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밤
밤은 적절하게 적막했다. 나는 우울한 소설을 읽으며 시규어로스 음악을 들었다. 마음 속 으로는 그를 기다리면서도 머릿 속 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기분을 의존한다는 것은 위험한일 일뿐 아니라 하마터면 처참한일 일 것이다. 나는 순간에 치닫는 처절한 기분에 애 닳는 마음을 녹여 짧은 시를 적었다.
생일날 받은 나의 수첩은 집을 때 마다 손보다 약간 더 따듯한 온도를 띄는 온화한 가죽으로 덮여있다. 마음마냥 잘 구겨지지도 않는 담백한 살색 종이를 나는 자주 손가락으로 비벼본다. 종이와 나의 이러한 짧은 교감은 내안의 은밀함을 풀어헤치기 위한 어떤 북돋음이 된다. 시를 적는 시간은 빠르고 야속하다. 뱉어진 말의 나열은 움푹 페인 기분의 발자국일 뿐, 돌이킬 수가 없다. 쓰여진채로 남겨지는 허무한 기운이 바로 시의 힘. 마음의 기침인 것 이다. 나는 갈증의 증명인 듯 손가락에 힘을 꾹 쥐어 따듯한 수첩의 속살을 채운다. 느려지기로 작정한 시간의 등을 떠민다. 질문은 많고 정답은 없는 밤. 쓰여짐을 지켜보며 기다림을 휘젓는다.
찬바람이 부니 조금 독한 맥주가 생각난다. 여름 내내 물 대신 맥주를 들이키다 보면 가끔은 내가 나인지 맥주인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한 번씩 도수가 높고 진득한 맥주를 머금고 천천히 바람을 찾아본다. (맥주 먹다가 잃어가는 정신을 또 다른 맥주로 찾는다는 말이 조금 우습게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다.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 다양한 재미를 확보하는 것 이야말로 꾸준함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요즘처럼 낮 바람이 보드랍고 저녁이면 하늘이 아름다울 때에 즐기기 좋을 맥주를 소개하고 싶다.
'올드 라스푸틴' (Old Rasputin)
무시무시한 러시아의 악마 '그리고리 라스푸틴' 의 얼굴이 그려진 올드 라스푸틴은, 스타우트(흑맥주) 중에서도 도수가 세고 밀도가 높은 '임페리얼 스타우트' 맥주이다. 알콜도수 9% 대로 와인과 버금가는 도수를 자랑하지만 알콜향이 거의 없어 독한 느낌 보다는 진한 느낌에 더 가깝다. 촉감이 아주 폭신하고 보드라워서 별다른 안주없이 즐기기에도 좋다. 다크 초콜릿 풍미와 볶은 커피향, 쿰쿰한 훈제향이 녹아있다. 밀도가 높고 진득한 스타일로, 품고있는 향을 충분히 음미하면서 마시기를 강권한다.
기다림의 여름
여름에 나는 주로 사랑을 했다. ‘덥다, 덥다’ 소리를 입에 머금어 볼 살이 올랐고, 찐 살 위로는 날마다 분홍색 보조개가 졌다. 그러다 가을이 오면 나는 자주 이별을 했다. 태양이 폭 찌워놓은 설렘은 하늘이 높고 맑아질 즘 이면 땀 냄새 가시듯 증발했다. 그리고 가을엔 어딘가에 쪼그리고 앉아 지난 여름날을 꼼꼼히 세면서 ‘다시는 기다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중얼거렸다. 겨울이면 외로운 친구들과 알콩달콩 잘 지냈다. 그러니 여름은 늘 내게는 빠른 계절, 하지만 기다림의 계절이었다. 사랑에는 어김없이 기다림이 따랐고 대게로 그 끝은 또 다른 기다림일 뿐이었다. 바쁘게 이런 저런 기다림을 챙기다보면 금세 여름이 지나갔다.
비스듬히 누워 기다림에 관하여 생각한다. 부끄러운 기억이 엄습한다. 그래도 잘 살아내야지. 나는 돌아누우며 이 고루한 감정이 홍수가 되어 소중한 상대에게 범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슴을 턱턱 두드리며 무엇도 그르치지 말자고 스스로 부탁한다. 외로움에 흥분한 마음은 지치고 힘차기를 반복하다가 피곤에 못 이겨 가라앉는다. 적절하게 적막한 여름의 마지막 밤이 시간을 크게 한 줌 쓸어 모으곤, 지나간다.
글,사진. 신잔디
그림. AM327 (insta:am.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