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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Mar 09. 2019

신선한 프라하 예술적인 맥주

 나는 맥주를 마시면 감상적이 된다. 소주나 포도주에서는 나오지 않는 맥주 전용 감성은 나를 그때만은 예술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사실 나는 예술적인 사람은 아니다. 딱 말하자면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에 가깝다. 더 딱 말하면 예술적일 여유가 없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없던 예술 혼이 피어나는 순간은 있었다. 스무 살, 첫 직장서 내 업무는 감정평가사 사무실에서 전국 지도를 펼쳐 해당 필지를 찾아 복사하고 등기부 등본을 찾고 평가사에게 필요한 자료를 준비 대령하는 일이었다. 은아가 없었다면 몇 개월 못 버텼을 지루한 일이었다. 은아는 나랑 비슷하게 입사한 동갑 친구로 노래를 잘 부르고 말을 제멋대로 쓰는 개성 넘치는 친구였다. 우리는 단숨에 친한 친구가 되었다. (회사에서는 우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자리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애를 썼다.) 아마 그때, 은아랑 맥주를 처음 마셨던 것 같다. 우리는 둘 다 노래를 좋아했다. 퇴근하고 자주 노래방에 가기도 하고 어떤 여름엔 그냥 길가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그냥 신이 났다. 은아가 좋고 노래도 좋았다. 우리는 자주 맥주를 마셨다.



 맑고 오래된 프라하에는 낮에도 차처럼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많다. 1인당 맥주 소비량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체코는 유명한 ‘필스너 우르켈’을 포함해서 몇 백 년의 역사를 가진 자국 맥주의 직영점이 셀 수없이 많다. 개다가 모두 아침부터 문을 연다. 얼마 전 우연히 펍에서 만난 친구 줄리앙에게 보후밀 흐라발 덕분에 체코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사실은 그건 뻥이었다. 내가 체코에 오게 된 것은 내가 골랐다가 보다는 오지 않을 수 없었던 쪽에 더 가깝다. 더 딱 말하면 체코는 그냥 고정된 목적지였다. 세상에서 가장 맥주를 많이 먹는 나라라지 않은가! 나는 하마터면 내가 체코인이었어야 했던 게 아닐지 하고 염려하는 것 까지는 아니지만 하마터면 여기 영영 살고 싶을 뻔했다. 그것이 바로 체코 맥주다.



필스너 우르켈, 너 이런 맥주였니

 잘하는 곳에서 상급의 요리를 경험하면 그 맛에 도취되어 맛의 질을 막론하고 그때의 맛을 떠올리며 중하급의 같은 요리를 줄곧 먹게 되는 일이 있다. 내 경우 어릴 적 가지가 맛있는 채소인지 미처 몰랐다. 엄마는 왠지 식탁에 가지 요리를 잘 안 올리셨고 나의 가지 경험은 맛없는 학교 급식이 전부였다. 나는 가지의 흐물거리는 식감과 시간이 지날수록 안 맛있어 보이는 녹색으로 변하는 현상을 무척 싫어했다. 먹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급식이 그립도록 나이가 찼을 때 어느 중식당에서 가지 튀김 요리가 나왔는데 가지 인 줄도 모르고 무척 맛있게 먹었다. 이후로 제이미 올리버 등 영국 요리사들의 요리 동영상에 중독되면서 서양 요리에 가지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발견하고 따라 해 보며 서서히 가지를 좋아하기 시작하더니만 글쎄 지금은 가지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 이처럼 나는 편의점에 들르면 필스너 우르켈을 함부로 집어 들지는 않았다.



간판이 정말 드문 도시인 프라하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간판은 단연 ‘필스너 우르켈’이다. 물론 어느 펍이나 들어가도 맛이 좋지만, 프라하 시내에 딱 다섯 군데 ‘탱크 펍’이라는 암호가 붙는 펍이 있단다. 그중 한 곳을 소개한다.


프라하 올드타운 끝자락에 위치한 '우 베이보두'
탱크 펍은 일반적으로 케그 형태로 운송되는 방식이 아닌 옛날 방식 그대로 커다란 탱크에 맥주를 가득 담아 한꺼번에 많은 양을 그대로 운송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방식에서 지켜지는 신선함은 물론이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운반하고 수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회전율이 높다는 증빙이기 때문에 양조장에서 갓 완성된 맥주와 가장 비슷한 맛을 낸다는 평이 있다. 

U Vejvodu '우 베이보두'
https://goo.gl/maps/nZ2sevnKhbL2

올드타운 끝자락에 있는 이 펍엔 회색 수염을 바이킹처럼 수북하게 기르고 배는 불룩 나왔지만 찡 달린 가죽조끼로 간신히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있는 바텐더가 반겨주시진 않고 그냥 계신다. 프라하 시내 몇 곳에서 필스너 우르켈을 마셔봤지만 이 곳이 맛으로서는 최고였다. 거품은 쫄깃하고 황금빛 맥주는 빛깔 그대로 고소하고 시원하다. 깨끗한 쓴 맛 덕분에 끝 모금까지 개운하고 탄산도 과하지 않다. 무엇보다, 신선하다. 프라하에서 제대로 된 필스너 우르켈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곳으로 추천한다. (테이블에 놓인 프레츨은 공짜인 것 같지만 어디선가 귀신처럼 보고 카운팅을 하니, 프레츨 값으로 가격이 더 나오면 당황하지 않고 돈을 내고 오면 됩니다.)


여행의 묘미는 발견!

 하지만 나는 역시 이걸로는 부족했다. 이 탱크 펍이라는 곳은 위치 때문인지 그 맛 때문인지 관광객 투성에다 무언가 오래된 것은 알겠지만 그 공기가 너무 세련되어서 정말에 여행에 속 느낌이 좀 안 났다. 나만의, 나와의 아지트를 찾고 뒤지는 맘으로 나는 작고 최대한 안 화려한 펍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찾은 근사한 집이 있다. 나처럼 현지인이 주로 찾는 그 공기까지 오래된 펍을 원한다면 추천하고 싶다.

 


 펍에 입장하면 이번엔 프링글스 캐릭터처럼 코 쪽은 봉긋하고 볼 쪽으로 뾰족하게 솟아있는 엄청 멋진 수염을 한 눈사람 체형의 바텐더가 통통한 두 팔을 벌리고 활짝 반겨주신다. 체코어로 ‘도브리 덴’ 하고 인사를 하면 껄껄 좋아하시면서 묻지도 않고 맥주를 한 잔 쾅 따라서 준다. 그럼 나는 그걸 이미 받아 마시면서 멋쩍게 메뉴판을 본다. 사방은 흑백 사진으로 된 아마도 이 펍에 어떤 기여를 한 사람인 듯한 백 년은 돼 보이는 사진과 스텝들끼리 모여 찍은 사진처럼 보이는 단체사진이 흩어져 걸려있다. 중간중간 걸려있는 크고 작은 그림들도 오래되어 보이긴 마찬가지. 이 곳에서 나는 영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 대부분은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는 사람들, 현장일 하다 말고 들른 인부들, 더러는 주부처럼 보이는 아줌마들도 있다. 나는 못 알아듣는 체코어와 한번 봐도 절대 안 잊힐 스타일의 그 바텐더가 참 좋았다. 내가 정말로 어딘가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맥주 맛은 전자만 못 하지만 그래도 이곳이 더 좋았다. 나는 여기서 애정 하는 사람들에게 엽서를 쓰기도 하고, 이따금 짧은 시를 썼다. 뚜비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이 곳에서 한참 뚜비 사진을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그런 곳인 것 같았다. 인생에 얇은 면을 맡기는 곳. 무뎌지는 감성을 세공하는 곳. 가장 평범한 예술이 쌓이는 곳.

옛날과 지금의 '윌린 구' (이미지 출처 : 구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음악, 나를 반겨주신 바로 그 바텐더, 동네 사람들 (이미지 출처 : 구글)
사진을 찾다가 알게 된 사실로서 이 펍은 19세기 프라하 작가들의 집결지였다고 합니다. 가끔 예정에 없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음악들이 연주되기도 하는 곳이고요. 정말로 이 공간은 누군가를 예술적으로 만드는 공간이 맞는가 봅니다.

U Jelínků '우 윌린 구'
https://goo.gl/maps/Z4pPGwF8U2u




그날의 음악, 'A Room in Paris' 2015) - Dreamers Circus

북유럽 민속 음악을 기반으로 창작곡을 연주하는 덴마크 연주팀 <드리머스 서커스>의 2015 'Second Movement'에 수록된 곡입니다. 옛날 악기 시턴과 아코디언, 바이올린의 정교한 합주가 돋보이는 곡이에요. 반복되는 메인 멜로디가 참 낭만적이지요. 다소 격정적인 이 곡은 시작되자마자 하루의 장면을 영화처럼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을 예술로 만들어볼까요? 듣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니까요!





편의점에 줄줄이 놓인 캔 맥주 중 잔디색으로 된 이 맥주가 이제는 내게 일 순위가 되었다. 나는 이제 어디서든 이 맥주를 먼저 마신다. 그리고 점점 더, 예술적으로 된다.



설마, 맥주 킬러인 제가 프라하에서 필스너 우르켈만 마셨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프라하에서 찾은 놀랍고 귀중한 맥주 리스트를 기대해주세요!




'신선한 프라하 예술적인 맥주'

글. 사진 신잔디

매주 토요일 아침 11시 새로운 에피소드가 발행됩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11시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 글과 음악을 들려드립니다.

https://www.instagram.com/jandy.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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