래된 모르는 악보에 걸려있는 아름다운 음표처럼 낯설고도 편안했다. 가방은 그대로 두고 어두워지기 전에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어디 어디를 찾아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유심을 이용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대신 많고 잦은 산책과 물음으로 부딪히기로 했다. 그 편이 짧은 이웃이라도 만드는데 상책이었다. 일단 수퍼마켓과 사진관을 찾는 게 목표였다. 처음 보는 길을 처음 지나는 그 미지의 맛을 잊지 못하겠다. 길가에 은근하게 뿌려진 불안의 공기를 마시면서 나는 평소보다 열 배로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다. 낯선 걸음은 걸음 자체로 설렘이라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다만 숙소를 못 찾아오면 큰 일이었다. 길 이름이 적힌 팻말이 나올 때마다 휴대폰 사진을 찍어두며 길을 익혔다. 같은 길을 계속 돌고 돌자니 '00 통닭' '00 은행' '00 핸드폰 대리점' 같은, 너무 요란하다 느끼던 서울식 간판은 하나도 없이 전부 똑같은 죄다 백 년 같은 건물들이 야속해졌다. 비슷한 양식에 건물들 뿐인 데다 도로명 주소를 보는 것조차 익숙지 않아서 왔던 길 찾기가 여간 어려웠다. 그래도 발이 빨라지고 눈이 바빠지는 동안 거대한 마켓과 조그마한 사진관, 마음에 쏙 드는 나무로 된 맥주집은 찾았다.




응당 그리워할 것을 실컷 그리워하러,

생 소시지 몇 개, 빵 몇 개, 처음 보는 모양의 치즈만 골라서 몇 개 그리고 맥주 몇 가지를 사서 둘러 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 멀리서 길 강아지가 나를 보고 반갑게 달려오더니 내 앞에서 돌연 똥을 쌌다. 나는 얼떨결에 그 친구가 똥을 다 누는 동안 옆에 서서 잠깐 기다려주고는 허허허...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갈색 집은 군밤처럼 뜨끈해져 있었다. 오랫동안 아껴 쓴 것 같은 연베이지색 2구짜리 스토브에 생 소시지를 올려놓고 덴마크 민속 음악 연주팀 Dreamers Circus의 ‘Quantum Fantasy’를 틀었다. 빵과 맥주와 구운 소시지로 저녁을 먹고 가져온 필름을 대충 훑어보곤 씻지 않고 누웠다. 비행의 피로와 떠나오기 며칠 전부터 앓았던 장염 탓에 정신없이 잠에 들 참이었다. 갑자기 못 참게도 엄마와 여동생이 그리웠다. 엄마가 여기 와서 '우와 앙-!'하고 손 벽을 짝 치는 모습이나 유나가 그 특유에 자기만의 웃음으로 '하!' 하고는 쌩맥주를 짝 들이키는 모습 같은 걸 떠올리자니 혼자 떠나온 미안함에 금세 울음이 차올랐다. 실은 그때쯤 동생이 좀 아팠다. 계획된 일정이 꽤 길었기에 여행 자체를 취소할까 수 백 번 고민했지만 그때마다 내 등을 떠밀어주던 엄마와 동생이었다. 나는 왠지 춥다고 생각했다. 이불을 더 꼭 끌어당겼다. 잠들기 직전에는 내 앞에서 똥을 눈 강아지 생각을 했다. 손이 가벼웠으면 재빨리 사진을 찍어두었을 텐데... 짜식.  


그날의 음악, ‘Quantum Fantasy’(2013) - Dreamers Circus

시턴 연주자 'Ale Carr(엘리 카)'가 작곡/연주 한 곡입니다. 기타와 소리가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어보시면 조금 더 풍성하고 민속적인 맛이 있죠. 이 시턴이라는 악기는 르네상스 시대 출현한 클래식 악기로 기타보다 몸통은 작고 현은 더 많은 만돌린과 비슷한 모양새의 악기입니다. 앨리 카의 시턴 연주는 이 곡과 같이 무드 있고 클래시컬한 매력이 넘치지만, 리듬적 측면에서 특히 주목할만합니다. 다음에는 그의 뛰어난 리듬감이 돋보이는 곡을 소개하도록 할게요.


'Dreamers Circus'

Nikolaj Busk (Accordion) Rune T. Sørensen (Violin) Ale Carr (Cittern)

덴마크 연주팀 '드리머 서커스'는 덴마크 민속 음악에 거점을 두고 다양한 시도의 창작곡을 연주하는 3인조 연주팀입니다. 기타와 비슷한 민속악기 시턴, 바이올린, 아코디언(때로는 피아노)의 3인조 구성으로 유럽 전역에서 활발하게 연주합니다. 짧고도 긴 프라하 여행 중 가장 많이 들었던 이 팀의 음악을 이야기와 함께 엮어 소개할까 해요. 오래 두고 들어도 좋을 곡들이 많습니다. 느리고 재미있게 들어주시기를 바라요.




'그리움에 나는 그만 빈 사람이 된다'

글. 사진 신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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