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잔디 Oct 25. 2023

그러면 나는 당신의 머리에 내 머리를 대고

사람은 나무나 꽃처럼 가지가 없어서 외로운 걸까.

- 싱어송라이터 전찬준 <사람은>


 사 남매의 치열한 생존경쟁 덕분에 유년시절 극심한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20대를 거치고 30살을 거치며 사 남매가 아닌 사십 명 사백 명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내게 외로움은 지독함도 고난함도 아닌 어떤 쓸쓸함 혹은 공허함 정도로 그쳤다. 이제야 그것은 쓸쓸함일 뿐이었고, 공허함일 뿐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나에게 진정한 외로움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요새 엄마와 지낸다. 그러면서 내 나이의 엄마를 자주 생각한다. 그는 30대 중반에 자식이 네 명이나 될 줄 꿈에도 몰랐고, 막내를 둘러업고 장사를 해야 할 줄 꿈에도 몰랐고, 아우성치는 아이들 틈에서 눈과 귀를 억지로 닫아야만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가을에 태어나 단풍을 유난히 좋아하고 꽃밭을 보면 꼭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어 하던 그도 사 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애교가 많아서 해달라는 건 다 해주는 아버지에게 귀여움 1등 자녀로, 귀한 바나나도 색색이 알사탕도 잘 받아먹으며 지냈다. 30대가 되자 언니는 홀랑 미국으로 떠나고 오빠들은 흩어져 희미해지고 그는 10년 새, 막내에서 첫째로 되었다. 사람은 단숨에 늙는다는 것을 체험하였고 그럼에도 선크림 한 톨 바를 시간 없이 살았다. 숨 좀 돌리자 하니, 60대가 되었다.


 엄마는 지난한 대소사를 홀로 치르면서도 어쩐지 외롭다고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외롭지 않아? 응, 외롭진 않은데? 엄마는 외로움을 모르는 걸까. 너희가 없었으면 엄마는 죽었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외롭지는 않았을 수 있는 걸까? 고통과 외로움은 어쩌면 별개인가 봐.


 나도 엄마를 닮아 외로움을 잘 모른다. 오래 혼자 지내도, 연인이 없어도, 심심할 때 전화할 친구가 없거나 용기 내 걸어본 전화에 딱지를 맞아도 그것이 몇 번 반복돼서 결국에는 별 수 없이 누워있을 때도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은 정말 많은 사람을 마주하고 돌아와 집에서 캔맥주를 똑 딸 때면 슬그머니 날숨처럼 새어 나온다. 좀 외롭네.


 최근 들어 국내 인디 음악을 많이 들어보기 시작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많아 귀에 턱턱 걸린다. 개인적으로 인디 음악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서를 대표하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많이 외롭구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외롭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점점 외로움을 배워가는 기분이 든다.


 엄마는 왜 외롭지 않았는지 알아? 외로움은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야. 나는 요즘 외로움을 배우고 있어. 그건 아마도 말할 줄 알게 되는 것 일지도 모르겠어. 사실 나도 아직 완벽히 알지 못해. 그치만 이따금 새어 나오는 외롭다는 소리. 그게 외로움인가 봐. 그런 말이 있었어 엄마. ‘모든 슬픔은 그것을 말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고. 외로움이라는 건 어쩌면 소리 속에 숨어 지내다 마침내 뱉었을 때 사라지는 거 아닐까? 그러다 다시 소리 속에 맺히고 뱉으면 훌훌 사라지고. 엄마, 소리 내 말해줘 내게, 외롭다고. 그럼 나는 엄마 머리에 내 머리를 대고 말할게. 엄마, 나두.




작가의 이전글 나에게 맺힌 수만 가지의 당신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