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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Mar 30. 2019

종이와 연필과 그날의 편지

 어린 시절 내게 딱히 단짝 친구가 없었던 이유는 너무 자주 상상하는 바람에 상상 속 언어가 자꾸 입으로 삐져나왔던 것도, 쉽게 흥분하고 쉽게 고요해지는 특별한 성격 탓도 아닌 가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사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사건이 끊이질 않는 날들, 지지고 볶는 게 일상인 천방지축 네 남매. 엄마의 엄마는 아들-딸-아들-딸을 순서대로 낳았고 엄마는 할머니를 너무 닮아서 그만 똑같이 아들-딸-아들-딸을 순서대로 낳았다. (나는 그중 끼여진 딸이다.) 엄마는 서울 은평구에서 오빠와 나를 낳고 여수로 갔다. 그중에서도 시골이라는 여천 조그만 동네에 수예점을 열고 남동생과 여동생을 낳았다. 엄마는 엄마의 30대를 전부 네 아이에게 바쳤다. 어쩔 땐 시절을 빼앗긴 기분도 들었지만, 어떤 기분이라는 걸 느끼기에 시간은 말 그래도 시간처럼 빨랐다. 그맘때 아빠는 이스타나 봉고차에 뒷좌석을 없애버리고 통 트렁크로 만들어 이불과 수예품 실고 도매 사업을 시작했다. 주말이면 혹은 마음이 내킬 때면 아빠는 두껍고 푹신한 이불 몇 개를 겹쳐 트렁크에 깔고는 우리를 실었다. 우리는 산이고 강이고 이따금은 도시고 어디고 달렸다. 적당한 여관에서 뭉쳐서 자고 일어나서 또 달리고 그랬다. 그럴 때면 며칠씩 학교도 안 갔다.


그 와중에도 유나는 엄마 곁을 떠날 수가 없어서 엄마가 늘 앞좌석에 안고 탔다. 좀 커서 제 오빠가 하는 건 뭐 든 지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어린이가 되기 전까지는. 개조된 넓은 차 트렁크에서 아무리 두껍께 깔아도 느껴지는 도로의 진동을 느끼며 입으로 “아아-" 소리를 내면 차가 내는 진동에 맞춰 목소리가 떨렸고 우스운 소리가 되었는데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그 소리를 내는지 내기를 하며 놀았다. 오빠는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맛있는 뻥튀기, 옥수수를 팔아도 엄마 아빠의 주머니를 걱정하며 먹고 싶은 맘을 꾹 함구하는 성격이었다. 나는 엄마한테 말은 못 하고 오빠한테 계속 칭얼대며 좀 사달라고 해보라고 설득하는 성격이었다. 남동생 진호는 뻥튀기를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사달라고 하는 성격이었다. 막내 유나는 안 먹고 싶어 하는 신기한 성격이었다.



 프라하에 지낸 지 한 달 정도 되었다. 어느새 길눈에 밝아졌고, 갈만한 맥주집도 대충 다 가봤다. 그제야 종이 생각이 났다. 나는 새 동네에 가면 꼭 수첩을 구경하는 취미가 있는데, 그날은 프라하에 있는 문구점을 찾아 돌기로 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체코 작가들만의 디자인 소품샵이 있었다. 종이를 사랑하고 소중히 한다는 슬로건 문구에 반해 단숨으로 찾아 나선 곳 '파빼로떼 (PAPELOTE)' 주로는 수첩과 필기구, 종이를 취급하는 곳이다.



PAPELOTE

체코 편집 디자이너들이 모여 만든 페이퍼 디자인 스튜디오. 주로 수첩과 필기구, 포스터, 포장지 등 종이와 관련된 소품을 판매한다. 디자인에 관해 궁금한 점을 물으면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비비드하고 랜덤 한 컬러감이 돋보이는 제품이 많다.

https://www.papelote.eu/

사진 일부 출처 Google

가게는 트렌드에 맞게 귀엽고 쪼그맣고 알록달록 했다. 나는 천천히 가게에 있는 모든 걸 다 봤다. 만져볼 수 있는 건 다 만져보고 봐야만 하는 건 다 보았다. 잘 안 그럴 것 같은 과묵한 직원의 '뭘 좀 도와줄까 너?'라는 물음이 오고 나서야 나는 연필 한 자루와 종이 몇 장, 선물할 수첩 한 권. 그리고 편지지를 샀다. 나는 편지를 좋아한다. 어릴 땐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일기보다 그 편이 더 사려 깊었다. 남자 친구를 사귈 때면 전하기 어려운 말은 주로 이메일을 보냈다. 글로 마음을 전달하는 일은 정성과 고민이 동반되었고 그러자면 자연스럽게 차분해지기 마련이고, 대면하거나 통화할 때보다 퍽 부드럽게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말을 그냥 쏟아버리자면, 한 번은 남자 친구에게 이메일로 이별을 고한 적이 있다. 그는 분명히 '만나서 대화하자고 하겠지…’ 하고 예상했건만 의외로 장문의 회신이 왔다. 몇 주간 며칠 간격으로 정성을 친 마음들을 주고받았다. 물론 우리는 예정대로 헤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이 활자로 남아 있다는 건 정말로 특별한 일인 것 같다. 글은 증명이고 흔적과는 다르니까. 나는 지금도 이따금 그 편지들을 들춰본다. 그와 걷던 길을 걸으며 그를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진하고 선명하게 그를 떠올린다. 우리가 아직 거기에 글자로 있다.


 곱고 갈색인 편지지를 보면서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편지하고 싶었다. 처음은 우리 막내 유나였다.




Koh-i-Noor Hardtmuth, sine 1790

체코에는 유명한 필기구 브랜드 '코이노어 (Koh-i-Noor Hardtmuth, 1790)'가 있다. 노란색 연필 디자인의 시초라고 자부하는 이 브랜드는 몇 백 살의 역사를 가졌다. 연필뿐만 아니라 색연필, 파스텔 또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된다. 아름다운 빈티지 패키지 덕분에 선물용으로 인기가 좋다.

프라하 신시가지에 있는 코이노어 숍
아름다운 코이노어 연필과 지우개. 빈티지 연필도 있다.

https://www.koh-i-noor.cz/en

나는 여기서 양 포지에 살살 말아서 파는 손가락만 한 파스텔이 그렇게 예뻤다. 할 일 없으면 가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직원 몰래 한 번 만져보고 그러면서 왠지 사지는 못했다. 선물하고 싶은 미술가 지인들 몇 명 떠올랐지만 내 여행엔 짐도 없고 돈도 없는 게 콘셉트이었기 때문에 그냥 내가 대신 좀 만져보기만 했다.



 나는 기록해야 한다. 왜냐면 그것만이 지나가는 것들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에. 진호가 뻥튀기를 사달라고 조르는 동안 오빠와 나는 웃으면서 소극적으로 진호를 말린다. 그러면 아빠는 진호가 사달라고 해서 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말리는 나와 오빠를 측은하게 보고 뻥튀기를 사주신다. 우리는 먹는 동안 한 없이 시끄럽고 활기차다. 풍경의 자세한 기록의 과정은 사실을 더 사실로 만들어준다. 그러면 정말 사실적인 사실을 들춰보며 나는 한 없이 그곳에 머물러 본다. 그리움 이라기보다는... 한 번 돌아가 보는 것에 가깝다. 기록이 그걸 가능하게 한다면 그건 도대체 얼마나 소중한 일일까.





그날의 음악
<Dreamers Circus - 'Nine Moons'(2015)>

덴마크 민속 음악 기반의 창작곡을 연주하는 3인조 연주팀 '드리머스 서커스'의 'A Little Symphony(2015)' 음반에 수록된 곡입니다. 바이올린의 화려한 연주가 돋보이는 곡이에요. 바이올리니스트 'Rune Tonsgaard Sørensen(루노 챤스가드 숀슨)' 은 이 팀뿐만 아니라 그래미 어워즈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던 유명한 스트링 쿼텟 'Danish String Quartet'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실력파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이 곡 'Nine Moons'에서는 아코디언 연주자인 Nikolaj Busk가 피아노로 연주해요. 감미롭고도 화려한 이 곡이 오늘의 한 줌의 감성 양념으로 되기를 바랍니다. :^)



  사랑하는 나의 여동생 유나야. 이 편지를 쓰며 도대체 몇 번이나 눈물을 쏟았는지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그만큼 너는 떠올리기만 해도 아련하단다. 여기에 오기 전 날, 아니 비행기에 오르면서도 나는 이 여행이 과연 내 인생에 제대로 된 가치를 줄 수 있을 것인지 고민됐다. 바로 너를 나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또 다른 나와 같은 너의 아픔을 등지고 먼 길을 떠나오는 게 넘을 수 없는 산불 속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단지... 우리가 함께 걷고 볼 이 거리를 내가 좀 더 먼저 걸어보는 것뿐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보내고 있다. 매 시간 속 엄마와 너를 떠올리면서 말이야.

 여기 체코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도 아름다운 풍광에 도저히 눈이 찡그려지지 않는 그런 곳이야. 모든 집들이 액세서리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워. 주로 노란색, 쑥 색, 벽돌색으로 칠해진 집들이 몇 백 년의 시간 동안 고고하게 줄지어져 있다. 네가 아주 어릴 적 내게 " 언니 언니, 하늘에 원래 저렇게 별이 많은 거였어?" 하고 말했을 때가 있었는데, 여기에 와서 그 생각이 났다. 여기 하늘은 하늘이라고 부르기에 지나치게 파랗고 밤에도 빛이 난다. 요즘은 체코 역사에 관해 공부하는데, 여기 사는 민족(보헤미아) 자체가 워낙 오랫동안 지배와 억압, 전쟁에 시달려온 민족이다 보니 첫 느낌이 좀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대. 대신에 뭐랄까 확실한 기준이라는 게 있다는 듯이 거리 대부분이 아주 깨끗하고 특히 화장실이 아주 깨끗하단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불친절한 표정이 좀 불만이었는데 조금씩 낯을 익히고 그들에 관해 알아보려고 노력하다가 보니 이제는 그들의 유머와 동화적인 면모를 조금씩 발견하게 되었단다. 예를 들면, 여기 사람들은 전설이나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해. 그래서 오래된 거리나 나무에는 어김없이 그만의 전설이 있대. 이야기 속에는 늘 교훈이 있고 말이야. 같은 사실도 예술적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체코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미술가, 음악가들이 아주 많거든. 너와 함께 이곳에 오게 되면 엄마는 우아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게 두고 우리 둘이 멋진 미술관에 구경 다녀오자! 그러려면 지금부터 건강관리에 몰두해야 해! 
 
 유나야. 이 먼 곳에서라도 굳이 너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부디 서로가 원하는 삶을 살아주지 못하더라도 서로 멀어지지 말자. 언니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야. 그 누구에게도 비밀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던 닫히고 막힌 내가 언젠가부터 많은 걸 털어놓은 이유는 네게 친구 같은 언니가 되고 싶기 때문이었다. 숨이 가빴던 학창 시절에 내가 너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그게 오랫동안 어쩌면 매일 마음 아팠어. 개다가 내게는 언니가 없으니 너에게만큼은 늦게라도 좋은 언니 노릇을 해주고 싶었다. 그때부터 용기 내서 너에게 많은 것을 말하기 시작했어. 너에게 많은 것을 말해야 너도 내게 무언가 말 해수 있다고 믿었다. 여러모로 무심한 면이 많은 나지만, 너에게만큼은 지독히 못나도 가까운 사람이고 싶구나.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그랬으면 좋겠다. 
몸이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에 어제는 한 달만에 발을 뻗고 잘 잤네. 다이어트하기로 결정한 것은 신의 한 수! 항상 응원하고 있을게. 화이팅!

 사랑하는 유나야. 언니가 너에게 늘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번 편지는 그 한 줄로 마무리하고 싶구나. 너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자랑스럽다. 언니가 기댈 수 있는 멋진 사람이어서 참 고맙습니다.

2018 봄
프라하에서
가장 큰 진심을 담아서, 너의 언니 잔디


'종이와 연필과 그날의 편지'

글. 사진 신잔디

(일부 사진은 구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 11시 새로운 에피소드가 발행됩니다

다음날인 일요일 저녁 11시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으로 읽어드려요.

https://www.instagram.com/jandy.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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