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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대화 나의 노래 Mar 14. 2021

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가 쓴 글자들은 파도가 될 거예요

정동진의 바다는 짙고 푸르렀다. 묵직한 파도 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바다를 마주하니 ‘맞아. 세상에는 이런 곳도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줄곧 보고, 듣고, 매달려왔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생경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니 생각의 환기가 일었다.      


파도는 쉬지 않고 계속 쳤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파도를 만들어 내는 바다에 새삼 경외감이 들었다. 어떤 간절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몸짓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돼 보이기도 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파도를 보며 나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교사로서 그 모든 역할을 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온전하게 쉬어본 적 없는 내 모습이 보여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라는 김연수 작가의 문장이 떠올랐다. 이 문장은 연인에게 하는 말 같지만 사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책 속에서는 죽은 엄마의 영혼이 아이에게 한 말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었는데 그것은 멈출 수 없는 일, 조금도 쉴 수 없는 일, 계속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문장 안에 담겨 있는 엄마의 마음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        


나는 바다를 그저 바라보고만 싶었지만 아이는 바다와 놀고 싶어했다. 차가운 바닷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다 가까이를 맴돌았다. 아이는 바다가 있는 안쪽으로 걸어갔다가 파도가 밀려오면 얼른 달려 나오며 놀았다. 일부러 바닷물에 발이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도망쳤다. 나는 아이를 보고 신발 다 젖겠다고 말했지만 아이는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꺄아악’ 거리는 아이의 소리가 너무 신나게 들려 더 뭐라 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그리고 나도 아이에게로 가 함께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파도 놀이를 했다. 아이는 결국 바지 밑단과 신발 속 양말까지 몽땅 다 젖었다. 아이는 후련하고 시원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놀고 나는 힘이 들어 바깥쪽 모래밭에 가서 주저앉았다. 잠시 뒤 아이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와이자 모양의 삼십 센티미터 정도 되는 굵은 나무 막대기를 들고 내 옆에 와 앉았다.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저 멀리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아이에게 말했다. 

“도현아. 봐봐. 바다는 끝이 없어.” 

“알아요. 엄마. 바다도 끝이 없고, 세상도 끝이 없죠.”


아홉 살 아이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양말이 젖도록 파도와 놀던 아이는 세상은 끝이 없다고 말했다. 많은 것들이 멈추어진 세상 속에서도 아이에게 세상은 새롭고 궁금한 것이 가득한 호기심과 모험의 대상인 것 같았다. 너의 눈에 세상이 그렇게 보여 다행이었다.      


우리는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썼다. 하트도 그리고, 아이의 꿈, 내 꿈도 쓰고, 함께 오지 못한 아빠에게 보내는 메세지도 썼다. 그리고 좀 아까 아이가 바다도 세상도 끝이 없다고 한 말이 아름다워 그것도 썼다. 촉촉한 모래밭에 선을 그을 때마다 막대기가 푹푹 들어가며 진하게 글자가 새겨졌다. 우리의 이야기가 모래밭에 가득했다. 


내가 사진을 찍는 동안 아이는 막대기를 들고 모래밭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돌아다녔다. 어느 순간 보니 막대기가 없었다.

“막대기 어딨어?”

“바다에 던졌어요.”

“에이. 아쉽다. 엄마 글자 더 쓰고 싶었는데.”

“내가 얼마나 멀리 가나 던져봤어요. 괜히 던졌나 봐요. 나도 모래에 그림 더 그리고 싶긴 한데.”     


아이는 물가 근처 바위로 가서 올라섰다.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밟으며 잘도 돌아다녔다. 중간 중간 고여있는 바닷물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때론 발을 빠져가며 재밌어했다. 아이는 바위에 서서 양팔을 벌려 바닷바람을 맞았고, 팔로 날개짓을 하며 갈매기를 흉내 내기도 했다.      


한참 놀고 다시 모래밭 쪽으로 와보니 아까 우리가 써놓은 글자들이 파도에 많이 지워져 있었다. 아이는 순간 실망한 듯하다 이내 명랑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괜찮아요. 우리가 쓴 글자들은 파도가 될 거예요. 바다로 갈 거예요.”


글자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파도가 되고, 바다로 간다는 아이의 말을 들으니 우리가 쓴 글이 영원할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너무나 재밌는 일이라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아이의 꿈이 한 개의 파도가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고 싶다는 나의 꿈도, 중요한 시험을 앞둔 남편을 향한 응원도, 너를 사랑한다는 말도 각각의 파도가 되어 바다로 갔다. 바다는 이제 그냥 바다가 아니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바다가 되었다.      


조개껍데기도 양손 가득 줍고 날도 점점 어두워져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우리가 서 있는 쪽까지 깊숙이 밀려온 바닷물 위에 무엇인가 떠 있었다. 아까 아이가 던졌던 막대기였다. 다시 우리에게로 온 것이다.  

아이는 얼른 막대기를 주워들고는 말했다. 

“우와! 파도가 돌려줬어요. 우리 이야기를 들었나 봐요!” 

“그러네. 바다가 우리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가 봐.”


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끝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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