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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Mar 02. 2019

오래가는 것은 자국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은 우유에 빠진 시리얼처럼 시간이라는 배경을 달콤하게 만든다. 나는 오늘 인사할 곳이 없다. 들를 곳이 없다. 나는 오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선택과 결과가 홀가분하게 해쳐지는 때! 그것은 내가 그 무엇도 할 수가 있게 만든다. 나는 달콤하게 말아진 시간을 적당히 가르며 일어난다. ‘목적지 없는 외출을 해보자. 한 개도 미리 예측할 수는 없는 오늘로 가자, 마땅한 일이라면 삶에 근사한 문장 하나가 얹어질 것이야.’ 나는 우연에 또 지나치게 기댄다.





아무렇게나 남쪽으로

 프라하의 아름다운 블타바 강줄기는 검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나뭇가지와 한 팀으로 기꺼이 도시의 무늬가 된다. 가장 유명한 카를교와 올드 타운 근처로는 관광객이 발 디딜 틈 없이 깨알 같은 한몫들 차지하고 있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걸었다.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아래로, 아래로 그냥 계속 걸었다. 낮에는 체코 동화작가 요제프 라다의 전시를 봤다. 긴 시간을 건넌 것 치고 나는 너무나도 동심을 느꼈다. 동그랗고 따듯하고 애잔했다. '은근히 슬프고 아주 예쁜 것은 오래가는 법이로구나'생각하면서 라다의 그림을 머리에 쥐고 다시 아래로 걸었다. 한 겨울 프라하의 강가 풍경은 칼바람과는 딴판으로 아름답고 따듯하다. 흐림이 매일이지만 뭐랄까 흘러온 시간이 그걸 따듯하게 데워 주는 것 같아. 블타바 강은 서울에 한 강에 비하면 좁은 시냇물 수준이라 도보로 간단히 다리를 오갈 수 있다. 안 보일 때까지 즐비하게 늘어져있는 다리들. 나는 아무 다리나 하나 건넜다.


Josef Lada (요제프 라다) 1900 활동하던 체코(보헤미아) 동화 작가, 화가의 그림




지나가다 발견한 근사한 술을 파는 서점에서 한 잔 걸치고 싶다! 하면서 걷다가 추위에 항복하여 또 아무 곳이나 들어갔다. 그리고 그만, 밤이 오는 줄을 몰랐다.



오-! 줄리앙

최선을 다 하여 살아가고 있는데도 주위를 돌아보면 어쩐지 한 곳에 고여있는 기분이 든다. 봄은 그런 나의 억울함을 외면하고 달콤하게 분다. 미뤄오던 일들은 처참하게 미뤄진 채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노려본다.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억지로 무언가 해 내는 방법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행히 엄마의 부지런한 천성을 이어받은 나는 한 없이 게을러지는 정신의 휴가를 다소 쓸데없는 일들로 바쁘게 쓴다. 모르는 번호의 버스를 타고, 주머니 영혼을 털어 맥주를 사 먹고, 도서관에 가 책은 빌리지 않고 떡라면만 시켜서 먹는 다던지,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해 질 녘까지 버틴다던지. 그렇게 제 멋에 취해 한바탕 시간을 탕진하다가 보면 그제야 제 자리로 좀 돌아올 줄 알았지만. 어쩐지 자꾸만 제 길을 잃어버린다.

“내일 알 길이 없으니까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철철 가싯길도 밟아야만 단단해지는 것 이 아니겠어요. 좀 웃어요. 따듯해질 때까지..."


거기까지 쓰고 있는데 머리통 오른편으로 뜨거운 시선의 기운을 느꼈다. 힐끔 보니 사람이 내 볼에 얼굴을 닿을 듯이 들이대며 내 수첩을 실눈으로 뚫어보고 있었다. 나는 쪼금 찡그렸지만 얼른 웃었다. 우리는 2초간 서로를 쳐다봤다. 밝은 갈색 눈동자에 윤기 나는 노랑머리, 마르고 날렵한 세모형 얼굴을 가진 그는 한눈에 봐도 미남형의 2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길고 예쁜 얼굴처럼 곱고 날렵한 손가락을 살랑~ 한 번 흔들면서 내게 “너 뭐하는 사람이니?” 하고 물었다. 나는 급하게 답을 떠올렸지만 쉽게 대답하진 못했다. 그는 질문을 고치겠다는 듯 짧게 한번 머리를 흔들고는 “너 뭘 쓰는 중이야?”로 다시 물었다. 나는 얼른 “그냥 여러 가지를 써. 별로 중요한 건 아니야. 난 여행 중이야. 너는 여기 사니?” 하고 물었다. 우리는 서투른 영어를 빌미로 꽤 오랫동안의 통성명을 거쳐 '김정은'으로 갔다. 줄리앙은 체코 어느 이름이 어려운 지역 출신이지만 도시가 좋아서 프라하로 왔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휴전상태와 북한 시민들의 인권에 관해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줄리앙은 큰 소리로 잘 웃고 눈이 빛났다. 대뜸 저 수첩은 누가 선물해 준 것인지 묻거나 쓰는 펜 브랜드를 묻기도 했다. 나는 호기심 많은 그가 재미있었다. 숙소가 어디쯤 있는지, 언제 돌아가는지 따위의 여행객 전용 코너 없이 '말은 많이 들어봤던 친구의 친구' 같은 기분을 그가 주었다. 우리는 한참 김정은에 관한 서로의 이미지를 떠들다가 체코 출신 문호에 관한 화제로 이동했다. 그가 내게 왜 프라하를 선택했냐고 물었기 때문에. 나는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관해 말했고 프란츠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가 한국에서도 특별히 인기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줄리앙은 체코가 인구 비율 대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인이 있는 국가라는 말을 해줬다. 체코인들은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시를 쓴다고 한다. 시는 스스로에게 혹은 누구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시화집이 은밀히 모여있다는 단골 서점 몇 군데를 짚어주기도 했다. 인중에 센 힘을 주면서 카프카는 체코인이 아니라 독일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 돈이 없었다. 때마침 시간은 9시로 향하고 있었다. 내겐 돈과 현지 유심과 유심이 있어도 전화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어느 타이밍에 자리를 떠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다 결국엔 갑자기 짐을 챙겼다. 일단은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그는 내게 (그까짓 거) 술 한잔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왠지 다시 앉았다. 두어 잔을 얻어먹고 일어나려니 그가 소개해준 선명한 미모의 여자 바텐더가 호의로 내게 또 한 잔을 샀다. 나는 왠지 또 앉았다.




오래가는 것은 자국

이제 나는 현지인을 마주치면 버릇처럼 꺼내던 “네가 좋아하는 펍을 한 곳씩 소개해줘 엉~”을 연이어 남발했다. 줄리앙은 내친김에 당장 같이 가보자고 제안했다. 단지, 그 펍은 게이 펍이고 나는 게이지만, 네가 게이가 아니어도 모두가 널 환영해줄 거라고 했다. 나는 속으론 환영했지만 겉으로는 자재했다. 시간은 이미 11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뛰쳐나가도 나는 숙소를 한 방에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다시 한번 내겐 돈과 유심과 유심이 있어도 전화할 사람이 없었다. 몇십 분이나 장소에 관한 별로 의미는 없지만 나름 심도 깊은 대화 끝에 우리는 부동으로 좀 더 대화하기로 했다. 그의 오랜 연인과 일본인 성소수자 친구의 일화, 그들로서의 삶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이 친구는 말을 참 예쁘게 만져서 썼다. 나는 몇 번이나 “너는 정말 이쁜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구나!”하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우주에 모래 같은 존재라면서 이것저것 따지고 재서 살아봤자 똑같은 모래알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루 몇 번 빛이 그것들을 비출 때, 바닷물에 적셔져 마치 그것 자체로서 빛인 것처럼 빛나는 광경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해는 꼭 하루 몇 번 모래를 비추고 우리가 무얼 하던 빛나는 순간은 자연처럼 온다는 것이었다. '그건 정해진 일이야. 그러니까 우리 아무튼 좀 더 자신있게 살자'라고. '살아남기보단 살아가겠다'고 했다.

뜨거운 네 번의 포옹과 낯선 뺨 키스로 작별하고 둘러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리에 울렸다. “I’m not just surviving, I’m living." 애잔하지만 어딘가 예쁜 말이었다. 그 말, 내게 오래 남을 말로 결정된 것 같았다. 오래된 강가와 오래된 동화에 배인 예쁘고 애잔한 자국같이.



그날의 음악, ‘Annea’(2015) - Dreamers Circus

북유럽 민속 음악을 기반으로 창작곡을 연주하는 덴마크 연주팀 <드리머스 서커스>의 2015 'Second Movement'에 수록된 곡입니다. 아코디언의 아련한 테마 멜로디가 매력적인 곡이에요. 테마를 두껍게 감싸듯 겹치고 흩어지는 바이올린, 시턴의 각 선율에 합체와 분리를 주목하여 즐겨보세요. 주변에 강 가가 있으시다면 강을 보며 들어보시기를 적극 추천합니다. 그날의 감정이 전해질까 봐서요.  




'오래가는 것은 자국'

글. 사진 신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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