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에서 주워온 바람
우리의 변하지 않는 로망의 절정, 그것은 과연 '자연스러움'이 아니던가?
아! 나의 사랑스런 맥주!
단언하건대 맥주는 자연스럽다. 맥주는 어느 자리에서나 잘 어울린다. 맥주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으며, 한지붕 식구같이 친숙하고 헤어진 연인처럼 위험하다. 맥주는 접근성이 좋고 중독성은 덜하다. 그리고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으로서 맥주는 자연친화적이다. 우리는 맥주를 사랑하고,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잔을 부딪치며 내는 쨍그랑 소리를 사랑하고, 생활의 먼지를 닦아주는 맥주의 세심한 기포를 사랑한다. 오늘은 꺼지지 않는 폭염주의보를 기념하여 나의 지난 겨울날 맥주여행에 관하여 짧게 회상하려 한다. 이 글을 다 쓸 때 즘엔 나의 두뇌의 기억을 담당하는 어느 콩알 반쪽만한 부분이라도 시원해지기를 기대하면서.
내가 여행 중 현지에 있는 Pub을 자주 찾아가는 이유는 그곳의 자연스러움을 경험하고 싶어서다. 실제로 유명관광지에서 다 알아낼 수 없는 현지의 문화적, 민족적 태세를 Pub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들이 어떤 부분에 유난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타국인을 바라보는 견해는 어떠한지, 더 나아가서는 어떤 분위기의 농담을 좋아하는지 등의 사소한 것들(사소한 것 들은 의외로 가장 중요하다. 사실상 우리는 모든 사소한 것들을 재대로 영위하기 위하여 결국에는 큰 선택을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것들이야말로 여행을 가장 재미있게 하는 요소가 된다. 사람은 역시 사람이 가장 재미있으니까.
벨기에는 맥주가 커피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어서, 카페 분위기의 Pub이 아주 많다. 소박한 정원과, 작은 강아지가 있는 가정집 분위기의 Beer Cafe가 아주 많은데, 그 중 나에게 아주 인상적이었던 한 곳을 소개하고 싶다.
Cafe 'Vlissinghe'...
적막하고 우아한 도시 브뤼헤(Brugge)에 위치한 '블리싱헤(Vlissinghe)'는 500년 전부터 한 자리에 깨 묵은 나무처럼 있던 맥주카페라고 했다. 튼튼한 벽돌로 된 담장에는 나보다 나이가 백배는 많을 것 같은 나무 덩굴이 할아버지 수염처럼 매달려 방문객을 끌어안는다. 정갈한 느낌의 철제 손잡이는 겨울에도 차갑지가 않았다. 내부는 따듯하고 견고한 옛나무로 구조되었는데, 바닥까지 같은 나무로 어우러져 아늑한 세월색을 띄었다. 아빠 품 뽐새로 아득한 벽난로 옆구리로 시절을 상징하는 수동식 다리미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 단 한번의 방문에도 향수가 서리는 곳 이었다. 나는 폭 익힌 양파수프와 비스킷, 그리고 이곳에서 제조하는 하우스 맥주 '블리싱헤'(vlessingge)를 주문했다.
하우스맥주 '블리싱헤'는 고소한 여운이 있는 브라운 에일로서, 탄산이 과하지 않고 차처럼 부드럽게 넘어가는 목 넘김이 특징이었다. 도수도 높지 않고 향도 아주 강하지 않아서 가벼운 오후에 즐기기가 좋았다. 내가 방문한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이런 날에는 자극적인 맥주 보다는 밋밋한 맛의 맥주가 특히 맛있게 느껴진다. 마시면서 자주 든 생각으로 이 공간과 많이 닮은 맛이라고 느꼈다. 화려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편안하면서도, 무거운 여운을 남기는 맛. 두꺼운 책 냄새와 잘 어울리는 온화한 맛이다. 물론 방문하지 않으면 마실 수 없다.
Blekersstraat 2, Bruges 8000,
Belgium
2월 늦겨울엔 '이-월' 이라는 그 발음만치로 소심하고 가늘은 입김이 삐져나왔다. 나는 두꺼운 무스탕코트에 발목까지 오는 갈색 부츠를 신었다. 가난한 여행자는 매 순간을 주머니에 챙기고자 부지런히 걸었고, 지친 신발굽은 처량하게 닳아 걸을 때 마다 드러난 뼛소리로 아우성쳤다. 비 묻은 거리 위로 부딪히는 그 구두굽의 뼛소리가 좋다. 규칙 없는 리듬 안에서 나오는 여유로운 몸짓의 멜로디가 좋다. 이 강물, 아마도 세상이 온통 바람과 산으로 뒤덮히고 육지에는 온통 구름님 그림자만 나돌던 그런 시절부터 졸졸 흘러왔을까? 강둑에 다리를 얼기고 설기며 강물 뿌리나 상상하는 시간이 좋다. 모두가 느린 이 곳, 이곳의 맥주가 좋다.
아! 나만의 자연스러움!
더 멀리 가보고싶다. 조금 더 많은 사고를 겪고 싶다. 배우지 않은 길, 기대를 버리는 일, 이왕이면 느린 길을 선택하는 용기를 부리고 싶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캡틴 로비 윌리엄스가 일러준 선조들의 귓속말과 같이 살고싶다. 그리고 그 길이 적어도 나에게는 온전히 자연스러운 길 일 것임을 믿고싶다.
글,사진. 신잔디
그림. AM327 (insta:am.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