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쳐야만 알게되는 것들
나는 나 자신에 관해서 지극히 수축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자아적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관한 책임감 보다는, 사회 속에서 나 라는 사람이 어떠한 모습으로 인지되는가에 더 큰 책임감을 가졌다. 나는 끊임없이 사회 속의 시선에 의거하여 자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에 관하여 숙고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사교성이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유년기의 호기로움은 아득해져갔다. 나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쌓여간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만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하지만 성격 좋은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주는 안도감은 오래가질 못 했다. 나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늘 직선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자유로운 언행을 부러워했다. 비밀은 쌓여가고, 나는 누구보다 내 자신에게 점점 거짓말쟁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쯤 나는 짝사랑에 영혼이 지쳐있었다. (나는 정말로 줄 듯 말 듯 한 마음의 줄다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견뎌내지 못 하는데, 아마도 긴 첫사랑에 관한 치명적인 흉터일 것이다.) 나는 막연하게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집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 근교의 인쇄소에 취직하여 책 제본을 배우고 있었다. 매일 아침 가게 셔터를 열었을 때 풍기던 시콤한 잉크냄새와 그 끝으로 묵직하게 몰려오는 재생지 냄새가 따듯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주 슬프게도, 나는 그 냄새가 나를 따듯하게 한다는 것을, 빼곡한 언어들을 이어 붙여 한 흐름으로 만드는 과정의 실랄함에서 느끼는 어떤 희열을 설명 할 친구가 없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사고처럼 이주되었고, 나는 친밀하던 사람들과 정서적 이별을 결정한 상황이었다. 장마처럼 연이어 닥쳐온 굵직한 환경의 변화들로 인한 참담함을 회피하고자 나는 무채색 재생지 더미 속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단지 그것만이, 내가 나를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택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 종이를 자르고 붙이며 휘갈린 마음을 함께 동여맸다. 책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낯 장의 사건들이 작가로 인해 모아 붙여지는데, 내가 이 책을 조금만 건드리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갖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따금 나를 흥분시켰다. (실제로 내게 주어진 일은 교재의 복사본이나 세미나에 필요한 안내서 따위의 어떤 간행물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무언가라도 내 손에서 완전히 엉퀴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나는 단 한번이라도 내 사연을 스스로 재조립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끔씩 슬퍼했다.
원래 있던 것, 혹은 무언가 단단히 예정되어 있던 사실을 뒤바꾸는 일에 관한 매력은 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맥락에서 술이 그렇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늘 함께 술을 마셔보는 편인데, 그 사람이 술을 마시고 행하는 언행을 지켜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의 그 사람을 경험함으로서 각자의 정돈된 이미지가 조금은 해체되는 순간의 느낌이 참 좋아서다. 단 한잔으로 모두가 자연스럽고 로맨틱해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효과가 무엇일까?
미국 발레스트포인트(Ballast POINT)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워터멜론 도라도'(Watermelon DORADO)는 말 그대로 수박 맥주.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화학적 합성첨가향을 생각하면 크나 큰 오산이다. 워터멜론 도라도는 전형적인 IPA 스타일의 맥주로서, 쌉살한 계피 정도의 매운맛과 향긋한 시트로스향이 주를 이룬다. 밀도가 아주 진한편이며, 알콜 도수도 높아서(10.0%)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마시기 좋다. 아주 다양한 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특징적인 향이 바로 신선한 수박향 인 것이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맛은 전형적인 double IPA* 이므로, 맛 보다는 향에서 수박을 찾아야한다.
*double IPA 는 일반 IPA보다 홉과 몰트(보리맥아)의 첨가량을 퍽 늘려 생산한 맥주로서, 일반 IPA보다 농축된 느낌을 가진다. 또한 도수가 높은 것이 특징. 다른 표현으로는, 'imperial IPA' 라고도 불린다.
종이를 자르고 붙이며 하루에도 열두번씩 흥망을 오가던 그 무렵, 우연처럼 나타나서 나무처럼 머물러준 한 사람이 있었다. 동그란 안경이 잘 어울리는 마르고 잘생긴 사람이었다. 그가 웃으면 세상이 착해졌다. 그는 어제와 꼭 같은 하늘 속에서도 오늘의 특별함을 발견 할 줄 아는 건강한 마음을 가진 착한 예술가였다. 말 수안이 없지만 늘 당당했고, 상황이 여의치 않는 날에도 만족 할 줄 알았다. 나는 그런 그가 너무나 신기하여서 그에게 준비 없이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그의 극진한 사랑에 편안하지 못했다. 나는 그를 벗이 아닌 하나의 사회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에게 나는 가장 많은 비밀을 가졌다. 나는 내가 온전히 나로서 누군가에게 다가간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당장 바로잡을 용기가 없었고, 스스로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져있었다. 그는 아마도 나의 불안정한 사회성의 기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매사에 그 앞에 정직한 모습으로 서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나보다도 먼저 알고있었을 것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려 깊고 마음이 건강한 사람. 어제와 꼭 같은 그 하늘이 비구름 먹구름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오늘의 특별함을 발견 할 줄 아는 마음 착한 예술가였다. 많은 날이 지나서야 나는 그사람이 나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언제나 제 자신에게 정직했고, 부끄러움이 없었다. 물론 우리는 곧 헤어졌다. 나는 그 후로도 꽤 많은 날 동안을 나 자신과 정직하게 마주하지 못했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의 안쪽에 숨겨져 함께 흘려보내진 나의 감사한 사람들, 그들이 남겨준 흔적은 마음 어느 곳에 곱게 쌓여져, 나에게 사양할 수 없는 용기를 준다.
나는 뒤늦게 당신을 통하여 나에 관해 배웠다고 말한다. 이제는 내가 내 자신에게 가장 아름다워질 수 있기를 그리는 기특함에 이르고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 조금 더 내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가끔씩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보여지기 위해서 잘 안하던 행동을 하고 싶어 하는데, 나는 그 과정이 결국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각자가 스스로의 자존성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사회라는 무대는 어느 정도 유기적인 사고를 가질 때 조금 더 풍요롭다. 중요한 포인트는 내 관점을 밀고나가는 것 보다도 스스로에게 거짓말 하지 않는 것에 있다. 시도와 사고에 자연스럽게 대처하려면 늘 나의 모자란 민낯을 사랑해 줄 필요가 있다. 가장 오만한 관점은 과거로 만족하는 것, 가장 나약한 관점은 과거를 비교 하는 것이며, 가장 건강한 관점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는 나는 물론 오만하고, 나약하고, 그 건강이 심히 염려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온통 노파심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일은 왜 지나가야만
그 의미가 보일까?
알 길이 없는 나는 벌서 지나가버린 많은 사연의 찌꺼기를 모아 비로소 나만의 길을 만든다. 그리고 이제는 좀 새로운 그 길을 두드려 본다. 잘 다독여진 길목에는 지나간 고마운 사람들의 인사가 쓰여 있다.
글.사진 신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