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안녕을
안녕하세요. 건강하게 지내시나요? 세월이 많이 지나도록 우리는 서로 만난 적도 없고 어떤 일도 함께 겪지 못했지만 당신과 여전히 긴밀하게 이어져있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아픈 일은 결국 당신을 아프게 할 테고, 당신의 아픔을 알아채게 되는 날 저도 아프게 되겠지요? 지내온 이야기들 보다는 앞으로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제 막 태어난 것과 같이 매일매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읽지 않던 책을 읽고, 쓰지 않던 글을 적고, 불러본 적 없던 음악을 만들고자 합니다. 매 달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고 배우며 바뀌어 갑니다. 몇 십 년간 살아오면서 요즘처럼 배움이 많은 시절이 없던 것 같습니다. 자주 행복합니다. 자주 우울하고요. 좋아 보이는데, 왜 우울하냐고 물으시겠지요? 우울은 자주 찾아오는 예민한 손님 같아요. 왜 오는지 알지 못하지만, 정성 들여 맞이하지 않으면 그를 제대로 바라봐줄 때까지 저를 아주 괴롭힙니다. 그래서 왜 오는지 따질 새도 없이 그저 하자는 대로 비위를 잘 맞추어 주기만 하면 웃는 얼굴로 떠납니다. 만약 제가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거나 지나치게 이기적 이거나 당신을 잘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건 우울을 대접하는 중 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연민은 삼가 주세요. 행복한 날이 훨씬 더 많으니까요.
당신은 어디쯤 지내시나요? 당신의 인생 중에.
저는 ‘모든 게 지나는 중에’라는 말을 좋아해요. 다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무한대로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과거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져요. 이 말로 자칫 허무해지지 않으려면 순간을 중시하면 돼요. 어차피 이 시간도 지나갈 텐데, 순간을 즐기자. 하는 식 으로요. 그러면 나에게 조금 관대해지고 잘못한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생각하게 돼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지나온 일은 그냥 지나가는 중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그곳에 두자는 거예요. 더는 데려오지 말고 지금만 생각해 보자.
당신도 우울한 날이 많겠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으니까요. 그럴 때면 지금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만 생각하세요. 지금 당장 당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어딘가 연결되어 있는 저의 사랑을 생각하세요. 저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장 살아가는 게 바쁘고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 바쁘고 그렇게 지난한 시간을 지나오면서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도 지금 당신이 지금의 당신이 되었다는 것에 저는 함께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스스로를 용서해 주세요. 우울은 손님으로 들이고 그 앞에서 이따금 펑펑 울어주세요. 잘 돌려보낸 후 시원한 맥주나 한 캔 마시며 안도의 순간을 찾아주세요. 저는 베갯잇을 세탁할 때 그것을 잘 바라봐요. 눈물이 씻겨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마음도 씻어봅니다. 우리 그런 거라 쳐요. 마음도 과거도 지금도 세탁기에 넣고 돌려서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걸로 만들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감당할 수 없어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나를 알고, 내가 당신을 알고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어요.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나요? 그것이 다만 각자의 자리이고 아주 멀어졌다고 해도 이 순간의 안녕을 서로 바랐으면 좋겠어요. 잘 지내세요. 언젠가 우리 마주쳤을 때 울지 말고 웃어요. 화내지 말고 웃어요. 날 안아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영원히 내 안에 살아있을 당신께
복수하지 않는 환대*에 관해 생각하며
순간의 안녕을.
*김현경 저 <사람, 장소, 환대> 22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