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올데이즈
이번 부산 여행에서는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던 숙소 '굿올데이즈'에 머물렀다. 부산의 구도심인 중앙역 근처에 위치한 이곳은 단순한 숙소를 넘어 특별한 공간이자 경험이었다. 조용히 독서와 글쓰기에 집중하기 좋은 곳, 아늑하면서도 농밀한 분위기가 나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곳이다.
예전부터 오고 싶었는데 조금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였었다. 그러던 중 다락방 북클럽에서 만난 N이 이곳을 강력히 추천해 주었다. 얼마 전 다녀왔는데 너무 좋아 숙소에서 한 발짝도 나가기 싫었다고 했다.
N은 북클럽 연말모임 때 모임원 한 명 한 명에게 정성스레 손글씨로 편지를 써서 빨간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내게는 ‘사랑을 담아 슈톨렌'이라고 독일어로 적어주었는데 N의 필체와 마음이 너무 다정해 몇 번을 보고 또 봤다. 그 편지를 지금도 내 책상 서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N이 추천한 곳이라면 신뢰가 생겼다. 결국 이번 부산 여행의 숙소는 명확해졌다.
이곳은 머무는 것 자체가 여행이 되는 곳이다. 방에 들어서니 통창 앞에 기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턴테이블이 있었다. 책상 서랍장에는 블랙윙 연필, 마스킹 테이프, 파버카스텔 색연필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모닝북>이라는 초록색 양장본 공책이 있었다. 이사를 가게 된다면 방 하나를 딱 이렇게 꾸며놓고 싶다.
숙소에는 디퓨저, 커피, 티, 그리고 선반에 놓인 책들이 있었는데 물건 앞에는 그것들을 구입한 주변 동네 가게를 소개하는 작은 설명서가 적혀 있었다. 나는 특히 책이 눈에 들어왔다. 뒤라스의 <이게 다예요>가 있었던 것. 그 책은 내가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있었던 책이다. 여기서 이 책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 내 취향과 맞닿은 이 숙소가 더 좋아졌다. 또 다른 책은 <P.S. 데이스>다. 감성적인 사진 에세이로, 그 안에서 만난 작가 조앤 디디온의 젋은 시절 모습은 너무 매혹적이고 우아했다. 워너비로 삼고 싶을만큼.
<Chet Baker Sings>와 <Cigarettes After Sex>의 레코드판이 있어서 음악을 들었다. 나른하고 재즈 스타일의 음악을 배경 삼아 늦은 밤에도, 이른 아침에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낮에 F1963 예스24에서 구입한 조해진의 <산책자의 행복>을 읽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겼을 때는 나도 '살아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라'는 미영의 말을 간직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 중 현지 서점에서 구입한 책을 읽는 일은 책과 여행을 선명히 기억하기 위한 나의 루틴이다.
체크인할 때 부산 풍경이 담긴 사진 엽서와 우표를 받았다. 이 공간이 주는 감성은 누구라도 편지를 쓰게 만든다. 나는 여행에 함께하지 못한 남편에게 썼다. 오글거리게 쓰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도 진심을 담으려 했다. 요즘 유머를 되찾은 당신이 너무 좋다는 말을 썼다.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내 글씨로 차근차근 옮겨 적는 일요일 아침이 소중하고 감사했다.
조식도 만족스러웠다. 아침에 문을 열어보니 나를 위한 선물처럼 바구니가 놓였다. 삶은 달걀, 스콘, 시리얼, 딸기 등이 담겨 있었다. 갓 구운 스콘에 딸기잼을 발라먹자 이게 행복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아깝지 않았다. 이곳은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이다. 여기 머무르면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큰 호텔보다 이렇게 고유의 콘텐츠가 있는 숙소가 훨씬 매력적이다.
<AROUND> 매거진에서 굿올데이즈를 다룬 기사를 발견했다. 이 숙소는 마치 어라운드 같은 감성을 품고 있다. '굿올데이즈'라는 이름처럼, 올 한 해가 좋은 나날들로 채워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숙소에서 읽은 뒤라스의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는 내게 꼭 들어맞는 자유 속에서 나 자신과 접촉하고 있다.” 굿올데이즈에 머물며 나 역시 내게 꼭 들어맞는 자유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